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 PD는 기묘한 사람이다. CBS 음악 FM <신지혜의 영화음악> <송정훈의 올댓재즈>, 두 편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에 더하여 책 쓰는 일을 하기 위하여 잠을 대폭 줄여도 힘들지가 않단다. 오히려 “굉장히 재미있었다.” 올가을 나온 정혜윤 PD의 매우 유니크한 여행기 『런던을 속삭여줄게』는 설날 직후 밤 12시부터 새벽 3~4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매일 쓴 원고로 만들어졌다. 정혜윤 PD는,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상대방의 말을 더 잘 듣기 위해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태도, 그 자세 때문이었다고 한다.
“보르헤스가 얘기하기도 했는데, ‘그의 말을 더 잘 들으려고 그의 귀에 가까이 갔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문장이에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더 잘 들으려고 몸을 앞으로 숙이는 태도, 자세……. 그것이 나로 하여금 글을 즐겁게 쓸 수 있게 하는 에너지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는데……. 사실 나에게는 그 자세가 글을 쓸 수 있게 했던 힘이었어요. 누가 나에게 말을 하는데 외면하거나 못 들은 척하기가 나는 어려워요. 그래서 해줄 말이 있다는 그 상황 자체가 나에게는 동기부여가 선명했어요. 동기부여가 ‘체력이 좋아요.’ 그런 거라면 굉장히 게으를 소지가 많은데 그 자세, 그 귀 기울이는 자세 자체가 에너지였기 때문에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이야기와 이야기가 오고 가는 느낌 있잖아요. 그런 느낌을 경험했어요. 친밀한 관계, 친밀함……. 이런 것에 내가 굉장히 쉽게 매료되는 것 같아요. 누구에게 귀 기울여서 그 이야기를 듣고, 내 안에서 그 사람에게 해줄 말한 적합한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다시 속삭이며 교류하는 것 자체가 에너지이자 저의 소통방식인 것 같아요.”
여행 그리고 여행자
『런던을 속삭여줄게』를 읽다 보면, 정말 내 옆에 바싹 다가앉아 귓가에 대고 종알종알 속삭이는 정혜윤 PD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는데, 그녀는 정말로 런던행 항공권을 예매하고 런던으로 떠나기 전 여행가방을 싸고, 관련 책을 한두 권 사고, 포털에서 런던 정보를 검색하는 여행자들을 생각하며 이 책을 썼다. 여행사의 여행상품에서 런던은 3~4일의 일정으로 소비되는 도시인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심미안을 가지고 이 기품 있는 도시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누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여기에 런던을 경험한 제 나름의 이야기가 덧붙여져서, 책의 페이지가 갈수록 두툼해지는 바람 혹은 희망.
“여행은 사람이 강해지기 위해 떠나는 거라 생각해요. 또 뭔가 더 채우기 위해 떠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여행 갈 때 『론리 플래닛』 한두 권 사고, 포털에서 여행 정보 검색하고 떠나잖아요. 저는 좀 더 아름다움이라는 관점에서 쓰고 싶었어요. 지식과 정보도 굉장히 중요하고, 그것만큼이나 관점, 관찰하는 능력,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은 사람들이 돌멩이 하나를 보더라도 이것은 돌이라고 안 보는 심미안을 갖게 되었듯이, 만약 내 여행기를 읽은 사람이 있다면,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무덤을 그냥 아무 인상 없이 ‘이것은 무덤이야.’ 하고 넘어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이 책은 여행을 가되 뭐라고 알고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썼어요. 책 끝에 이런 말이 나와요. 책이 점점 두꺼워지는 것을 상상하고 이 책을 썼다고……. 각자 여러분들이 아는 이야기를 붙이는 거예요. 나는 정말 그런 것을 상상하면서 썼어요. 각자 들려주는 이야기, 그것이 연결되어 있는…….”
