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표기식
“잘 읽혀야 한다”는 첫 번째 쓰기 원칙을 갖고 있다는 성해나 작가의 작품은 작가의 말처럼 강한 몰입의 경험을 남깁니다. 결함 있는 사람을 덕질하는 이의 복잡한 내면을, 자신이 잃은 것을 가진 누군가를 질투하는 마음을, 위험한 판단을 경계하지 않는 이와 자신이 다르다고 여기고 싶은 불안함을, 이기심과 자기 만족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채우는 욕망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 인물이 되어 한순간을 살아냈다고 느끼게 되죠. 덕분에 소설이 끝나도 내 안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자꾸 말을 걸어오는 일곱 편의 소설이라고 해도 좋겠어요. 성해나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혼모노』는 요약되지 않는 저마다의 삶을 곡진하게, 섬세하게 그립니다. 그리하여 세상에는 단순한 악인도, 고정된 감정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마침내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이 두 손에 서늘하게 놓였습니다.
읽어주는 사람을 위해서 쓰는 마음
『혼모노』는 2022년부터 2024년 사이에 발표한 단편을 묶은 소설집이죠. 시차를 두고 쓰인 작품들을 한 데 모아두었을 때 비로소 발견되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특별히 이 기간에 집중적으로 했던 질문이 있었나요?
『혼모노』를 쓸 당시엔 집필 외의 질문을 자주 했어요. 많은 작가들이 자기만의 ‘인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한테는 그게 없는 것 같아서 크게 걱정했죠. 표제작 「혼모노」는 서늘하고 강렬한 톤을 지녔지만, 「메탈」은 잔잔하고 따뜻한 편이에요. 이렇듯 통일되지 않은 겹과 색을 가진 작품을 줄곧 써왔던 터라 나의 색과 결에 대한 고민이 컸어요.
지금은 어둠과 빛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이 저의 세계이고, 인장이라고 생각해요. 구애받지 않고 쓰고 싶어요. 「혼모노」의 서늘함이나 생생함, 『빛을 걷으면 빛』의 따뜻함과 잔잔함 모두 제 안에서 떼어낸 것들이죠. 그것이 제 인장이라고 생각해요.
소설가로서의 고민이 있던 거군요. 그렇다면 작가님의 작품이 좋다고 말하는 독자들을 만났을 때는, 이러한 고민으로부터 해방되는 느낌도 컸을 것 같아요.
맞아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고민이 많았어요. 톤이 달라졌으니 독자분들도 혼란스러우실 것 같았고요. 막상 발표하고 보니 이전과 다른 톤을 지닌 작품도 좋아해 주시더라고요. 물론 본인의 취향이 아니라는 분들도 계세요. 하지만 저는 밝은 작품도, 다소 어두운 작품도 쓰고 있으니 취향에 맞게 골라 읽어주시면 좋겠어요.
거듭 작품을 발표하면서 독자에 대한 믿음도 생겼을까요?
물론이죠.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걷는 듯 천천히』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어머니, 애인이라도 좋으니 한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작품을 만들어라’ 그 말마따나 저 역시 누군가를 떠올리며 쓰고자 해요. 물론 작가가 자기 자신을 위해 쓰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의 허기나 갈증을 달래기 위해, 혹은 치유하기 위해 쓰는 것 역시 긍정해요.
저는 저를 위해 쓰는 것보다 타자를 위해 쓰는 게 훨씬 좋더라고요.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더라도, 이 소설이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서 쓰고자 하면 소설이 더 잘 써져요. 그런 작품에 독자분들이 호응해 주시면 더 좋고요. 독자에 대한 믿음과 용기도 그런 과정을 거치며 생겼어요.
‘작가의 말’에서 수록된 작품들을 “내가 쏟아낸 모구”(365쪽)라고 했죠. 숨을 뱉기 위해서 써내야 했다는 말로 읽혔는데요. 독자를 생각하며 쓰는 것과 다른 차원에서, 나 자신에게도 쓴다는 것의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세요?
요즘 ‘세 줄 요약’이 유행이죠. 복잡다단한 문제를 단순하게 요약하려는 추세가 커지고 있어요. 많은 문제가 그러한 비약에서 비롯된다고 여겨요.
삶을 속단하지 않고, 더 깊이 있고 신중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한 맥락에서 문학은 이해와 연대의 과정을 서사로 길고 깊게 풀어주죠. 그게 문학의 효용이고 의미인 것 같아요.
서로 다른 우리가 함께 잘 살아가려면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듣고, 나의 감정을 심도 있게 살피고, 차이와 간극을 섬세하게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지 않을까요.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일이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쓰는 일 역시 마찬가지죠. 독해를 겪으며 한 인간의 세계가 넓어진다고 생각해요. 작가뿐 아니라 독자 역시 소설을 읽으면서 변화하고 삶의 태도가 확장되겠죠. 그러한 낙관을 가지고 계속 쓰고 있어요.
