서울에서 살게 된다면 삼청동에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1988년 여름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그런 주제에도 짧은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친구와 함께 서울에 놀러 갔었다. 그때 내게 서울은 얼마나 큰 도시였던지. 당시에는 우주에 관한 책들을 즐겨 읽었는데, 서울만 해도 이처럼 거대하니 우리 은하, 하물며 태양계가 얼마나 너른 공간인지 짐작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맞다. 이건 옛날 서울역 역사를 빠져나오는 시골 촌놈이나 받을 수 있는 충격이었다.
그러다가 친구는 서울에서 유학하는 누나의 방에 가서 잠을 자고, 나는 내가 좋아하던 한 시인을 만나러 어느 출판사를 찾아갔다. 그 시인은 고불고불하게 계속 이어지는 서울의 뒷골목에 있는 한 출판사에서 편집장을 하고 있었다. 얘기인즉슨, 그 출판사에서는 『우주심과 정신물리학』이라는, 천문학 책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심리학 책도 아닌, 그러니까 ‘宇宙心’이라고 하는 이상야릇한 주제를 다룬 책을 펴낸 적이 있는데, 그래서 그 책의 좋은 독자가 되려면 천문학에도 좀 관심이 있어야만 하고 심리학 쪽도 기웃거려봐야만 했는데, 하필이면 내가 딱 그 책의 열혈독자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출판사에 그 책에 관한 독후감을 적어서 보냈는데, 그 시인(그는 그 책을 번역한 사람이기도 했다)이 내 글을 읽고는 “글을 잘 읽었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몇 번 더 편지가 오갔거나 연락이 됐을 것이고, 내가 서울에 간다는 사실을 알자 그 시인은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얘기했다. 시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멋있었고, 그는 앞에 앉은 내게 김천에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와! 와! 와! 이건 정말 대단하구나.’ 그 순간부터 나는 이 우주공간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됐다. 우주는 그처럼 넓었으니까 열아홉 살의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은 너무나 많았다.
어둠이 내리고 난 뒤, 우리는 아마 뭔가 먹었을 것이다. 그 다음에 나는 그를 따라 버스에 올라탔다. 그 버스에서 나는 마침내 그걸 보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화려하게 조명을 비추고 있던 세종문화회관을. 세상에, 그 건물은 또 얼마나 거대하던지. 세종문화회관의 크기에 압도당해 실신 지경이었던 내 눈앞으로 이번에는 광화문이 들어왔다. “광화문은 /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라던 서정주의 시를 읽은 건 그 다음의 일이었지만, 역시 내 눈에도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거대한 우주”와 같았다. 종점 바로 직전의 정류장에서 우리는 하차했다. (그 뒤로 나는 여러 번 ‘종점 바로 직전의 정류장’ 근처에서 살았는데, 젊은 유학생은 늘 그 언저리에서 방을 구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건 청춘의 주거지에 관한 메타포이기도 했다.)
어두운 거리에는 행인들이 별로 없었다. 군데군데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여름 더위에 못 이겨 거리로 나와 라디오를 듣는 주민들…… 이라고는 절대로 상상할 수 없었다. 그들은 청와대를 경비하는 사복경찰들이었다. 우리가 내린 정류장 맞은편에는 입구에서는 나무밖에 보이지 않는 대저택이 있었고, 그 대저택 앞에서는 경찰들이 바리케이드로 입구를 봉쇄하고 있었다. 시인은 비폭력시위에 나선 성직자처럼 그 바리케이드를 향해 곧장 걸어갔다. 그의 무기는 주민등록증이었다. 주민등록증을 확인한 경찰들은 바리케이드 한쪽을 열어줬다. 그 안쪽은 정말이지,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정적의 거리였다. 시인의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아까 본 그 대저택이 총리공관이며 불빛이 환한 담장 너머가 청와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날 저녁의 일. 그 집에서 잠을 자야만 했는데, 방은 하나뿐이었다. 하나뿐인 그 방에는 불행하게도 시인의 아내도 있었다. 한방에서 세 명이 같이 자는 것이었다면 아마도 나는 따라가지 않았을 것이다. 오오오, 우주는 이렇게도 넓고도 큰데 나는 바리케이드 안쪽 청와대 담장 옆의 작은 방에 고립된 것이었다. 바리케이드와 사복경찰들을 뚫고 내가 그 방에서 도망친다는 건, 그러므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체념한 내게 시인의 아내가 청바지는 벗고 자라고 말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대답했다.
“저는 원래 항상 청바지를 입고 잡니다.”
“그럼 지금까지 너는 잠옷을 입고 다닌 것이란 말이더냐?” “남쪽 지방에서는 잘 때 청바지를 입는다는 소리냐?” 내 눈에는 그런 문장들이 뭉게뭉게 방 안을 떠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동생보다도 더 어린데 뭐가 부끄러워요. 바지 벗고 편하게 자요.”
시인의 아내가 다시 말했다.