이 글은 진정한 교양인을 위한 책이다. 예를 들자면 파리의 오르세 박물관 앞에서 나는 우리나라의 여대생 셋이 요란하게 달려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 몸의 절반 정도 되는 배낭을 메고, 한 손에는 커피,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입으로는 담배연기와 웃음소리를 날리며 “어서 가자! 어서 가자!” 외치면서 박물관을 향해 뛰어 오고 있었다. 그들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오르세 박물관이 아침 일찍부터 북적거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가능하면 일찍 도착해야 했고, 파리에선 여자들도 거리에서 낭만적으로 담배를 피울 수 있단 것도 들었으니 그것도 해봐야 했고, 파리에선 테이크아웃 커피를 구하기 힘들다는 것도 들었으니 그것도 해봐야 했다. 나는 하고 싶은 게 넘쳐났던 순간의 그들이 진정한 교양인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우리에게 알고자 하는 욕구, 해보고자 하는 욕구가 흐르는 한 우리는 진정한 교양인이다. 그래서 나는 나로부터 출발해 더 많은 이야기들이 덧붙여져 책의 페이지가 갈수록 두툼해지는 책을 상상하며 이 책을 썼다.
- 「런던 여행기를 마치며」 중
여행을 다니느라 버는 족족 돈을 다 써버린다는 정혜윤PD는 만약 뉴욕에 하룻밤을 머물 수 있다면, ‘하루밖에 못 있어.’가 아니라 ‘하루도 있다.’라고 생각한다. 오직 하룻밤밖에 없다는 그 안타까움, 절실함 때문에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한, 구석구석 이 도시를 누려야 한다! 마치 아름다운 이야기가 많은 새로운 사람을 하나 더 만나는 것처럼, 도시는 혹은 여행지는 정혜윤 PD에게 그런 의미다.
“별들의 먼지 속에 있는 것 같아요. 여행 가서 잊을 수 없는 밤이 참 많아요. 여행 가서 잊을 수 없는 밤들이 많았고, 그 밤들을 진짜 안 잊고 살기 때문에……. 세상에는 여행자들을 위한 방이 따로 있는 것 같아요. 더 많은 이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리고 더 재미있게 살려는 사람들……, 더 많은 이야기를 기다리는 행복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위한 방이 따로 있는 것 같아요.”
결국, 사랑……
정혜윤 PD가 우리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런던 이야기가 있는데 세계 3대 자연사 박물관 중 하나며 7천만 종의 표본이 있다는, 자연사 박물관 이야기다.
“조개껍데기, 해마, 딱정벌레……. 자연사박물관에 있는 표본 중 단 하나도 사연이 없는 것이 없어요. 모든 것에는 다 저마다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 그리고 이탈로 칼비노의 『우주 만화』에 나오는 칼국수 아줌마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어요. 아줌마가 ‘내가 너희들에게 맛있는 칼국수를 만들어 줄게.’라고 말하는 순간, 그 말 한마디에 우주가 확대돼요. 우리에게 우주를 확대해주는 것, 더 확장된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결국은 단순한 친절, 단순한 호감, 따뜻한 마음이라는 것! 나는 자연사 박물관을 통해 꼭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드디어 어느 순간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조그만 더 공간이 있다면, 너희들에게 맛있는 칼국수를 만들어 줄 텐데.” 바로 그 순간 우리들은 모두 공간을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얇은 밀가루 반죽 위에서 밀방망이를 앞뒤로 움직이는 그녀의 동그란 팔이 차지할 공간, 팔꿈치까지 하얀 밀가루와 기름에 뒤덮인 그녀의 두 팔이 반죽을 하는 동안, 널따란 도마 위에 수북이 쌓인 밀가루와 달걀 더미 위로 출렁이는 그녀의 가슴이 차지할 공간을 생각했지요. 우리는 밀가루와 밀가루를 만들 밀, 밀을 경작할 밭, 밭에 필요한 물을 흘러내리게 할 산, 그리고 국물용 쇠고기를 제공해줄 소 떼들을 위한 목초지가 차지할 공간을, 곡식들이 익도록 태양을 비출 공간을, 천체의 가스 성운에서 태양이 응축되어 불타오를 수 있는 공간을, (……) 그리고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걷잡을 수 없이 우주 공간이 형성되었습니다. (……) 그녀는 우리의 그 폐쇄되고 천박한 세계 한가운데에서 하나의 너그러운 충동을, 말하자면 “얘들아, 정말 맛있는 칼국수를 맛보게 해줄게!” 하고 말했던, 최초의 진정한 보편적 사랑의 충동을 준 것입니다.
