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닦고 조이고 기름 치자!” - 『남한산성』 김훈과의 만남
우리는 어쨌든 어떤 시대가 되었든 살아남아야……
원고지와 연필, 그리고 지우개를 사용하는 언어의 장인. 원고지와 대면한 그의 모습에서 불상을 조각하는 장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자기만의 소설 미학을 완성하고 있는 김훈을 만났다.
갤러리에서 아름다운 그림을 만나면 걸음을 멈추듯 김훈의 문장은 독서하는 눈길을 오랫동안 멈추게 한다. 안개 낀 차밭을 휘어 감으며 조용히 그리고 묵직하게 흘러가는 섬진강을 바라보는 심정이 되곤 한다. 김훈의 문장은 독자로 하여금 위대한 무엇과 대면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새삼 말을 말답게 하는 작가의 소명을 떠올리게 한다.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 그는 매일 칠판에 적어놓은 이 문구를 보며 마음을 다잡는다고 한다.
원고지와 연필, 그리고 지우개를 사용하는 언어의 장인. 원고지와 대면한 그의 모습에서 불상을 조각하는 장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칼의 노래』『현의 노래』『강산무진』 그리고 『남한산성』까지… 자기만의 소설 미학을 완성하고 있는 김훈을 만났다. 그는 작업실에서 연필을 깎으며 글을 쓰고 있었다.
“작업실은 언제 마련하셨어요?”
“이쪽으로 온 지 이삼 일 정도 돼요. 집에서는 일을 잘 못해요. 인기척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신경이 쓰여서.”
김훈의 작업실에는 신기한 물건이 많았다. 가지런히 놓인 선글라스(계절별로 쓰는 것이 다르단다). 조그만 칠판에는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라는 글이 쓰여 있었고, 책상에는 작은 구식 저울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 다 쓴 몽당연필을 올려놓는다.
“선글라스가 왜 이리 많아요? 네 개나 있네요!” “모두 용도가 달라요. 계절별로 쓰는 선글라스가 따로 있거든요.” 제일 위 은색 테두리 선글라스는 겨울에 쓰는 거다.
“칠판에 왜 ‘닦고 조이고 기름 치자’라고 쓰셨어요?”
“군대 있을 때 총을 매일 닦고 조이고 기름치라고 배웠어요. 그래야 그 총이 오래가고 녹이 안 슬고 제대로 기능을 하죠. 군인에겐 총이 생명이니까. 하루를 엄정하게 관리하자는 뜻인데… 군대 다녀온 지가 35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저걸 써먹고 있네요.”
“조인다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흔들리지 않게. 문장도 그렇게 조여야 하지요.”
“책상 위에 저울은 왜 올려놓으셨어요?”
“이 저울은 할아버지 소지품이에요. 한의사셨던 할아버지가 한약재의 무게를 재기 위해 이 저울을 사용하셨는데, 난 몽당연필을 올려놓지요. 몽당연필이 쌓이면 이 저울이 내려가요.”
작가들은 항상 글을 쓰는 것, 소설을 쓰는 것은 무척 지루한 작업이라고 고백한다. 하루키는 ‘레이먼드 챈들러 식 소설 쓰기’를 권하고 -정해진 책상에서 정해진 시간 동안 글이 써지든 안 써지든 앉아있는 것-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르한 파묵은 만년필 잉크를 확인해가며 글을 쓴다. 어쩌면 김훈도 쓰는 만큼 늘어나는 몽당연필 때문에 기울어지는 저울을 보면서 지루함을 이겨내고 다음 장을 쓸 힘을 내는 것일지도….
“여전히 원고지에 연필과 지우개로 소설을 쓰시나요.”
“네.”
“연필은 몇 자루 정도 쓰셨어요?”
“연필이 수도 없이 들어가죠. 몇 장 못 써요. 없어지는 것보다 깎아서 없어지는 것이 더 많아요. 참 아까워요. 좀 더 단단하게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연필이 독일산이네요? 독일산이 좋은가요?”
“아니, 그런 것은 아닌데. 이 질감이 익숙해져서….”
“작업은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하시는 편인가요?”
“그렇게 하면 참 좋을 텐데. 저는 아침에 작업실에 와서 책상에 앉으면 한 장이나 반 장 정도 쓰면 그날 일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내가 알아요. 오늘은 안 되는 날이구나 싶으면 나가서 놀죠. 그런 날은 앉아 있어봐야 일이 안 되니까. 오늘은 되는 날이다 싶으면 하루 종일 앉아서 쓰지요.”
그는 연필로 글을 쓴다. 원고지에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가며. 다 쓰고 남은 몽당연필은 저렇게 저울 위에 올려놓는다. 저울은 소설가 김훈의 할아버님이 쓰시던 거다. 김훈의 할아버님은 한의사셨다.
“주로 뭐하고 노세요?”
“(갑자기 목소리가 밝아지면서)저는 노는 날은 들에 나가서 혼자 뛰어놀아요. 여기서 조금만 나가면 들판이 많이 나와요. 좋아요.”