“부끄러워서 그런 게 아닙니다. 원래 옷 입고 잡니다.”
다시 한번 내가 말했다. 더이상 두 사람은 내게 바지를 벗고 자라고 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나를 보고 웃지도 않았다. 이윽고 불이 꺼졌다. 몸이 갑갑해서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나를 놀리지도, 강제로 바지를 벗기지도 않은 두 사람이 고마웠다. 나는 정복경찰과 사복경찰이 이십사 시간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청와대 바리케이드 안쪽에서 버클을 꽉 채운 청바지를 입은 채 잠이 들었다. 마치 성처녀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로부터 육 년이 지난 뒤, 내가 삼청동에 방을 구한 것은, 그러므로 우연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나빠져서 마을버스 종점에 내려서도 십 분 정도 더 걸어가야만 하는 곳이었다. 삼청동으로 이사하자마자 나는 전입신고부터 했다. 바야흐로 나는 스물다섯 살이었고, 시인이었고, 또 소설가였다. 잠잘 때마다 청바지를 입고 허리띠를 졸라맸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내가 봐도 ‘인생, 그것은 미지수’였다. 인생을 움직이는 건 말하자면 ‘宇宙心’이라고나 할까. 제멋대로다.
전세계약서에 사인하고 한 달을 살고 난 뒤에야 그게 공유지에 무허가로 지은 건물이라는 걸 알게 됐다. 허탈했다. 그럼 주인이라고 말한 사람은 무엇의 주인이란 말인가? 이런 소박한 질문에 복덕방쟁이는 자신이 주인이라고 소개했던 그 사람은 점유권의 소유자라고 말했다. 공유지라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그 땅을 점유하고 있으면 점유권이 생기며, 삼십 년 정도가 지나면 자기 땅이 될 수도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전세방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담장 너머 청와대 뒷산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아무도 점유하지 않은 땅들이 즐비했다. 그렇군. 그랬던 것이군. 그래서 그렇게 많은 경찰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던 것이군. 그랬던 것이든 어쨌던 것이든 삼십 년 정도가 지나면 자기 땅이 될 수도 있는 곳에서 전세를 살게 되면 방을 뺄 때 필연적으로 들어오는 문 위에 가위를 매달아놓는다든지 하는 일을, 그것도 몇 달 동안 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더 나중에야 알게 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삼청동은 서울의, 아니 한국의 최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2008년 여름 촛불시위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그랬지만, 옛날에도 시위가 벌어지면 삼청동으로 진출하려는 게 시위대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내가 살 때도 삼청동의 초입인 동십자각 부근에는 늘 전경들이 길을 막고 서서 수상쩍어 보이는 사람들을 검문했다. 나는 가끔 청바지를 입고 잠을 잘 뿐, 생김새로 봐서는 수상쩍게 보일 리는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전경들이 검문을 서고 있을 때, 그 검문을 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눈빛이 날카로워 혁명가의 풍모가 어쩔 수 없이 배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그 심사가 좀 ‘宇宙心’을 닮은 것이고, 이유는 단 하나. 그때 내가 스물네 살이거나 스물다섯 살이었기 때문이었다. 검문을 당하면 나는 지체 없이 주머니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냈고, 주민등록증상의 주소지를 확인한 전경들은 맥없이 뒤로 물러섰다. 삼청동 산 5?1번지. 거기가 삼십 년 정도가 지나면 자기 땅이 될 수도 있는 곳이라는 걸 아는 전경은 아무도 없었다. 역시 촌놈들. 그래 가지고서야 청와대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까?
그러므로 시내 쪽에서 엄청나게 많은 최루탄이 터지는 날에도 삼청동 주민들은 명상을 즐길 수 있을 정도였다. 삼청동은 서울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동네였다. 첫 번째 도둑이 없었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제정신이 박힌 도둑들이 많았던 것이다.) 술이 취해서 시비를 거는 사람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술이 취하려고 하는 예비 동작을 취하면 바로 진압해버렸는지 내 눈으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밤이면 삼청터널길을 통제했기 때문에 자동차가 다니지 않았다. 가장 좋은 것은 여름에도 모기가 없어서 창문을 열어놓고 잠잘 수 있다는 점이었다. 모기들을 진압하는 것도 청와대를 지키는 사람들의 임무였으므로 여름이 시작될 기미만 보이면 청와대 외곽에다가 모기약을 말 그대로 쏟아부었다. 총리공관 맞은편 언덕에서 그 광경을 봤을 때는 나는 그게 다 최루가스인 줄 알고 깜짝 놀랐었다. 모기들은 알 차원에서 죄다 진압됐다.
