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정(避靜),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는 뜻입니다. 번역가 노시내는 지난봄 취리히로 40일간의 피정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소란합니다. 26년 동안 6개 도시에 머물며 만난 사람들, 음식들, 언어들이 피정의 내밀한 시공간을 흔듭니다. 〈노시내의 작가 피정〉은 그 기억과 인연의 일기이자 그것들을 자신의 일부로 삼아 번역해낸 글입니다. |
수술 후 처음으로 병원을 방문해 경과를 확인했다. 병원 입구를 들어서는데 경비 요원이 이전처럼 백신 패스를 확인하지 않았다. 병원에 들어갈 때마다 경비 요원과 함께 입구에 나란히 버티고 서서, 손 소독제를 반강제로 뿌려주며 오늘 새 마스크를 쓰고 왔냐고 물어보던 의대생들도 사라졌다. 새 마스크가 아닐 경우에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쓰고 있던 마스크를 휴지통에 버리고 입구에 준비된 새 마스크를 써야 했다. 그랬던 지침이 4월 1일 이후로 다 중단된 모양이다. 다행히 실내에 들어가니 환자들도 의료진도 모두 마스크를 단단히 쓰고 있다.
"미세스 노!"
콧수염을 기른 젊은 의사가 진찰실 문을 열고 나와 경쾌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이제까지 만났던 의사는 아니었다. 부르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의사에게 "구텐 모르겐"하고 인사했더니, 이번에도 "미세스 노"와 일관되게 "헬로, 하와유?"하고 영어 인사가 되돌아왔다. 이 병원에 여러 번 와봤지만 이런 일은 또 처음이었다. 미리 내 파일을 살펴보고, 영어 사용자라는 것을 확인했던 모양이다. 복수 언어의 나라 스위스에서는 병원뿐 아니라 관공서나 은행, 그리고 회원제 형식으로 고객 파일을 관리하는 일반 상점에서도 개인 신상이 적힌 서류에 고객이 사용하는 언어를 표시해둔다. 표시는 해놓되 그걸 꼭 확인해서 해당 언어에 맞춰 응대하는 일은 드문데, 이 처음 보는 의사 선생은 세심하게도 환자의 사용 언어까지 확인하셨다. 어쩌면 내 이국적인 이름도 한몫했을지 모른다.
상처는 잘 낫고 있다고 했다. 나는 의사에게 호흡 장애와 미각의 변화, 그리고 턱관절에서 나는 소리에 관해 물었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모든 증상은 호전될 것이고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므로, 여섯 달 후에도 같은 증상이 지속되면 정밀하게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이제 내 수술 사례는 일단 종료해도 될 것 같다며 동의를 구했다. 다시 경과를 보러 병원에 올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내 치료는 '종료'되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다. 배가 고팠다. 나는 시내에 있는 유기농 식료품점 냉장고에서 '맘마미아'라는 이름이 붙은 토마토 수프 하나를 집어 들었다. 집에 가져가기보다는 어디 밖에 앉아 먹고 싶었다. 식료품점 뒤편에는 '샨첸그라벤(Schanzengraben)'이라고 부르는 얕은 하천이 하나 있다. 물가에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장의자를 여러 개 설치해 놓아서 점심시간이면 도시락을 까먹는 직장인들로 늘 붐빈다. 녹음이 우거진 평화로운 도심 속 휴식처인 까닭에, 라이프 스타일 잡지 <모노클>은 취리히를 매번 살기 좋은 도시 3위 안에 넣어주면서 — 취리히는 <모노클> 대표 타일러 브륄레가 아주 좋아하는 도시다 — 시민들이 이곳에서 발 담그고 노닥거리는 사진을 단골로 곁들이곤 한다. 사실 이곳은 자연 하천이 아니다. 19세기에 취리히 구시가지 주위에 구덩이를 파서, 리마트강과 질강과 취리히 호수를 연결해 물이 흐르도록 일종의 해자로 구축한 인공 하천이다. '샨첸'은 참호나 보루를 뜻하고 '그라벤'은 구덩이 또는 해자를 뜻하니 명칭에서도 기원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 역사적 참조점 없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중세 때부터 취리히 성벽 외곽에 있었던 지그재그형 방어벽을 따라 조성한 하천이어서, 지도를 검색해 지그재그로 물 흐르는 모습을 드론 시점으로 관찰하면 중세 시대에 방어벽이 어떤 형태였는지 상상이 된다.
