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태국일까? 동시대 감수성으로 읽는 태국 현대미술의 정체성
태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 작가 24인의 작품 110점을 통해 동시대 태국의 문화적 감수성과 정체성을 조명한 전시 <꿈과 사유>.
글 : 아티피오(ARTiPIO)
202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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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 한세예스24문화재단 국제문화교류전 태국현대미술 <꿈과 사유> 포스터


한세예스24문화재단이 일곱 번째 국제문화교류전의 대상국으로 선택한 나라는 태국이다. 4월 5일부터 20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태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 작가 24인의 작품 110점을 통해 동시대 태국의 문화적 감수성과 정체성을 조명한다.

 

회화, 조각, 설치, 미디어 아트 등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들은 태국 현대미술 특유의 강렬한 색채감과 상징적 언어를 드러낸다. 한세예스24문화재단은 2015년 ‘베트남의 아우라’전을 시작으로 인도네시아, 미얀마,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국가의 미술을 국내에 꾸준히 소개해왔다. 지난 9일 열린 전시 관계자 대상 도슨트 투어에서는, 전시감독을 맡은 박일호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해설을 통해 작품의 맥락과 미학적 배경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더해졌다.


전시감독을 맡은 박일호 이화여대 명예교수 


태국은 지리적으로 동남아시아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등 여러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러한 위치적 특성은 아시아 미술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점은, 태국이 서구 열강의 식민 지배를 받지 않고 독립을 유지해온 드문 사례라는 것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속에서도 고유한 문화를 지켜낸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태국 미술의 독창성과 자립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박일호 감독은 이번 전시의 핵심 질문으로 “과연 태국의 정체성은 현대미술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제시한다. 태국이 입헌군주제 국가이자 불교 문화권이라는 점 역시, 이번 전시를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맥락이다. 정치 제도와 종교적 세계관이 작품에 어떤 방식으로 투영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주요 관전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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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의 주제는 ‘세대교체’다. ‘꿈과 사유’라는 부제 아래, 전시는 신진 작가 14인과 중견 작가 10인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꿈’을 담당하는 신진 작가들의 작업은 전시 초입에, ‘사유’의 영역을 대표하는 중견 작가들의 작업은 전시 후반부에 배치되었지만, 감상 동선에서 이 둘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좌측부터 <Listen to your Mentors>, <The Crescent Ape>, <Take it easy> (하단 설명 참고)


예컨대, 신진 작가 완 찌라짜이사꾼(Wal Chirachaisakul)의 회화 〈Listen to your Mentors〉는 포크로 면을 들어 올린 여인이 그 위에 앉은 팅커벨을 응시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우리가 먹는 한 끼에 감사하자’는 메시지를 키치한 타이포그래피와 함께 전하는, 감각적인 구성의 작품이다. 이어지는 임하타이 쑤왓타나씬(Imhathai Suwattanasilp)의 설치작 〈The Crescent Ape〉는 머리카락이라는 생생한 재료를 통해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며, 씻웃 쁘랍리뿌(Sitvut Prabripoo)의 〈Take it easy〉는 연꽃을 모티프로 한 회화적 작업으로 불교적 상징을 은은하게 풀어낸다. 이처럼 작품 간 흐름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감상자는 지금 보고 있는 작품이 ‘꿈’인지 ‘사유’인지 스스로 묻게 된다. 다만, 대부분이 신진 작가의 작업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꿈’의 파트에 상대적으로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새로운 세대의 에너지와 실험정신이 전시 전체의 중심을 이룬다.


좌측부터 <Listen to your Mentors>, <The Crescent Ape>, <Take it easy> (하단 설명 참고)


일상에서 접하기 어려운 태국 젊은 예술가들의 감성과 세계관은 이번 전시를 통해 더욱 생생히 다가온다. 특히 신화, 불교, 젠더 등 사회문화적 요소들이 교차하는 ‘꿈’ 파트에서는 실험성과 상상력이 두드러진다. 낙롭 문마낫(Nakrob Moonmanas)의 〈A Unicorn in the Room〉은 태국의 신화적 상상력을 콜라주 형식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며, 불상의 상반신과 서양 조각상의 하반신을 결합한 〈Venus of Srivijaya〉는 불교를 새롭게 해석한 세련된 시선이 인상적이다. 패션을 전공했다가 순수미술로 전향한 줄리 베이커 앤 서머(Juli Baker & Summer)는 〈The Sunflower〉를 통해 경쾌한 색감과 흐르는 물감의 흐름으로 감상자의 시선을 이끈다. 이 작품은 가정폭력 속에서도 다섯 아이를 키워낸 작가의 할머니를 기리는 작업으로, 태국 전통 가정의 구조와 여성의 삶을 섬세하게 조명한다.


<Within-without>, <Velvet Space Time> (하단 설명 참고)


한편 ‘사유’의 파트는 죽음, 존재, 우주, 인간의 내면과 같은 철학적 질문으로 확장된다. 비 타끙 팟타노팟(Takerng Pattanopas)은 대표 연작 〈Within-without〉을 통해 인간의 신체와 우주의 유사성을 탐색한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영감을 받은 이 시리즈는, 모놀리스(monolith)를 몸속 침투물처럼 형상화하며 생명과 우주,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묻는다. 우돔삭 끄릿싸나밋(Udomsak Krisanamis)의 〈Velvet Space Time〉 역시 여덟 개의 원을 정제된 배열로 직조해 우주론적 시선을 불러일으키며, 추상 회화를 통해 시간성과 인간 의식을 함께 성찰한다. ‘꿈’이 감각적 상상력을 자극했다면, ‘사유’는 깊은 내면을 향해 천천히 침잠하게 만든다.


러끄릿 띠라와닛(Rirkrit Tiravanija), <Freedom cannot be simulated>


전시를 마치고 남는 인상은 ‘불안 속의 평정’이다. 체면을 뜻하는 '나아(หน้า)' 문화처럼, 급변하는 정치·사회 환경 속에서도 태국 작가들은 작품을 통해 내적인 조화와 평온을 표현한다. 그 대표적 사례는 러끄릿 띠라와닛(Rirkrit Tiravanija)이다. 그는 1990년대 ‘관계미학(Relational Aesthetics)’의 선구자로 알려졌으며, 이번 전시에 출품된 〈Freedom cannot be simulated〉 연작은 신문지 위에 각각 연두색과 노란색 오일 페인트로 문장을 덧씌운 작품이다. 언론이라는 매체를 통해 정치적 메시지를 명료하게 전달하는 이 작업은, 그가 태국 사회와 시위 운동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온 작가임을 보여준다. 외부의 소란 위에 내면의 침묵과 사유를 얹는 이 균형감은, 이번 전시의 미학적 정점을 이루며 태국 현대미술이 가진 독자적 힘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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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현대미술’이라는 낯선 주제는 처음에는 생경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를 이질적인 타자가 아닌, 아시아라는 문화 공동체의 일부로 바라볼 때, 이 전시는 단순한 감상이 아닌 의미 있는 문화적 ‘참여’의 경험으로 다가온다. 여전히 서구 중심으로 편중된 세계 미술계 안에서, 한국과 태국의 작가들은 모두 비주류라는 공통된 조건 속에 놓여 있다. 그런 점에서 백수미 한세예스24문화재단 이사장의 말처럼, “일상에서 접하기 어려운 동남아시아 작가들의 개성 있는 작업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데 힘쓰는” 이번 전시는, 예술을 매개로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연결되는 진정한 아시아적 ‘공감’의 자리를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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