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 원의 상금이 걸려있는 세계문학상의 두 번째 주인공 박현욱을 만났다. 세계문학상은 도발적인 여자에게 유난히 약한 것일까? 1회 수상작 『미실』이 자신의 매력을 무기로 세상을 조롱한 아름다운 팜므 파탈, 붉디붉은 치맛자락으로 권력자를 휘어잡은 여자의 이야기라면 『아내가 결혼했다』의 인아는 세상이 몇천 년 동안이나 ‘그렇다’라고 생각한 일부일처제에 뻔뻔하고도 유쾌한 도전장을 내민 여자다.
일부일처제에 도전장을 던지다
『아내가 결혼했다』의 인아는 볼수록 매력적인 외모에, 성격도 좋고, 시댁 식구에게도 싹싹하며, 집안일도 만능이다. 남편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다고 유세를 부리지도 않으며, 대한민국 여자치고는 드물게 제대로 ‘축구’를 좋아한다. 그런데 이 여자가 어느 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물론, 지금의 남편과는 결혼관계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한 지붕 두 남자 그리고 그녀와 그들의 딸. 이 기묘한 동거가 이루어지는 이야기는 지극히 희극적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쿡쿡 웃음을 터트렸는지 모른다.
두 집 살림을 한 여자가 어디 인아뿐인가.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연희도 두 집 살림을 했다. 연희가 남편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안정을, 그리고 정부에게는 사랑의 달콤함을 원했다면, 인아는 두 남자를 모두 남편으로 원했다. 결혼과 연애를 다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결혼 관계를 하나 더 만들겠다는 것이다. 부권사회를 중요시하는, 호주제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라면 “이 아이는 내 아이야”라고 말하는 그녀의 선언에 심장마비를 일으킬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녀가 모권사회의 부활을 꿈꾸는 활동가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인아는 사실 대단한 페미니스트가 아니에요. 소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인아는 가정의 주도권을 쥐고 있기는 하지만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보통 아내의 일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하고 있죠. 시댁과의 관계도 그렇고요. 이것은 덕훈과 이룬 가정에서의 이야기긴 하지만요. 인아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전략과 전술을 적절히 구사할 줄 아는 여자죠. 물론 반칙도 하죠. 그녀는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에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타협이 생활화된 여자죠.”
인아의 모습은 덕훈과의 관계에서 충분히 그려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두 번째 남편 재경과의 생활은 소설 속에 그리지 않았다.
“재경과 인아의 관계는 덕훈과의 관계와는 많이 달랐을 거예요. 굉장히 평등한 부부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상상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두 집 살림, 불륜 그리고 복혼 - 일부일처제에 반하는 사람들
“만약 본인이 덕훈과 같은 처지에 처한다면 어떠실 것 같으신가요?”
“저는 뼛속까지 일부일처제입니다. 이 사회에서 40년 동안 살면서 내면화된 가치에 비추어보아서 그런 가정의 형태를 허용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주인공 덕훈을 저보다 어린 사람으로 설정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어요.”
“사실 우리나라도 그렇게 엄격한 일부일처제는 아니었잖아요.”
“부모님 세대는 전형적인 일부일처제는 아니었죠. 백 년 전처럼 당당하게 첩을 두지는 못해도 두 집 살림을 하시는 분이 꽤 계셨으니까요. 요즘 드라마 보면 출생의 비밀이 주요한 코드잖아요. 그게 다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 아닐까요?”
“지금 40대 역시 충실한 일부일처제라고 하긴 힘들죠. 40대들에게 일부일처제의 모순은 이른바 ‘불륜’으로 표출되었죠.”
“맞아요. 한 때 불륜을 다룬 드라마나 소설이 많이 나왔죠. 제 나이 또래의 사람들 특히 남자들에게 일처다부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에요. 저는 절대로 아내의 또 다른 남편을 인정한 덕훈의 경지에는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아요. 머리로는 전혀 틀린 소리가 아닌데 정신적으로 싫다고 할까요?”
“남성이나 여성이나 사랑을 하면 그 사람을 독점하고 싶어 하잖아요. 그런데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런 사랑의 본성에 위배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사랑에는 그런 속성이 있죠. 그런데 질투심이랄까 성적인 독점이랄까 하는 부분은 역사적으로 사회화된 부분도 분명히 있어요.”
“일처다부제를 소설의 소재로 삼은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폴리가미(Polygamy, 복혼)는 여성성의 코드에 더 맞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흔히 여성성은 소통과 대화 그런 면이 강조되고, 남성성은 대립과 경쟁이라는 코드로 설명하잖아요. 그래서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이 여성성에 더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인아라는 캐릭터가 참 멋져요.”
“사귀면 사귈수록 매력적인 여자죠. 남성의 입장에서 매력적으로 그려진 여자에요. 평범한 가치관을 가진 덕훈의 눈에서 본 인아의 모습이니까 보통 남자들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좀더 강조되어 그려졌죠. 덕훈이 본 모습이 인아의 전부는 아닙니다.”
“인아는 왜 다부주의자가 되었을까요?”