기온이 영상 5도밖에 안 되어서인지 아직 점심시간인데도 물가가 한산했다. 마음에 드는 장의자를 하나 골라잡았다. 발치에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오리가 이리저리 줄지어 헤엄쳤다. 숙소에서 챙겨 가지고 나온 스테인리스 스푼을 가방에서 꺼냈다. 수프가 뿜어내는 토마토 맛이 진하고 시큼해서 상처가 아렸지만, 둔해진 미각을 관통해 입맛을 돋우는 강렬하고 자극적인 맛이었다. 일순간 칼바람이 불었다. 차가운 수프 용기를 들고 있던 손이 좀 시렸지만, 패딩과 털모자로 코어를 보호했으니 무서울 게 없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너 완전 러시아 사람 다 됐어."
러시아에서 생활하던 첫해, 러시아인들이 섭씨 14~15도만 되어도 야외 좌석에 앉아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질겁했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시간이 흐를수록 추위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생활 4년 차가 되자,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지 않으면 내복 하의를 입지 않게 되었고, 영상 10도만 넘어도 야외 좌석에서 커피 마시는 일을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스위스 사람들이 겨우 섭씨 0도에 몸을 떨며 캐나다구스 같은 혹한기용 파카를 입고 다니는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영하 10도는 돼야 비로소 얼굴을 좀 찡그리며 옷깃을 여민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 사람들이 겨울에 옷을 허술하게 입는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값비싼 혹한기용 파카는 아니더라도 러시아인들도 패딩을 단단히 껴입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반드시 털모자를 눌러쓴다. 털모자의 진정한 파워를, 모자 하나만 써도 영하 날씨에 실외를 돌아다니는 일이 훨씬 편안해진다는 그 간단한 진리를, 나는 러시아에 가서야 배웠다.
오후에는 벼르던 영화를 보러 갔다. 사람들이 마스크 착용을 안 해서 조금 불안했지만, 주중 낮 시간이면 관객이 별로 없을 것 같아 감행하기로 했다.
글에 관한 아이디어는 곁눈으로 보이는 새들처럼 내게 찾아든다.
(Ideas come to me like birds that I see in the corner of my eye)
소설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한 말이다. 그의 일생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러빙 하이스미스〉(Loving Highsmith)는 이 말과 함께 시작되었다. 눈 한구석에 새처럼 날아든 글감을 잡아내 종이에 옮기는 작업이란 어떤 것일까. 하이스미스에게 창작의 영감은 그렇게 찾아왔다.
사람 앞에 '러빙'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다중적인 의미가 생성되면서 몇 가지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열린다.
(누군가가) 하이스미스를 사랑하기
(누군가를) 사랑하는 하이스미스
아니면 '러빙'을 동사 현재 진행형 대신 형용사로 보아 '사랑스러운 하이스미스'로 풀이하는 것도 가능하다.
영화를 보는 동안, 그 세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하이스미스와 연애했던 여성들의 인터뷰를 담았고, 그들의 이야기에서 하이스미스라는 인물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특이하고 괴팍한 구석도 없지 않았지만, 항상 정력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았으며, 열정의 대상을 깊이 아끼고, 또 때때로 남에게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그야말로 사랑에 열심인 사람이었다.
하이스미스는 말년을 스위스 티치노주에서 보냈다. 묘지도 거기에 있다. 그가 1960년대 말부터 15년 동안 생활하며 정을 붙였던 프랑스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1981년에 스위스로 거주지를 옮긴 이유는 간단하다. 세금 때문이었다. 탈세 혐의로 프랑스 경찰이 하이스미스가 살던 집을 덮치자 하이스미스는 그 집을 팔고 스위스로 이주해버렸다. 스위스는 세금 따위로 유명인을 귀찮게 하는 나라가 아니니까. 예전에 『스위스 방명록』을 집필하면서, 스위스에서 살거나 생을 마감한 유명인을 조사해 목록을 작성할 때 애초에 거기에 하이스미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궁극적으로 그를 책에 넣지 않은 이유는 하이스미스와 스위스와의 관계가 그리 긴밀하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고, 그 직감은 이 영화를 보면서 재확인되었다. 하이스미스가 애착을 보였던 장소는 프랑스와 영국이었다. 하이스미스가 깊이 사랑한 여성들이 거기에 살았기 때문이다.