말했다시피 내가 살았던 곳은 산 5-1번지. 조금만 걸어가면 약수터가 나오는 곳이었다. 그 집에서 살 때, 나는 수도경비사령부의 보호 아래 친구들과 밤새도록 술을 퍼마시곤 했다. 밤을 꼬박 새운 뒤에는 그 약수터까지 걸어가서 물을 마시기도 하고, 삼청공원에 가서 괜히 멀쩡한 시민인 것처럼 배드민턴을 치기도 했다. 모두 구토를 수반하는 현기증 나는 일이었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 밤마다 잠을 자지 않았던 것인지 모르겠다. 내게는 더 많은 청바지가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친구와 약수터에서 물을 받고 있으면 새벽 어스름 속에서 머리를 산발한 사람이 다가오기도 했다. 귀신이라기보다는 귀신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었다. 친구는 물을 받다 말고 미친놈처럼 노래를 불렀다.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뭐 그런 노래였다. 듣고 있노라면 그놈의 미래 역시 그다지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노래를 들은 그 귀신이라기보다는 귀신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흠칫 놀란 듯 걸음을 멈추고 어둠 속에서 우리를 쏘아봤다. 그 시선에서는 ‘뭐, 이런 宇宙心 같은 경우가’ 하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머뭇머뭇 우리에게 다가오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다시 온 길을 되짚어 도망가지도 못한 채 그 귀신이라기보다는 귀신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가만히 서 있었고, 내 친구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팬입니다.” 그렇다. 우리는 팬이었고, 그는 술이 취해서 약수터 뒤 집으로 돌아가던 전인권이었던 것이다. 김천 내 방에 들국화의 브로마이드를 붙여놓던 열여섯 살 시절에만 해도 우리가 이웃사촌이 되리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주가 내 손아귀에 다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처음에 집을 구하려고 삼청동을 찾아갔을 때, 내 마음에 꼭 들었던 총리공관 옆 이층은 나중에 알고 봤더니 시인 이문재 씨가 살던 곳이었다. 영문학과 동기생이 구한 한옥은 소설가 신경숙씨가 살던 곳이었다고 한다. 밤마다 마실 갈 때면 삼청동길 옆에 있는, 새벽의 전인권 씨를 연상시키는 형상의 카페에 자주 들르곤 했는데, 거기 가면 늘 소설가 이제하 선생을 볼 수 있었다. 거기서 한 몇 년 더 살았다면 아마도 칼국수를 좋아했다던 김영삼 씨도 볼 수 있지 않았을까나. 삼청동은 세상에서 가장 좁은 우주였다. 그러므로 내가 아는 서울이란 바로 삼청동뿐이었다.
삼청동에서 살면서 가장 힘든 것은 자정 무렵 택시를 잡는 일뿐이었다. 시내 어디에 있든 택시를 타고 가기에는 너무나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걸어다니면서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삼청동이었다. 종로까지만 나가면 거기에 뭐든지 다 있었으니까. 천재지변이나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나는, 비록 그게 점유권 위에서 자는 것이나마 나의 방으로 돌아가 청바지를 입었든 청치마를 입었든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삼청동에서 산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어쨌든 여기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 늘 그렇듯이 중심은 참으로 고요하다는 것. 그게 모기든 취객이든 들끓는다면 그건 거기가 변방이라는 것.
삼청동의 초입에는 전인권 씨가 경영하던 라이브카페가 있었고, 내가 좋아라 하고 행복해하며 다녔던 잡지사가 있었고, 거기서 조금 더 걸어올라가면 밤이면 삼청동 주민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던 치킨집이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쭉 어두운 길이고, 혼자 걸어가면 많은 경찰들이 나를 지켜보던 길이었다. 마지막 슈퍼는 뜻밖에도 총리공관을 지나 용수산 옆골목 초입에 있었다. 뭔가를 사려면 거기서 사야만 했다. 그 슈퍼가 문을 닫으면 편의점까지 이십 분은 족히 걸어내려가야만 했으니까. 그러므로 아마도 점유권만 가진 게 분명할 집들 사이 좁은 골목길을 걸어갈 때면 늘 내 손에는 맥주가 한두 병 들려 있었다. 여전히 ‘宇宙心’은 내게 이해 불가의 영역이었지만, 맥주 한두 병에 취해가는, 모기 하나 없이 참으로 시원한 삼청동의 여름밤 정도라면 이해 불가의 인생이어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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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서울에서는 고작 칠 년밖에 살지 못했던 불우한 상경인. 그 칠 년 동안은 늘 북한산 자락의, 종점이나 종점 바로 직전의 정류장 근처에서 살았다. 이번에는 서대문 바깥의 북한산 자락에서 한번 살아볼까 하는 생각으로 집을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산꼭대기 연탄보일러에 크게 상심한 나머지 3호선을 타고 갈 수 있는 한 가장 먼 곳까지 갔다가 그만 일산에 눌러앉았다. (사실은 서울에서 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었답니다.) 지금은 일산에 만족하고 있지만, 밤이면 스쿠터를 타고 서울까지 나가는 일이 많다. 고가도로를 달릴 때면 고층 건물들과 불 밝힌 언덕을 보면서 서울은 여전히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한다.
※ 운영자가 알립니다<나의 도시, 당신의 풍경>은 ‘문학동네’와 제휴하여 매주 월요일 총 10편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