- 이탈로 칼비노, 『우주 만화』 / 『런던을 속삭여줄게』, 165p
『런던을 속삭여줄게』에서 정혜윤 PD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그리니치 천문대다.
“어느 날 우연히 라디오 PD가 되어서 어리벙벙했는데, 라디오 PD가 된 걸 처음 안 날, 한강변에 벌렁 드러누워서 한 생각이 있어요. 말들이, 사연이, 음악이, 감정이 전파가 되어서 다른 먼 곳으로 날아간다는 것, 내 말의 매개체가 하늘 어디에 있다는 것. 그것이 주는 안정감……. 나에게는 시간의 문제가 참 중요해요. 그리니치에 꼭 가고 싶었어요.”
정혜윤 PD가 매우 사랑하는 보르헤스 아저씨에 의하면 ‘나란 누구인가’의 문제는 ‘시간은 무엇인가’의 문제와 같다.
“‘어떤 시간 속에서 당신은 존재하지만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시간 속에서 나는 존재하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 다른 시간의 경우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존재합니다. 호의적인 우연이 내게 부여한 현재의 시간 속에서 당신은 나의 집에 당도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시간, 그러니까 정원을 가로지르던 당신은 죽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라고 보르헤스의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 있는 문장을 내가 굉장히 좋아해요. 나란 누구인가, 시간은 무엇인가……. 그 문제는 결국 사랑으로 귀결이 된다는 것. 그리니치에서 그것을 생각하고 있으면, 하루빨리 고국에 돌아가서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런던을 속삭여줄게』에서는 정혜윤 PD가 그간 길어 올린 이러한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있다. 종알종알 귓가에 속삭이는 그녀의 음성은 읽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그리고 벅차게 한다.
책, 사람 그리고 여행
정혜윤 PD에게 책은 사람이고, 사람은 책이다. 그녀는 “밤에는 책 속으로 여행을 했고, 낮에는 사람들 속으로 여행을 했다.”
“난 어떤 사람이 어떤 책을 썼든―소설을 썼든, 에세이를 썼든, 그 책은 그 사람에게서 매우 진실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한 진실함 혹은 진정성을 느끼면서 점점 책을 읽다 보니 모든 사람은 자기 인생의 저자라고 느껴요. 누구나 한 권씩의 책을 쓰고 있는 거라고……. 그래서 저한테는 책과 사람이 다르지 않아요.”
어렸을 때 라디오에서 후암동의 누구, 개포동의 누구라고 본인이 사는 곳을 밝힐 때 후암동, 개포동은 그녀에게 미지의 도시였다. 브뤼셀, 뉴욕과 다르지 않은……. 그곳에는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그 고장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온 그녀에게, 그래서 여행은 매일이다.
정혜윤 PD가 그간 책에서, 사람에게서 길어 올린 수많은 이야기들. 그녀에게 육화된 이야기들이 가로로, 세로로 연결되어 새롭게 의미 부여되는 도저한 경지. 작은 소리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귀 기울일 것 같은 그녀의 친근함, 정성 그리고 따뜻함. 그러한 마음으로 책을 여행하듯 사람을 여행하는, 사람, 책, 여행이 모두 연결되는 지경을 보여주는 인생 탐험가, 정혜윤 PD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 보자.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자, 설레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