사진 : 표기식
매력적인 오독도 좋다고 생각하는 마음
앞서 각 작품을 쓸 때마다 품었던 질문이 각각 달랐다고 하셨는데요. 그 질문에 나름의 답도 찾게 되나요? 어쩌면 질문이 커진 채로 남아 있을 것도 같고요.
작품마다 달랐어요. 답을 찾은 작품도 있지만, 미결로 남은 작품도 있어요.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가 그랬죠.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는 작품이에요.
「혼모노」를 쓸 때는 어느 정도 답을 구했어요. 무속과 토속 신앙에 흥미를 가지고 「혼모노」를 썼는데요. 쓰다 보니 저의 흥미가 진짜와 가짜라는 담론으로까지 나아갔어요. 소설을 쓰는 동안 진짜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제 안에서 맴돌더라고요. 우리 사회에서 ‘진짜’ 혹은 ‘가짜’로 치부하는 것들은 무엇인지 질문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내린 결론은 흔들리더라도 나로서 흔들리는 게 진짜가 아닐까, 였어요. ‘진짜 가짜’라는 말도 그렇게 나왔고요.
책을 읽다가 ‘Upside Down’이라고 메모했어요. 『혼모노』에 담긴 이야기들을 무엇보다 당연했던 세계가 뒤집어지는 이야기로 읽었기 때문인데요. “모든 확신이 모호해졌다.”(201쪽,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는 문장처럼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독자를 혼란에 빠트려요. 자연스럽게 쓰실 때, 이야기가 어떻게 읽히기를 바라셨는지 궁금해졌어요. 혹은 쓰면서 작가님이 의도한 것이 있다면 듣고 싶어요.
참 좋은 질문이네요. 독자를 혼란에 빠트리며 소설을 쓰겠다는 마음은 없었어요. 그저 독자분들이 오롯이 자신만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받아들여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전복하는 서사로 읽어주셔도 좋고, 사회적 시선에 집중해서 읽어주셔도 좋아요. 혹은 도파민 터지는 소설로(웃음) 읽어주시는 것도 좋죠. 그저 각자의 시선에서 편하게 읽어주시길 바라요. 작가의 의도나 마음을 짚어 주시면 더없이 감사하고요. 더불어 오독도 괜찮죠. 모두 매력적인 오독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제목은 어떤가요? 제목 또한 여러 방향에서 이야기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특별한 요소거든요. 작가님은 제목을 먼저 정하고 이야기를 쓰시잖아요.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인지 자세히 듣고 싶어요. 제목이 작품의 씨앗 같은 건가요?
보통 제목을 먼저 붙이고 소설을 써요. 소설이 제가 지은 뜨개옷이라면 제목은 그 옷에 붙은 실밥이라고 생각해요. 실밥 하나가 풀어지면 한 올 한 올 전부 풀리잖아요. 이와 마찬가지로 제 손에 걸린 제목이라는 실밥 하나가 이야기를 죄다 끌어와요.
「잉태기」는 초고를 절반쯤 쓸 때까지 제목이 달랐어요. 인물과 서사도 지금과 사뭇 달랐고요. 원래는 어머니와 쌍둥이 자매의 충돌을 다루고자 했고, 육아와 관련된 이야기도 아니었어요. 소설의 중반부까지 썼을 때 제목을 바꾸니 소설의 갈래도 달라지더라고요. 아이를 밴다는 뜻의 ‘잉태’와 불온한 사건들이 내부에서 커진다는 뜻의 ‘잉태’를 섞어 지금의 소설을 쓰게 되었어요. 실을 풀고 뜨개질을 다시 시작하듯 그동안 써온 서사를 다른 꼴로 떠서 지금의 서사로 만든 거죠. 그런 식으로 제목이 서사를 추동할 때가 많아요.
「혼모노」는 어땠나요? 제목을 먼저 정한 뒤 쭉 쓰신 거예요?
‘혼모노’의 본뜻은 ‘진짜’ ‘장인’이에요. 온라인에서는 일본 문화에 심취하신 분들을 조롱하는 뜻으로 쓰기도 하죠. 이 단어의 본뜻이 왜 일그러졌는지 궁금했어요. ‘혼모노’라는 긍정어가 어쩌다 밈이 되었는지, 본뜻을 찾고 싶다는 마음으로 제목을 정했죠.
