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절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소설
지난 11월 29일, 임경선 소설가와 독자들이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소설집 『호텔 이야기』의 출간을 맞아 예스24가 준비한 '호텔' 북토크를 함께한 것이다. 초대받은 40명의 독자들이 향한 곳은 호텔 안테룸 서울의 19층, 예술 서점과 바를 겸비한 텔러스바였다. 차분한 분위기의 공간 뒤로 화려한 야경이 펼쳐져 있었고, 임경선 작가가 『호텔 이야기』를 집필하며 들었던 음악들이 흘러 나왔다. 독자들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넨 임경선 작가는 출간 소감을 전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호텔 이야기』가 출간된 지 2주 정도 지났는데요. 저는 한 두 달 된 것 같아요. 다른 작가 분들도 그러실 텐데, 작가한테는 책을 내기 전까지가 좋은 것 같아요. 내 품에 갖고 있다가 세상에 내보낼 때는 설레지만 동시에 무척 슬퍼요. 조금 쓸쓸한 마음이 드는데, 그때 독자 분들이 저한테 와주시는 거예요. 모든 책 혹은 이야기의 본질은, 제가 여러분한테 귓속말로 이야기를 해드리는 거예요. 저는 혼자 품고 있던 아이(이야기)를 세상에 내보내고, 그 아이는 멀리 떠나가지만 그 대신 여러분이 저한테 다시 와주시고, 그걸로 제가 메워지고 책의 세계가 완성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읽어주심으로 인해서. 거기까지가 한 사이클인 것 같아요. 지금 저는 그 사이클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소설집 『호텔 이야기』는 '그라프 호텔'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다섯 편의 짧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라프 호텔은 남산 둘레길에 위치한 유서 깊은 호텔로, 2022년 12월 31일부로 영업이 종료될 예정이다. 소설은 '그라프 호텔이 문을 닫기 전, 마지막 반년 동안 그곳에서 벌어진 이야기들'을 그린다. 각 이야기의 주인공인 영화감독, 비밀스러운 커플, 고학력 호텔 메이드, 도어맨, 개그맨 등은 묘하게 그라프 호텔과 닮아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에 찾아온 한 시절의 끝을 겪어내는 중이다. 임경선 작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한 시절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소설'이라 했다.
이 날의 북토크에서는 『호텔 이야기』의 집필 배경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쓰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말하며, 10년 넘게 오가면서 글을 썼던 단골 카페가 문을 닫은 일도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하나의 장소를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곳을 잃는 것만이 아니라, 거기에서 만난 관계들도 잃어버리는 일이기 때문에 서글펐다는 것. 또한, 코로나로 인해서 많은 것들이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뭔가 한 시절이 끝나는 것 같은 서글픔'을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 그라프 호텔의 모델은 아니지만, 연말에 문을 닫는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남산의 밀레니엄 힐튼 호텔의 매각 소식이 놀라웠어요. 많은 호텔들이 문을 닫고 매각됐지만, 서울역 앞의 그 큰 건물을 부순다는 게 놀라웠어요. 클래식하게 잘 간직해 온 건축물을 수익적인 차원에서 부술 수가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있었어요. 그래서 마음이 조금 안 좋았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언젠가는 호텔을 주제로 뭔가를 쓰겠지'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다정한 구원』을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호텔에 조금 진심이에요. 낯선 데서 꿈을 꾸고 잔다는 것에 계속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언젠가 써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그게 에세이가 아닌 단편 소설의 형태로 자연스럽게 나온 거예요."
이어서 작가는 "소설을 쓸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싶은 걸 쓴다"고 말했다. 어떤 목적이나 전하려는 메시지를 생각해서 쓰는 게 아니라고. 물론, 그럼에도 이번 작품을 쓰는 데 시발점이 된 순간은 있었다.
"제가 새벽 1시 정도에 코리아나 호텔을 지나가다가 혼자 있던 프론트 직원을 보게 됐는데,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서있더라고요. 그 시간에 거기에는 저밖에 없었고,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서 있는 거예요. '저 사람은 혼자 뭐 하고 있을까, 어떤 생각을 하면서 서있을까' 생각했어요. 그런 장면을 떠올리면서 이야기가 전개된 것 같습니다. 제가 『호텔 이야기』를 '한 시절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소설'이라고 했는데요. 작년부터 올해 내내 갖고 있던 생각들은 책 뒤에 쓴 카피 그대로예요. '무엇을 부여잡고, 무엇을 놔줘야 할까', '언제까지 저항하고 언제부터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는 지금 대체 어떤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만큼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보낸 것 같습니다. 환경적으로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많은 휘청임이 있었던 시기인 것 같아요."
