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세계 속으로>는 기본적으로 PD 혼자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현지에서 도와주는 이는 코디네이터뿐. 30시간의 비행 시간에, 지구 반대편에서 혼자서 카메라 7대 이고지며 2주 동안 촬영은 물론 그 와중에 드론도 날리고, 탱고 축제에서 춤도 배우고 현지인들이 건네는 술도 받아 마신다. 물론 술에 취해도 영수증은 잃어버리면 안 된다. 하지만 이러한 속사정은 토요일 아침 들려오는 경쾌한 <걸어서 세계 속으로> 시그널 음악에 모두 묻혀버린다. 매끄러운 50분짜리 프로그램을 위해 장면과 장면 사이의 이야기는 삭제된다. 이 잘라내야 했던 시간들을 모으는 것에서 책은 시작된다. 『걸어갑니다, 세계 속으로』엔 장면과 장면 사이 웃고 울었던 여행자의 표정을 담았다. 화면 밖의 시간을 걸으며 휘청댈 때 손 잡아준 이들의 이름을 적었다.
작가님을 처음 만나는 독자분들을 위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KBS 소속 13년 차 PD로 맡은 업무는 교양 다큐멘터리 제작인 직장인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채널을 돌리다 마주쳤을 법한 프로그램들을 연출했어요. <걸어서 세계 속으로>, <6시 내고향>,
KBS에서 10년 넘게 다양한 프로그램을 연출하셨는데, 특히 그중에서 <걸어서 세계 속으로>와 관련된 책을 쓰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물론, 『걸어갑니다, 세계 속으로』에는 출장뿐만 아니라 다양한 여행의 모습이 나오긴 하지만요.
<걸어서 세계 속으로> PD는 시청자의 아바타가 되어 조용히 음식을 맛보고 뒷모습만 보이며 전망대에 오르죠. 그래도 한 번쯤 얘기하고 싶었어요. '여기 사람 있어요. (아바타 말고)'라고. 해변의 모닥불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자마자 말간 해와 함께 '다음 날 아침'이 되는 장면들 사이에서 마음 졸이고 실망하고 위로받던 여행자의 마음을 책에 담으려고 했어요.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유재석 씨가 <걸어서 세계 속으로>가 좋은 건 내가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라고 하셨는데요. 출장을 가면 PD는 정말 평범한 한국인처럼 여행하거든요. 관광객들 틈에 섞여 줄을 서고 이리저리 치이면서 시간과 돈을 아끼며 다녀요. 그래서 누구나 그 평범한 여행 노동에 공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매끄러운 방송본 뒤에 숨겨진 재미있는 쿠키 영상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썼습니다.
또, 책에는 다른 프로그램으로 떠난 출장 이야기와 제 삶에 굵직한 선들을 그은 여행들도 담았어요. 사실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맡기 전에도 저는 휴가 많이 쓰는 걸로 소문이 난 여행 마니아였거든요. 입사 후 첫 연휴에 4박 6일로 바르셀로나를 다녀올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니 <걸어서 세계 속으로> PD로서 여행은 완전히 일이지만 저에게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오랫동안 사랑해 온 여행이 일이 되었을 때의 현실, 좋아하는 여행과 끝까지 가 본 심정을 부끄러울 만큼 솔직하게 담아봤습니다.
보통 출장으로 간 곳은 다시 가지 않고 싶을 거 같은데 혹시 출장으로 갔지만 다시 갔거나 갈 의향이 있는 곳은 어느 곳일까요?
숨겨진 보석 같은 곳이라며 찾아간 곳에서 날씨한테 배신당하고 사람들한테 거절당하고 그래도 분량은 챙겨야 되고 2주 동안 이방인이 되어 서성이다 보면 제발 이 나라를 뜨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브라질은 <걸어서 세계 속으로> 촬영이 끝나고 1년 만에 휴가로 다시 찾았어요. 촬영하는 동안 브라질 사람들이 정말 잘 놀아줬거든요. 출발 전 주한 브라질 대사관부터 산악 가이드, 동네 주민들, 거리의 삼바 클럽, 퇴근길 직장인들까지 어리바리 외국인이 겉돌게 그냥 두지 않았어요.