“혼자 노는 걸 좋아하세요?”
“죽 혼자 놀았어요. 들판 뛰어다니고, 등산도 혼자 다녀요. 여럿이 다니면 시끄럽고 내 계획에 따라서 올라갈 수가 없어요. 안 따라오는 놈도 있고 모이라 하면 잘 안 모이고.”
“소설가로 사는 건 어떠세요? 노는 것만큼 재미있으신가요?”
“혼자서 하니까 아무런 구속이 없잖아요. 그것이 참 좋아요. 자기가 자기를 단속하고, 자기가 자신을 규율해 나가야 하니까 철통 같은 자기 규율을 해나가야 하지요. 그것이 매우 힘들어요. 나같이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책상에 앉아 있기보다는 나가서 놀고 싶지요. 이것을 견디고 자기가 자신을 다스려 나가는 것이 참 어려운 것 같아요.”
“먹고사는 건 어떠세요? 요즘 글 써서 밥 먹고 살기 힘들다던데요.”
“저는 겨우 먹고살아요. 책 팔아서 약간의 수입이 생기잖아요. 그 수입을 가지고 다음 책 나올 때까지 버티면 되니까…. 책이 나오면 또 약간의 수입이 생겨서 다음 책 나올 때까지 살고, 그러면서 시간이 흐르고 갈 때가 되겠죠. 그러면 가면 되겠죠.”
마이 페이스라는 말이 참 잘 어울리는 소설가다. 그는 영화도 잘 안 보다고 했다. 왜 안 보느냐니까 ‘답답해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세상 흐름에 상관없이, 세상 사람이 뭐에 관심을 가지는지 신경 쓰지 않아 낙후되어도 좋다. 시대의 뒷전이 되어 그저 혼자서 재미나게 들에서 노는 게 좋다고. 그런 그의 낙후성이 부러웠다.
김훈과 자전거 미니어처 그리고 그의 책 『남한산성』
“어느덧 다섯 번째 장편소설이네요,『남한산성』은.”
“내가 옛날부터 역사를 배경으로 하자고 생각한 것이 세 편이었어요. 이순신, 우륵, 남한산성. 이제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은 쓰지 않을 예정이에요. 『칼의 노래』 이순신, 그 사람은 영웅이죠, 영웅. 군사적인 영웅이죠. 『현의 노래』 우륵은 예술의 영웅이고. 한 사람은 무기를 든 영웅이고, 또 한 사람은 악기를 든 영웅이죠. 남한산성은 영웅이 아니고, 치욕의 역사지요. 영광의 반대. 내가 쓸 건 다 썼어요.”
“병자호란에 끌리신 이유가 있나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했어요. 성안에는 일만 명 정도의 군사가 있었고, 45일 정도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간장이 220독이 있었고, 약간의 화약이 있었고…. 적은 20만 명. 청나라 태종이 이끌고 온 가장 우수한 군사들이 성을 둘러싸고 있었어요.
완전한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47일을 버텼는데 성안에서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싸우자는 사람도 있고, 빨리 나가서 항복을 하자는 사람도 있고, 주전, 주화. 아무 얘기도 안 하는 사람도 있고, 오늘은 이 말 했다 내일은 저 말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성을 일찌감치 빠져나가 달아나는 사람도 있고 오늘은 끝까지 싸우자고 했다가 다음 날 달아나는 사람도 있고, 성 밖에도 성 안으로 들어가야 살 수 있다고 해서 성 안으로 들어오는 자도 있고, 자살하는 자도 있고, 아무 말도 안 하는 사람도 있고… 별놈이 다 있지요. 난 그 다양한 모든 인간에게 다 그 나름의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한 거죠. 나름의 정당성과 내적 필연성이 있는 것으로 봤고, 또 그것을 드러내려고 했죠. 총체적인 비극의 전체적인 모습을 들여다보려 한 거죠.”
“소설 속 인물 중 공감이 가는 인물이 있는지요.”
“저는 작가의 말에 밝혔지만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김상헌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나요?”
“주전파, 군사적 현실을 망각한 사람.”
“칸은요?”
“아주 무서운 리더죠. 자기들끼리 싸움을 하던 부족들을 통일하고 강력한 나라로 만들어서 청이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명을 청으로 바꾼 무서운 리더. 힘 자체.”
“선생님은 그런 절대적인 힘 자체를 좋아하지 않으신가요? 권력이 아니라 힘 자체.”
“좋아한다기보다는 이십 세기가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악의 모습. 그러나 근원적으로 회피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왜 악인가요?”
“그것은 남의 자율적 삶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발로 부수고 밟아버리고… 남이 남으로서 자유롭게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지금과 그때가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외양은 달라졌지요. 하지만 다르지 않죠. 본질적인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어요. 한미 FTA 도 그렇죠. 그때나 지금이나 악한 시민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죠. 더불어 그들과 싸우면서, 그들과 더불어 시달리면서 저항하면서.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 그러지 않겠어요. 그러한 세계사의 고통을 해결할 길이 없잖아요. 그렇게 시달리면서 지지고 볶으면서 그럴 수밖에 없지요.”
