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 단상
그런데 <멜린다와 멜린다>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우디 앨런이 죽으면 이 너무나도 우디 앨런적인 사람들은 어디로 갈까. 앨런이 죽은 뒤에도 그들은 여전히 앨런이 만든 세계에서 지나치게 섬세하고 적당한 교양과 스노비즘이 넘친 삶을 살아갈까?
얼마 전에 우디 앨런의 <멜린다와 멜린다>를 DVD로 봤습니다. 개봉될 줄 알았는데, 그냥 DVD로 직행했더군요. 그러면서 그보다 평이 나빴던 <헐리우드 엔딩>은 계획대로 9월에 개봉하는 모양이고요.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닙니다. 다소 성격이 모호한 영화인 <멜린다와 멜린다>보다는 태도가 분명한 <헐리우드 엔딩>쪽이 더 관객들에게 호소력이 높겠죠. 상관없어요. DVD 감상이 영화관에서 보는 것보다 특별히 나쁘지는 않았으니까요. 오히려 다른 관객들과 같이 봤다면 이렇게 오붓한 감상은 어려웠겠죠. 우디 앨런은 여전히 모노 사운드를 고집하는 사람이니 사운드가 부족할 이유도 없고요.
그런데 <멜린다와 멜린다>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우디 앨런이 죽으면 이 너무나도 우디 앨런적인 사람들은 어디로 갈까. 앨런이 죽은 뒤에도 그들은 여전히 앨런이 만든 세계에서 지나치게 섬세하고 적당한 교양과 스노비즘이 넘친 삶을 살아갈까?
이런 걱정이 드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을 보살펴줄 수 있는 예술가가 우디 앨런밖에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스콜세지가 자주 다루는 터프한 노동자 계급 남자들은 스콜세지가 없어도 실제 세계와 다른 사람들의 영화 속에서 잘 살아남을 거예요. 하지만 <멜린다와 멜린다>의 캐릭터들은 사정이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우디 앨런이 만든 세계 속에서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앨런의 초기 영화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앨런 자신을 반영하는 앨런 캐릭터들은 물론 앨런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어요. 그건 당연한 거죠. 하지만 그 앨런과 교류를 나누는 사람들은 실제 7,80년대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실제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앨런처럼 지적이었고 말빨이 셌으며 닳디닳은 스노브였지만 그래도 비교적 사실적인 미국 지식인의 캐리커처이기도 했어요.
그렇다면 <멜린다와 멜린다>와 같은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현실감이 부족한 우디 앨런의 인형들일까요?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멜린다와 멜린다>의 캐릭터들은 모두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인물들이었어요. 뉴욕이라는 도시가 정말로 존재하는 것처럼 뉴욕엔 정말로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린다와 멜린다>의 우주는 여전히 우디 앨런의 머리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만큼이나 그들은 ‘순수해’ 보여요. 그만큼 결백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게 아니라 그만큼이나 모두 우디 앨런적인 캐릭터들이라는 거죠. 심지어 치웨텔 에지오포나 클로에 세비니처럼 우디 앨런과 전혀 무관한 세계를 사는 것처럼 보이는 배우들도 이 영화에 들어서면 갑자기 우디 앨런적인 순수성을 풍기게 됩니다.
이건 아마 노화의 증거일 겁니다. 전성기의 예술가들은 대부분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와 대화하거나 투쟁합니다. 앨런처럼 개인적이고 내성적인 예술가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에요. 앨런의 70년대 걸작들인 <바나나>, <애니 홀>, <맨하탄>과 같은 작품들엔 분명 그런 투쟁의 흔적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런 작품들을 통해 명성과 부와 안락과 자유를 얻은 예술가들은 굳이 바깥 세상과 싸워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게 되죠. 물론 계속 싸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투쟁 자체가 고정된 습관인 경우도 많아요.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뒤에도 젊은 시절의 생기와 투지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적습니다. 겉보기엔 아무리 급진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라고 해도요. 우디 앨런 역시 언젠가부터 그런 단계에 접어든 겁니다. 아마 90년대 중엽 이후였을 거예요.
이걸 꼭 나쁘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다소 자폐적인 냄새를 풍기는 건 사실이에요. 이전과 같은 생기도 없고요. 하지만 모든 노인네들이 젊은이의 활기를 유지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낼 모래가 쉰이면서도 여전히 화사한 젊음을 유지하는 이자벨 아자니의 모습처럼 보기 즐겁고 신기할 수 있겠죠. 하지만 노인네들의 정신은 그들의 육체처럼 나이가 들면서 늙는 게 정상입니다. 그게 자연의 순리죠. 중요한 건 어떻게 계속 젊음을 유지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늙느냐는 것입니다.
예술가들은 다섯 가지 방식으로 늙습니다. 젊음을 지키거나, 젊음을 위장하거나, 지금까지 쌓아올린 업적을 고수하거나, 늙으면서 무언가를 더 얻거나. 노망으로 밑천까지 다 날려버리거나. 물론 첫 번째를 고수할 수 있다면 좋을 겁니다. 세 번째나 네 번째라도 괜찮고요. 하지만 쉰 살 먹은 여자들이 모두 이자벨 아자니의 아름다움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이런 정신적 노화의 과정을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어렵죠. 배우들에게는 성형외과의사들과 보톡스가 있으니까. 그러니 몇 십 년 뒤 젊은이들이 여러분을 발전을 가로막는 고리타분한 구닥다리 영감탱이/할망구라고 욕해도 그냥 그러려니 하시길. 조금 더 지력이 남아 있다면 어리석게 자신을 내세우는 대신 조용히 길을 내어주는 현명함을 보이려 노력하시거나요. 물론 어려울 겁니다. 그 역시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다시 <멜린다와 멜린다>로 돌아가면... 전 앨런이 무척 부럽다고 말해야겠습니다. 젊은 시절의 날카로움과 무게는 사라졌습니다. 성공작을 내는 비율도 떨어졌고요. 그러나 그가 안주하기 시작한 작은 세계는 이전의 명료함을 갖추고 있고 ‘도전정신!’을 외쳐대는 젊은이들의 반항과는 무관한 노인네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앨런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순수한 앨런이 되어갑니다. 이 늙은 코미디언이 노화라는 또 다른 자연현상으로 인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그와 그가 만든 세계와 사람들이 무척이나 그리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