사실 교양 PD는 어딜 가나 불청객이거든요. 딱히 홍보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데 이것저것 보여 달라는 것은 많으니까요. 그런데 일로 간 출장에서 브라질 사람들은 마치 저와 놀려고 하루를 빼놓았다는 듯 친구로 대해줬어요. 정부 기관에 가도 "아침 커피는 마셨니?" 하며 여행자의 하루를 궁금해했죠. 브라질에서는 투어 종료 시간, 조식 시간 같은 게 칼같이 지켜진 적이 없었어요. 누군가 "너무 재밌는데 좀 더 놀다 갑시다"고 하면 화내는 사람이 없었죠. 촬영하다 등산로가 없는 산에 드론을 떨어뜨린 적이 있는데, 그때도 처음 만난 마을 사람들이 6시간 산을 타서 드론을 찾아줬어요. 사례를 하려 하자 한사코 사양하고는 "다음에 카메라 두고 놀러 와요" 하더라고요. 그러니 서른 시간이 넘게 걸려도 다시 가서 "또 놀아줘!" 하는 수밖에요.
현재 PD로 일하시고, 대학교에서도 언론정보학을 전공하셨는데, 어릴 때부터 PD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셨나요? 그중에서도 왜 하필 교양 PD를 꿈꾸셨는지 궁금합니다.
TV 보는 것을 좋아하고 학교 수업도 그만큼 좋아하는 학생이었어요. 수험생 시절 하루는 창밖을 보는데 햇살은 따뜻하고 하늘이 파란 아주 예쁜 날씨였어요. 이 좋은 대낮에 나가지도 못하고 매일 해가 진다는 게 슬펐어요. 그때 결심했죠. '낮에 나다닐 수 있는 일을 하자.' 이 넓은 지구에 태어났는데 대구에서만 너무 오래 살고 있다는 엉뚱한 생각도 하면서요. 멋진 꿈을 꾸진 못했지만, 제 눈앞에 있는 현실적인 기회를 잡기 위해 매 순간 애썼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언론정보학을 전공했고, 언론사 시험을 봐서 PD가 된 조금 뻔한 인생을 살게 됐죠.
교양, 다큐멘터리 분야를 택한 건 그냥 그 직업이 멋져서요. 프로그램으로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사회에 꼭 필요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것이 때때로 더 큰 칭찬이 되는 직업이니까요. 옳은 것, 의미 있는 것을 만들면서 월급을 받을 수 있다니 이보다 좋은 직업이 있을까요? 이미 유명한 사람, 돈이 되는 곳보다 TV에 좀처럼 나오지 않는 마을과 사람들을 찾아다닐 수 있는 것도 좋아요. 여의도에서 직장인으로 살았다면 만날 일 없었을 어촌계 어르신들,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목숨 걸고 활동하는 환경 운동가를 만날 수 있어 감사해요. 그런 만남이 제 삶을 훨씬 너그럽고 풍요롭게 만들어줬어요.
남편분이 우리에겐 좀 생소한 라트비아 출신이세요. 라트비아와 관련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면 라트비아라는 나라를 평생 모르고 살았을 거예요. 마침 라트비아가 건국 100주년이라 촬영 거리가 다양해 보여서 <걸어서 세계 속으로> 촬영하러 갔었는데요. '적당히'를 모른다는 점에서 우리와 닮은 구석이 많았어요. 4만 명이 한 무대에 올라 밤새 노래하는 노래 축제, 횃불을 드는 걸로 모자라 누가 더 큰 모닥불을 뛰어넘나 경쟁하다 해가 뜨면 다 같이 수영을 하는 하지 축제까지... '누가 이 사람들 좀 말려주세요'라는 말이 절로 나왔죠.