“사실 인아는 가족제도와 결혼제도를 파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여자는 단순한 여자지, 뭔가 신념이 있는 여자는 아닙니다. 처음에는 별로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덕훈이 계속 결혼을 하자고 쫓아다니자 못 이기는 척 결혼을 해요. 덕훈과 살다 보니 결혼의 좋은 점을 깨닫게 되죠.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사는 게 참 좋구나 하는 것을요. 그래서 재경과도 결혼을 하게 되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하고 살고 싶어서요.”
“인아 같은 여자가 연애를 걸어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당연히 사귀죠.(웃음)”
결혼과 축구는 전쟁이다
축구라는 소재를 사용한 것은 완충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일처다부제라는 소재 자체가 파격적이잖아요. 나름의 완충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축구’와 사랑과 결혼에 대한 사회과학적인 이야기를 끌어들였죠. 축구 이야기가 일종의 서브플롯이에요. 결혼과 축구는 ‘호전적’이라는 점에서도 비슷한 점이 많죠.” 결혼의 내부는 영원한 갈등과 대립으로 점철되기 쉽다. 일처다부제라는 파격적인 소재, 그리고 끝없는 대립과 갈등을 잡아내기에 축구만큼 적절하고 재미있는 소재도 없었다.
작품을 집필하기 전까지 특별한 축구팬도 아니었다고 했다.
“그전까지는 축구에 내셔널리즘이 개입되어서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오히려 별로 안 좋아하던 시절도 있었어요.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축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요. 월드컵 후 유럽 축구 클럽의 수준 높은 경기를 보면서 ‘축구’ 자체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박현욱 씨가 특별히 좋아하는 축구 선수는 호나우두와 호나우딩요.
“정말 이 두 선수는 테크닉이 예술이에요.”
책 속에 언급된 축구에 대한 화려한 언급들은 모두 자료조사와 공부를 통해 얻은 것.
“책 몇 권 찾아서 읽고 하루에 몇 시간씩 축구에 관련된 인터넷 사이트를 찾아다니다 보면 누구나 그 정도 지식은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이런 식으로 자료를 조사해서 글을 쓰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이번 작품을 쓰면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축구팬이 된 지금도 ‘축구’가 딱히 인생의 진리를 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의 손때가 묻은 모든 것에 인생이 있지 않을까요? 갖다 붙이자면 ‘컬링’(컬링 팬들에게는 죄송합니다)에도 인생이 있죠.”
쓰다 보면 는다는 생각으로 써온 소설들
2001년
『동정 없는 세상』으로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데뷔한 박현욱 씨는 작가로서 운이 좋은 편이다.
“1999년 말에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습작기간이 아주 짧았죠. 신춘문예와 문예지 공모에서 몇 번 떨어지긴 했어도 데뷔가 빨랐어요.” 작가는 일찍 데뷔하는 편이 좋지만 작품으로 보면 늦게 데뷔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봤다고 했다.
“처음 작가가 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는 ‘쓰다 보면 늘겠지’ 하는 생각으로 글을 썼습니다.” 처음에는 단편 분량인 원고지 80매를 채우는 것도 힘들었다. 작가 데뷔 5년째인 지금 처음과 비교해서 글이 많이 늘었느냐고 물어봤다.
“일단 지금은 장편도 쓰잖아요. 글을 잘 쓰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분량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한 거죠.”
사실 그는 10대부터 문학에 경도되어 ‘오직 문학만을 바라본 문학청년’과는 거리가 있었다. 서른이 훨씬 넘어 처음으로 습작을 시작했고, 본인의 표현대로 운 좋게 데뷔해서 ‘소설가’라는 직함을 이름 앞에 붙일 수 있었단다. 그리고 자의 반 타의 반 전업 작가 생활을 하고 있다.
“사실 제가 글을 써서 먹고 살 것이라고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
처음 작품을 썼던 것은 신춘문예 공고를 본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자의반 타의반 백수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마감일이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무작정 글을 썼죠. 결과요? 당연히 낙방이죠. 보통 신춘문예는 12월 첫째 주에 마감을 하는데, 한 신문사는 14일쯤에 마감을 하더라고요. 또 써서 냈죠.” 역시 낙방이었다.
몇 번 떨어지긴 했지만, 공모전 운은 좋은 편이었다. 장편 소설 3편 중 2편이 당선되었으니 말이다.
“공모에서 당선이 된다는 것이 일단 쉬운 일이 아니죠. 쓰고 싶은 것이 있고, 그것을 인정받는다는 점에서 운이 좋은 편이에요. 그렇지만 제가 소설에 대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어요.”
상복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데뷔작
『동정 없는 세상』과
『새는』 그리고 이번 수상작까지 지금까지 쓴 3편의 장편 소설의 영화판권이 모두 팔렸다. 시나리오 작업에 참가할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시나리오와 소설의 문법은 전혀 다르거든요. 지금 제 작품들이 판권은 다 팔렸는데 아직 영화화된 것은 없어요. 시나리오 작업이 좀 어려운가봐요.”