임경선 작가는 '상실'과 '받아들임'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두 가지가 자신이 쓰는 글의 근원적인 감정이라고.
"저는 상실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무척 관심을 가지고 계속 썼던 것 같아요. 상실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어요. 저항할 수도 있고, 부인하지만 결국에는 수용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방식이 있는데, 저는 그렇게 분투하는 모습 하나하나가 되게 인간적이라고 생각해요. 그 모습을 그려내는 게 가장 보람 있었고, 내가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 참 좋았어요. 제가 봤을 때 그 주제를 자꾸 쓰는 이유는, 어렸을 때 이사를 많이 해서 기본적으로 이별을 많이 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상실의 경험들을, 어렸을 때는 꾹 참고 삼키고 넘겼는데, (사실은) 생채기처럼 남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항상 무언가를 잃어가고 그렇게 흘러가는 게 인생이기에, 우리 손 안에 있을 때의 감촉이라든지 소중함, 귀함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젠가 그것들을 다 잃을 것이기 때문에. 그 마음이 항상 있습니다."
사랑에 서툰 건 다 용서가 돼요
이번 작품을 쓰면서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이 유독 즐거웠다는 임경선 작가는 『호텔 이야기』의 인물들이 '상실을 마주하는 사람들', '변화를 마주하는 사람들'이라 말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의 배경인 그라프 호텔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작가는 그라프 호텔을 일컬어 "참 요령 없는 호텔"이라 말하며 "머리로는 손해 볼 걸 알면서도 마음이 그걸 허락하지 않는 사람들"을 연상시키는 캐릭터라 말했다. 자신은 그런 사람들의 비합리성이나 비이성적인 모습에서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 이들을 볼 때면 가급적 오래, 그가 자신의 색깔을 지켜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게 된다고.
"다섯 개 단편의 주인공들도 어딘가 그라프 호텔과 닮은 부분이 있습니다. 타협하려다가 도저히 못하겠다면서 한 번 더 기회를 줘보자고 생각하는 영화감독이 있고, 죽어도 택시는 안 타겠다는 남자가 있고, 「하우스키핑」의 인물도 휘청거리지만 결국은 자기 힘으로 다시 딛고 일어설 것이고요. 그리고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단편인 「야간 근무」의 상아와 동주 커플도 감정이 탁해지기 전에 야멸차게 놔버릴 수 있는 어떤 마음을 갖고 있어요. 그래도 그 불씨가 사라지지 않아서 극진한 마음으로 그 감정을 표현해내고 마는 절박함 같은 것도 있고요. 그라프 호텔은 이 사람들의 모습을 계속 지켜봐 주는 느낌이에요. 본인도 망할 거면서 이 망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되게 안쓰러워하는 것 같고. 뭘 하지는 않지만 그저 지켜봐 준다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것 같아요."
뒤이어 작가는 『호텔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마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 모두에게는 반짝이는 어떤 순간들이 있고, 또 필연적으로 그 반짝임을 잃는 때가 와요. 하지만 그때가 온다고 해도, 그것에 저항하려고 혹은 어떻게든 좋게 받아들이려고 하는 여러 가지 모습들이 그 자체로 무척 인간적이고 아름답고 소중한 것 같아요. 이 소설에서 그걸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 때문에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걸 통해서 저는 독자 분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변화는 당연히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이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우리는 조금 못 나기도 하고 조금 비루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용기 있기도 하고 엉뚱하기도 한 여러 모습을 보이는데, 그 하나하나가 다 사랑스럽고 좋은 마음으로 지켜보고 싶다고요. 그 마음을 가지고 『호텔 이야기』를 썼던 것 같아요."
(*임경선 작가의 이야기가 끝난 후 독자들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하우스키핑」의 '정현'이라는 인물은 어떻게 생각하게 되셨나요?