소비에트 연방 시절의 감옥을 체험할 수 있는 박물관도 있었는데요. 촬영 당일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우산 내려놓고 눈 깔아’ 하면서 빗속에서 오리걸음을 시키더라고요. 심상찮은 분위기에 통역가는 중도 포기하고 군사 훈련, 노역, 독방 수감에 취조까지 받다가 KBS 사장님 이름을 발설하고서야 1시간의 체험이 끝났어요. 대학에서 사우나를 전공한 장인과 함께한 세 시간짜리 선상 사우나도 잊을 수 없고요. 인구 190만에 국토의 절반이 숲인 나라라 아주 조용한 곳일 줄 알았는데 반전이었죠. 체력은 탈탈 털렸지만 분량은 많이 챙겨왔어요.
출장지를 살펴보면, 브라질, 아르헨티나, 콩고 민주 공화국, 인도 등 흔한 나라가 없습니다. 원래 이렇게 흔치 않은 곳을 좋아하는 스타일이신가요?
호기심은 많은데 태평한 성격이라 '여긴 안 돼'하는 곳은 없었어요. 아무거나 잘 먹고, 아무 데서나 잘 자고, 아무렴 어때 하고 잘 잊어버리거든요. 일부러 위험하다고 알려진 나라들을 고른 건 아니지만, 일부러 더 멀고 덜 알려진 나라를 고른 건 맞아요. 사실 여행 프로그램들을 보면 즐길 만한 곳으로 소개되는 나라들이 한정적이거든요. 되도록 국내에 덜 소개된 나라,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 방송된 나라라면 소개되지 않은 도시, 미디어에서 그 나라가 흔히 소비되는 이미지가 아닌 새로운 모습을 담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런 곳을 찾아가 거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했죠. 그게 이미 오랫동안 사랑받은 프로그램에 운 좋게 올라탄 제가 할 역할이라 생각했거든요. 책에도 썼지만, 지구인이라는 커다란 도서관에 책을 한 권씩 채운다는 생각으로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만들었어요. 토요일 아침 TV 보는 분들이 '아, 저기도 사람 사는 곳이네, 나중에 한 번 가볼까?' 하는 마음이 드셨다면 그보다 더 큰 보람은 없을 것 같아요.
다시 떠나기 좋은 날이 되었습니다. 독자들에게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첫 배낭여행을 떠나던 20대 초반에는 대단한 여행을 꿈꿨어요. 최소 한 달은 떠나야 하고, 수트 케이스 대신 배낭을 메야 하고, 관광객들이 가지 않는 숨겨진 보석 같은 곳을 찾아서 현지인들과 어울리며 '진짜 여행'을 하겠다는 열정이 넘쳤죠. 여행을 많이 다니면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고, 또 무참히 좌절하기도 했죠. <걸어서 세계 속으로> PD에다 여행 꽤 다녀봤다는 지금은 오히려 스스로를 '어리바리 관광객'이라 생각해요. 여권에 스탬프가 늘어날수록 '여행 꿀팁' 같은 것이 늘어나기는커녕 낯선 사람들의 호의를 하나씩 주우면서 제자리로 돌아오고 또 나가는 것이 기적이라는 걸 깨닫게 됐어요.
대단한 여행을 하겠다는 거창한 계획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주말에 어디든 떠나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아는 사람도 없고 궁금한 것도 없는 기차 노선 위의 어디든 가서 그 동네의 사랑스러운 구석을 하나 찾아내는 거죠. 그리고 고마운 마음을 하나 가지고 오면 어떨까요? 초여름의 달콤한 나무 냄새든, 인정을 베풀어 준 낯선 사람의 얼굴이든 뭐든요. 사소하지만 좋은 여행은 사진이 없어도 표정에 남으니까요.
*김가람 KBS 교양 다큐멘터리 PD.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만들다 지금은 <환경스페셜>을 연출한다. 낮에는 나다니고 밤에는 TV 보는 일상을 지속하고자 PD가 되었다. 휴가와 출장의 탈을 쓴 모든 여행을 사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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