“인조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소설에서 인조라는 인물을 직접 묘사하지 않고 모든 국면을 다 들여다보는 그런 인물로 그리려 했어요. 뚜렷한 행동이나 말이 없는, 언질로만 알 수 있는 베일 속의 인물. 인조는 비극적인 상황을 자기 몸으로 정리한 사람이에요. 올바른 삶의 길을 간다고 할 수 있지요. 그 이외에는 길이 없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가 살아야지요. 그런 결단을 내린 인조가 훌륭했다기보다는 삶의 길이 그러한 거죠. 인조는 그 길을 간 것이고요.”
“그때의 리더와 오늘날의 리더를 비교해보면 어떤가요?”
“강한 외세와 더불어, 그들과 싸우면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조국의 운명이 갑갑한 것이죠. 앞으로도 그러할 텐데… 홀로 살 수는 없는 거예요. FTA라는 것도 그런 것이겠죠. 싸우면서 또 함께 어려운 것이죠. 하지만 피할 수는 없는 거죠.”
“약한 나라의 숙명이네요.”
“우리는 어쨌든 어떤 시대가 되었든 살아남아야 하는 거예요. 살아남아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운명 속에는 영광과 자족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치욕과 굴종도 있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다 합쳐가면서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거죠.”
분위기는 다소 가라앉았다. 현실을 이야기할 때면 느껴야 하는 갑갑함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한신처럼 바짓가랑이 아래로 기어가는 치욕만큼은 아니지만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모욕과 타협, 변명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분위기를 바꿔볼 생각으로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이번 소설은 문장이 짧아진 듯한데요.”
“문장이라는 것은 소설의 주제에 맞게 문체를 변형해 나가는 것이지요. 저는 사실 긴 문장을 썼는데 이번에는 짧은 문장을 썼지요. 물론 여기서도 긴 문장, 아주 긴 문장도 있죠. 긴 문장과 짧은 문장 사이에서 리듬을 만들어나가는 것이지요.”
“『남한산성』을 집필하시는 데에는 얼마가 걸렸나요?”
“준비한 것은 3년 전인데 쓰는 것은 7개월 정도. 매우 더뎠어요. 『칼의 노래』는 오래전부터 준비를 했지만 거의 두 달 만에 쓴 거거든요. 『현의 노래』는 한 달 만에 썼고요. 이것은 일곱 달이 걸렸으니까 나로서는 엄청 힘이 든 거죠.”
“왜 힘이 많이 드셨어요?”
“우선 기력이 예전만 하지 못하고 등장인물이 많았어요. 인물마다 전혀 다른 이야기를 그려놔야 하니까.”
“이번 작품 만족하시나요?”
“저는 소설을 끝낸 후에 다시는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교정도 안 봐요. 출판사에 갖다주면 지긋지긋해서 다시는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가끔 책이 내 앞에 있으면 보는데 한 줄 읽어보면 아, 이게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 썼을까 싶어요.”
“선생님 단편도 좋아하는 독자가 참 많은데요. 단편에서 다루시는 소재와 장편에서 다루시는 소재가 참 다른 것 같아요.”
“분량이 짧으니까 수다를 떨 길이 없는 거죠. 글을 아껴서 써야 하잖아요.”
“단편 쓰는 것 재미있으세요?”
“단편은 생각보다 재미는 있어요. 원고지 100장에 한 편의 완결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지만 성공하기가 참 어렵지요. 그리고 그것은 돈이 안 돼요. 단편소설 하나에 팔십 만원, 5만 원은 세금으로 떼요. 전 단편 하나 쓰는 데 석 달 걸려요. 아무 일도 안 하고 구상에서 탈고까지…. 그러면 그것 쓰는데 내 비용이 들어가요. 취재 다니고 자료 수집하고 담배 피워야 하고 원고지랑 연필을 사야 하는데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십 원도 안 준다는 거잖아요. 할 수가 없죠. 좋아도 쓸 수가 없어요. 먹고살 수가 없으니까. 문화의 기초라고 하는 문학하는 사람들이 먹고살 수가 없다면 그것은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이 낮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어요?”
카메라를 들이대지만, 그는 시무룩하다. 셔터를 누른 후 뷰 파인더를 들여다 보고, 자못 어두운 얼굴로 “화난 표정 같아요”라고 말을 하고, 다시 카메라 너머에 있는 그를 보니, 그가 웃고 있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 ^^
예전 한 강연회에서 왜 소설을 쓰느냐는 질문에 그는 ‘밥벌이’라고 짧게 대답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단지 ‘밥벌이’를 위해서 글쓰기라는 지루한 노동을 견디기는 어려울 것이다.
글쓰기는 그에게 다가가고 싶지만 영원히 그곳에 수렴되기만 하는 아득한 치욕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무릅쓰고 오늘도 작업실에 앉아 모호한 언어와 씨름을 하는 것이 작가의 운명이다. 그리고 그렇게 패배할 수밖에 없는 싸움에 달려드는 작가를 통해 독자는 비로소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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