예술은 짧고 인생은 길다
그는 문학에 대해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저는 ‘예술이 짧고 인생이 길다’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써낸 작품들이 생명력이 있기를 바라지만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그리고 작가로서 그의 소망도 소박하지만 뚜렷하다.
“좋은 작품을 쓰는 것이죠. 좋은 작품을 쓸 때까지 계속 작품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5년이고 10년이고 자신이 원하는, 자신이 생각한 좋은 작품을 써낼 때까지 지치지 않고,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죠.” 세계문학전집을 보면 끝까지 한 작가의 작품은 셰익스피어가 아니고서는 한두 작품에 불과하다. 후대에 전해지는, 생명력을 가진 작품은 몇 권 되지 않는 셈.
“유명한 작가들에게도 분명 졸작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런 졸작들은 다 잊히고 가장 좋은 작품들만 남는 거죠. 그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졸작이라도 지금은 계속 작품을 쓰겠다는 것이 작가로서의 제 자세이기도 합니다.”
소설은 개인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다
그에게 소설은 개인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다.
『아내가 결혼했다』 역시 결혼과 일부다처제에 대한 개인의 이야기이다.
“개인의 이야기에서 결국 사회적인 의미가 도출되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소설도 ‘개인의 구체적인 삶’을 그리지 않고는 이야기를 쓸 수 없습니다. 사회적인 테마를 다룬 소설 역시 한 개인의 삶을 통해 그러한 테마를 구현해야 하니까요.” 그런 그가 30대에 감명 깊게 읽었던 소설이 밀란 쿤데라의
『농담』.
“『농담』이라는 소설은 개인과 그 개인이 몸담고 있는 역사와 사회적 배경들이 섬세하게 직조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이 마음이 들더군요.”
글을 쓰는 것을 100이라고 할 때, 재미있는 것은 1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작가분은 그 1이 마약처럼 좋다고 하는데, 저는 양적인 99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소설을 쓰면서 정말 글을 써서 행복하다고 느낀 것은 두 번 정도였다.
“작가로서 글을 쓰는 것이 가장 행복했던 때는요. 『동정 없는 세상』을 썼던 전해에 다른 작품으로 문학동네 신인상에 응모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본심에도 오르지 못하고 떨어졌지만요. 원고지 500매를 처음으로 다 채웠던 원고였죠. 마감일까지 원고를 썼습니다. 두 부를 출력해서 한 부는 출판사로 보내고, 다른 한 부를 들고 일산 호수 공원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한 장씩 제가 쓴 글을 다시 읽어봤는데, 그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500장이라는 분량을 다 채웠다는 뿌듯함도 있었고,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썼다는 성취감도 있었죠. 잘 쓴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때의 기분은 작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 해요.”
소설가가 아닌 다른 인생을 꿈꾸기도 한다
사실 그는 자신이 지금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 인생의 아이러니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10대에서 30대까지 정말 제 앞에 많은 길이 펼쳐져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수많은 길 중에서 하필이면 제일 잘할 자신이 없는 글쓰기를 하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는 자신이 공무원이 되었으면 차라리 더 낫지 않았을까 이야기를 했다.
“제가 의외로 공무원이 되었으면 잘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마흔이 되어서야 드네요. 아마 공무원이 되었다면 소설은 쓰지 않았을 거예요. 썼다고 해도 지금 내가 쓴 것과는 다른 소설이 되었겠죠.”
순정만화를 읽는 소설가
샐먼 루시디의
『무어의 마지막 한숨』을 비롯한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만화로 흘렀다.
“저 만화도 좋아해요. 요즘 재밌게 본 만화는 『노다메 칸타빌레』고, 유시진과 권교정의 만화도 좋아해요. 최근에 나온 유시진 신작도 다 봤어요. 『그린빌에서 만나요』라는.” 대학 시절부터 허영만이나 황미나 등의 한국 만화를 꾸준히 읽어온 그는 김혜린이 그린
『비천무』의 팬이기도 했다.
“이번에 완결된 『불의 검』도 정말 좋죠.” 책은 주로 집 근처의 도서관을 이용해 빌려 본다고 했다.
“특별히 관심이 있는 분야가 있기보단 이것저것 다양하게 읽는 편이에요. 책을 읽으면서 새삼 고등학교 때의 독서가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는 아무리 재미없는 책이어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끈기가 있었는데 요즘은 재미가 없으면 바로 덮어버리거든요. 감수성이라는 것이 결정되는 10대가 참 중요한 시기죠.”
폴 오스터의
『빵굽는 타자기』나,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보면서 느낀 점도 그런 것.
“그 사람들은 이미 10대 때부터 작가로서의 진로를 확실하게 정하고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자기 길을 갔잖아요. 그런 점이 부럽죠. 내가 10대일 때는 뭘 했나 싶은 생각도 들고요. 저는 서른이 훨씬 넘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까요. 10대 때 좀더 많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아쉬워요.”
소설가로서 그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소설가로 살 것인가 말 것인가는 앞으로도 계속 고민하면서 그는 소설을 계속 쓸 것이다. 다음에 쓸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즐거워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