이야기의 얼개를 짜둔 뒤, 답사를 겸해 점집에 갔어요. 신내림을 받은 지 꽤 된 무당에게 점사를 받았어요. ‘엄마에게 잘해라’, ‘성공 가도를 달릴 확률은 반반이다’ 같은 점사를 그 자리에선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는데, 집에 돌아와 이성을 찾고 보니 엉터리 점사 같더라고요.(웃음) 그분은 ‘니세모노(偽物(にせもの), 가짜)’ 였답니다. 그런 경험이 소설의 질료가 되었던 것 같아요.
취재가 많이 필요한 이야기를 쓰시잖아요. 예를 들면 『혼모노』 안에는 건축가, 스타트업 조직, 태극기 집회 등 다양한 삶의 방식이 담겨 있거든요. 점집도 직접 가보셨다고 했는데, 작가님께 취재는 얼마나 중요한가요?
취재를 거치지 않아도 유려하게 쓰는 작가분들이 많아요. 저는 그렇지 못한 터라 노력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취재의 과정이 즐거워요. 집필보다 구상을 하고, 몸으로 뛸 때 더 힘이 나요.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이 큽니다. 그로서 배우는 게 분명 있으니까요. 답사든 인터뷰든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하려 해요. 공간과 순간을 체화해 쓰는 것과 머리로 입력해 쓰는 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인 에피소드도 궁금해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 쓸 때는 용산에 자주 갔어요. 대공분실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민주화운동기념관이 들어섰어요. 그래서 원래의 대공분실은 못 보고, 개축 중인 기념관만 구경한 뒤 주변을 산책했어요. 기념관에서 조금만 가면 대통령 집무실이 있고, 조금 더 가면 전쟁기념관이 있어요. 그 이어짐이 기괴하더라고요. 우리 삶과 밀접한 장소마다 불온한 역사가 녹아 있다는 게 그제야 인지되었어요. 이 소설의 배경은 70년대인데요. 당시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아 마음이 쓰이기도 했어요.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작품을 모티브로 삼아 이 소설을 썼어요. 반 데어 로에의 초기작은 철과 유리로 만든 작품이 주를 이뤄요. 그러한 건물의 냉정함과 차가움이 주인공 ‘구보승’의 작품에도 녹아 있었으면 했죠. 제 관심사나 경험, 취재를 조금씩 섞어 소설을 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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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인물들에 경청하는 마음
“너른 시선으로 사회의 아픔을 포착하며 열린 귀로 멀리 떨어진 이들의 이야기까지 경청하고 싶다.”(366쪽)고도 하셨는데요. 다양한 처지의 화자를 독자 앞에 데려다 놓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처음에는 역사의 물결에 휩쓸리거나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이들을 제가 불러왔다고 생각했는데요. 쓰다 보니 그들이 저를 부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말이에요.
소설 쓸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경청이에요. 인물에게 몰입하고, 그와 친해지고 동화되는 과정, 인물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 뒤 받아 적는 과정이 작가에겐 꼭 필요한 것 같아요. 그것이 소설을 쓰는 묘미이기도 하고요. 문제적 인물이나 악한으로 치부되는 사람일지라도 작가인 저는 일단 그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그 타인에 대한 이해도 넓어질 것 같아요.
맞아요. 미워했던 사람을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도 있죠.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타인의 입장에 서 보려고 하잖아요. 인물의 말을 경청하며 내 세계를 조심스럽게 다져 나가기도 하고요. 무척 귀한 경험이죠.
저 역시 집필할 때는 인물의 입장에 서 보고, 되도록 깊이 몰입하려고 노력해요. 이 사람은 왜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이 사람의 호오는 무엇일까, 같은 질문을 쓰는 동안 자주 해요. 인물과 친해지는 과정이죠.
그래선지 책을 읽으면서 타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타인을 진짜 이해하고 공존할 수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계속하게 되더라고요. 「잉태기」의 화자가 시부와 겪는 갈등이나 「우호적 감정」의 화자가 스타트업 조직에서 동료와 맺는 관계의 양상 등을 볼 때도 그랬고요. 작가님은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세요?
타자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안다’라는 성급한 확신 내지는 단언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타인을 잘 모르기 때문에 안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모르지만 깊이 알고 싶지 않기에 안다는 말로 회피하고 있는 것 같아요. 위험한 방식이죠.
저는 우리 시대에 성급한 이해보다는 느린 인정의 태도가 더 필요한 것 같아요. 타인을 끝까지 이해할 수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면 오히려 건강한 관계가 유지되더라고요. 서로의 차이를 해석하려 하기보다 차이 자체를 존중하는 게 훨씬 좋다고 보고요. 어떻게 보면 그것이 하나의 이해 과정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하나같이 명쾌한 결말은 아니거든요. 진실이 뭔지 알려주지 않고요. 「잉태기」에서도 마지막에 딸이 무슨 말을 하는데 그걸 들려주지 않잖아요. 방금 말씀하신 맥락에서, 어쩌면 팩트보다 이 복잡한 양상을 생각해 보자고 하는 것 같았어요.