하이스미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1952년작 『캐롤』은 애초에 '클레어 모건'이라는 가명으로 펴냈다. 아직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레즈비언 소설을, 그것도 자전적 요소가 담긴 소설을 출판하면서 본명을 밝히기가 꺼려졌을 것이다. 출간 자체도 쉽지 않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레즈비언 소설이라는 점 때문이 아니라 결말이 해피엔드였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이 부도덕한 사랑에 대한 잘못을 뉘우치고 본래의 생활로 되돌아가거나, 아니면 인생이 불행해져야 하는데 감히 해피엔드라니.
고교 시절이 떠올랐다. 같은 반에 짧게 친 머리에 남학생 같은 차림을 하고 밴드에서 드럼을 치던 친구가 있었다. 담임 선생에게 문제아로 찍혀 출석부로 머리를 맞는 것을 보고 분노가 치밀었던 기억도 있다. 당시 기준으로 소위 '불량'해 보이면서도 얼굴이 하얗고 갸름하고 예쁘장한, 그러나 쓸쓸한 그림자가 서려 있던 — 윤상 1집 사진 같은 이미지였다 — 그 친구를, 내 시선은 자주 따라다녔다. 혼자 좋아했던 것이다. 그 친구는 알았을까? 알았던 것도 같다. 얌전한 모범생이 자꾸 자기 주변을 맴돌았으니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는 내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주곤 했고, 나는 굳이 그 미소의 의미를 더 캘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미소에서 슬픔이 묻어난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이후 여성에게 연애 감정 비슷한 것을 가졌던 것은 만 스무 살 때였다. 우리는 외국에서 외로움이 극에 달했을 때 만나 1년 동안 거의 한순간도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고, 각자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서도 다시 전화통을 붙잡고 밤새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긴밀한 우정을 나눴다. 육체관계가 없었을 뿐, 소통에서 주고받는 교감과 희열, 서로에게 이해받고 위로받는 정신적 상호 의존의 강도 면에서 연애와 매한가지였다. 아니, 서로 기쁠 때 안아주고 슬플 때 보듬어주고 격려할 때 쓰다듬어 주었으니, 그 또한 일종의 육체관계였다. 그 친구의 포옹에서 나는 늘 깊은 위안을 얻었다. 그것은 어떤 섹스와도 대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바꿀 수 없이 소중한 신체적 접촉.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사춘기 직후에 있었던 몇 가지 신호에도 불구하고 동성에 대한 관심이 어느 한도 이상으로 완전히 발현되지 않은 것은 내 안에 있는 동성애 성향을 나 자신과 사회가 억눌러 통제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타고난 '레즈 성향'의 비중이 그냥 그 정도에 머물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앞서 두 경험 이후로 내 연애 경험이 대체로 이성에게 쏠린 것으로 미루어 아마 후자였을 것이다. 인간이 각자 갖고 태어나는 성적 성향의 섬세한 눈금에서 내가 바이와 이성애자의 중간 정도에 위치했을 것 같다는 뜻이다. 어쩌면 특정 시기에 우연히 내 앞에 나타난 사람들 자체도 요인이었을지 모른다. 젠더보다도, 어느 인간 개인이 주는 매력이 애정의 대상을 선택하는 일에 결정적인 요소가 됐을 거라는 의미다. 우연히 좋은 '남자 사람'을 만났는데 그게 어쩌다 보니 개인적으로나 관례적으로나 결혼하기 적절한 시기여서 혼인하긴 했지만, 지금도 멋진 여성을 보면 종종 저 사람과 사랑하며 함께 생활하는 삶은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할 때가 있어서 하는 말이다.
숙소에 돌아와 식탁에 앉았는데 갑자기 오른쪽 엄지발가락과 발목을 잇는 힘줄이 뒤틀리면서 쥐가 났다. 오른쪽 종아리에도 통증이 일었다. 아침에 스트레칭하고, 추운 바깥에서 점심 먹고, 운동을 하는 김에 조금 더하자고 걸어서 30분 걸리는 영화관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가 걸어 돌아온 것이 도에 지나쳤던 모양이다. 겨우 이 정도 몸을 움직였다고 생전 안 나던 쥐가 나다니. 운동을 중단한 지 불과 열흘 만에 근육이 이렇게 약해진 것에 새삼 놀랐다. 천천히 가자. 회복에는 시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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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시내(번역가)
연세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스위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지를 떠돌며 27년째 타국 생활 중이다. 《마이너 필링스》 《책임 정당》 《대표》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파리 좌안 1940-50》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등의 책을 옮겼고 《작가 피정》 《스위스 방명록》 《빈을 소개합니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