우리가 호텔을 이용하면서 간혹 청소해 주시는 메이드 분들을 만나면 조금 장년층 여성분들이 많으세요. 그런데 그 전형성과 좀 달리, 더 젊고 고학력이면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 일을 하고 있을까 생각했어요. 대학원을 나온 여자가 하우스키핑 일은 잘하지 않잖아요. 그런 의외성부터 시작해서 거꾸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이 사람한테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왜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생각한 것 같아요. 그리고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제 첫 직장이 조선호텔 홍보실이었어요. 제가 조금 갑갑해 해서 1년은 못 채웠는데, 그때도 호텔에서 일하는 여러 직군들을 보면서 흥미가 있었어요. 그리고 이번 책을 쓰기 전에 호텔리어들이 쓴 책, 호텔 관련된 책들 찾아서 보면서 힌트를 얻고 흥미로운 것들을 발견했어요. 저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잘 해내려고 할 때에 얼마나 디테일해질 수 있는지, 그런 집요함을 너무 사랑해요.
모든 캐릭터들을 다 애정하시지만 동주와 상아를 조금 더 예뻐하시는 것 같아요. 이유가 있으신가요?
저는 서툰 사랑을 하는 인물들을 되게 예뻐해요. 이 소설 전체를 통틀어서 제가 쓰면서 가장 좋았던 건 상아가 불을 지르는 부분이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이해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너무 맥락 없는 행동인데 두 사람 사이에서는 그게 '너, 나 아직 좋아하는구나'라고 그냥 이해가 될 것 같은 거죠. 남들이 보면 그냥 미친 거지만 (동주는) 저 사람이 저렇게 한 이유를 그냥 아는 거죠. 그만큼 둘 사이에는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어떤 이야기가 있는 거죠. 또, 혼자 담기에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 작가한테 털어놓는 것도 귀엽고요. 그렇게 서툰 게 저는 너무 좋고, 특히 사람이 사랑에 서툰 건 다 용서가 돼요. 용서해주고 싶고 '괜찮다, 누가 뭐라고 해도 네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랑이다'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글이 쓰기 싫거나 잘 안 써지는 시기에는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글이 쓰기 싫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슬럼프라든지 쓰기 싫어졌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쓰다가 막히거나 안 풀리는 경우는 있죠. 에세이는 막히지 않는데 소설은 막힐 수 있잖아요. 스토리니까. 그럴 때는 또 나름의 방법이 있으니까... 그런데 글 자체가 쓰기 싫다거나 지긋지긋하다고 느낀 적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어요. 제가 회사원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냥 나한테 주어진 일이고, 밥 해먹고 운동하고 그런 것과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요. 어떻게 보면 제가 글쓰기 자체를 너무 과대하게 예술로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지난번 것보다 조금 더 잘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요. 나아진 게 보이면 저는 만족해요. 예를 들어서 이번 단편들 같은 경우는, 작년 여름과 가을에 드라마 각본 작업을 했기 때문에, 그걸로 인해서 대사 쓰는 게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스스로 판단이 됐어요. 그렇게 '그래도 내가 조금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되면 저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저한테는 그걸로 충분해요.
다음 책은 언제 출간될까요?
아마 봄에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나올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이석원 작가님의 『나를 위한 노래』라는 책이 나왔는데, 그 후속 같은 책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석원 작가가) 저랑 앞뒤로 강연을 해서, 그때 강연했던 걸 조금 정리하고 보완해서 나올 것 같습니다. 저는 미리 앞서서 계약하거나 계획하는 게 하나도 없어요. 항상 하나가 다 끝나고 나면 그 다음 걸 시작해요. 문을 닫아야 새 문이 열려요. 그 전에 여러 개의 문을 열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게 불가능한 사람이에요, 저는. 그리고 뭔가에 묶여 있는 게 싫기 때문에 계약도 미리 안 하고요. 다른 건 스스로 통제를 많이 하는데 외부 사람들하고의 관계는 완전히 자유롭게 하는 편입니다.
*임경선 12년간의 직장생활 후, 2005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 『가만히 부르는 이름』, 『곁에 남아 있는 사람』, 『나의 남자』, 『기억해줘』, 『어떤 날 그녀들이』, 산문 『평범한 결혼생활』,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공저)』, 『다정한 구원』, 『태도에 관하여』, 『교토에 다녀왔습니다』, 『자유로울 것』,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나라는 여자』, 『엄마와 연애할 때』 등을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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