이야기를 마침표로 끝내는 게 아니라 쉼표로 끝내고, 활짝 열어두는 것이 무책임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열린 결말을 선호하지 않는 분들도 있고요. 저는 그러한 열린 결말을 ‘여지’라는 다른 명칭으로 부르고 싶어요. 인물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상상의 여지를 남겨두는 게 좋아요. 나쁜 방향이든 건설적인 방향이든 간에 인물이 뚜벅뚜벅 걸어갈 길이 막혀 있지 않고 훤히 뚫려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 작품뿐 아니라 수많은 문학 작품이 열린 결말로 끝난다고 생각해요. 애독자라면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작품을 2차 창작하기도 하고, 작품 속 인물이 앞으로 어떻게 살지 상상하는 과정을 거치잖아요. 그 과정을 통해 문학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해요. 제 작품도 그렇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이야기와 의문점이 나오기도 하죠. 하나의 창구가 조성되기도 하고요. 작품을 읽은 이들끼리 의견을 공유할 수 있는 다양한 환경이 조성되면 좋겠어요. 실제로 『혼모노』를 읽은 독자분들끼리 ‘책얘’라는 것을 하며 친해지기도 한다더라고요. 책얘를 하며 모르는 이들과 친구가 되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과정이 건강하게 느껴져요. 그것이 열린 결말의 장점이기도 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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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끌어안는 마음
건강하게, 꾸준하게 쓰기 위해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나요?
소설을 모시듯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 아닐까요. 모시듯 곡진히 쓰면 집필이 괴로워지는 것 같아요. 욕망하며 쓰지 말자고도 의식적으로 다짐해요. 한 때는 욕망에 추동해 쓰기도 했어요. 청탁을 못 받는 시간이 계속되니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재미있게 쓰자, 인물이랑 논다는 마음으로 쓰자, 생각하니 오히려 편해지더라고요.
그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정작 그 상황 안에 있으면 혼자 힘으로는 벗어나기가 힘들잖아요. 욕망에서 편안하게 놓여나는 순간이 있었던 건가요?
저는 영화를 좋아해요. 어떤 상황에서 제게 필요한 영화가 항상 존재했던 것 같아요. 쓸쓸했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노아 바움백의 <프란시스 하>가 저에게 큰 귀감이 되었어요. 그 영화를 보며 저 자신과 화해할 수 있었죠. 다른 사람의 작품을 보며 치유도 받고 깨달음도 얻어요.
작가님의 마음을 언제나 사로잡는 이야기, 번번이 걸려 넘어지는 장면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야기가 저를 사로잡아요. 그래서 가리지 않고 최대한 보고, 읽고, 듣는 편이에요. 문학뿐 아니라 건축서도 자주 읽어요. 안도 다다오나 정기용 건축가를 좋아해 그분들 작품집도 자주 읽고, 근래엔 인류학자 조문영 선생님의 『빈곤 과정』과 『연루됨』도 흥미롭게 읽고 있어요. 이야기도 그렇지만, 사람이 가진 힘이 좋아서 새로운 이야기를 찾게 되는 것 같아요.
요즘엔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어요. 원래 전혀 보지 않았는데 뒤늦게 그 매력을 안 거죠. <순풍 산부인과>와 <웬만해서 그들을 막을 수 없다>같은 옛날 시트콤을 좋아해요. 다양한 색채를 지닌 사람들의 애환과 사랑스러운 실수, 서로를 북돋기도 하면서 저버리기도 하는 관계성이 좋아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사람을 더 푹 끌어안을 수 있게 되었어요.
약 1년 전,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단어 세 가지를 “물음, 여유, 포용”이라고 답하셨어요. 지금의 답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지금의 답도 비슷해요. 상대를 더 깊이 알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항상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찬가지로 세계를 향한 날카로운 의문을 던지면서 고찰하는 과정도 필요하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여유가 있어야겠죠. 상대를 기다려주고 상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갈 여유요. 그것이 다 충족된다면 포용력도 생길 거고요. 지금 우리 사회에선 이 모든 걸 누리기 어렵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항상 있잖아요. 광장에 나가는 이들, 실패하더라도 계속해서 이해해 보려는 이들, 그리고 글을 쓰고 읽는 이들. 그런 이들이 많아 참 다행스러워요.
그런 의미에서 물음, 여유, 포용은 우리에게 필요한 동시에 행해지고 있는 세 가지 같아요. 굳이 따지면 셋 중 ‘물음’이 수반되어야 여유와 포용도 함께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질문하는 이들이 많지 않아요. 상대를 궁금해하는 이들도 드물죠. 제대로 질문하고 다정히 묻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신연선
읽고 씁니다.

표기식
사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