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부동산 부의 역사』는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역사 속에 나타난 다양한 사건을 중심으로 부동산의 가치를 결정짓는 요인과 이것이 현대에는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낱낱이 분석하여 기술하고 있다. '서울은 왜 백제, 조선, 한국의 수도로 낙점되었을까?', '한양의 상권은 왜 종로에서 발달했을까?', '고대에는 신도시 개발을 어떻게 했을까?'를 비롯해 '공공 기관 지방 이전은 실제로 지방 도시의 집값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유수지·매립지·산지의 가치는 어떻게 변화했나?', '기피 지역이었던 공장 지대와 역 주변은 어떻게 직주 근접 상급지가 되었나?'에 대한 대답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이번 책의 출간을 결심한 계기나 동기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상우 : 2018년에 출간한 『대한민국 아파트 부의 지도』의 개정판 요청을 자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 기재된 내용이 클래식에 가까운 내용이어서 특별히 개정할 부분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역사'라는 관점이 추가되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평소 관심 있게 읽었던 중앙일보 기사를 떠올렸고 그 기사의 작성자를 만나 제 아이디어를 논의드렸습니다. 그분이 바로 유성운 기자님이었습니다. 『대한민국 부동산 부의 역사』는 유성운 저자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유성운 : 부동산 문제가 뜨거웠던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고 어쩌면 대한민국 역사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봐도 과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유성운의 역사정치'라는 칼럼을 중앙일보에 정기적으로 연재할 때도 퇴계 이황의 재산 형성이라든지 부동산 관련 기사가 유독 조회 수가 높고 반응도 뜨거웠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이 부분만 따로 다뤄보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던 차에 이상우 작가님과 연결이 되어 이번 책의 집필까지 이어졌습니다.
'부동산은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 삶의 연속'이라는 문장이 인상적입니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도 변하지 않았던 '부동산 불변의 원칙'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이상우 :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용하는 것 중에서 가장 비싸고 구하기 힘든 것이 바로 부동산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도 원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좋은 부동산은 예나 지금이나 구하기가 쉽지 않고 비쌉니다. 더불어 "시대를 관통한다"는 말속에는 '부동산의 주요 특징은 역사적으로 변함없이 흘러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5가지 특징이 바로 시대를 관통하는 부동산 불변의 원칙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교육 환경, 직주 근접, 교통 호재, 자연환경, 도시 계획입니다. 이 다섯 가지 특징을 한 단어 축약하면 '입지'가 됩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특징이 입지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은 유성운 저자가 책에 잘 풀어놓았습니다.
유성운 : 신라 초 석탈해가 꾀를 내어 경주에 있는 호공의 집을 빼앗았다는 설화는 좋은 입지에 있는 집을 마련하고 싶어 하는 생각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위례성과 미추홀을 놓고 갈등했던 온조와 비류 설화는 그 당시에도 입지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게 해줍니다. 이 책을 정리하면서 많은 왕조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교육 환경이 좋은 곳, 교통이 편리한 곳, 통근이 가까운 곳을 선호하는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으며 이런 곳에서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오랜 역사에서 터득한 학습 효과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서울을 비롯해 수도권, 지방 광역시 등을 보면 그 도시의 집값이 가장 높은 곳들의 공통점은 '학군지'인데요, 학군지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상우 : 교육이라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부모의 '과욕'이라고 잘못 해석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오히려 이렇게 반문하고 싶어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교육에 힘을 쏟지 않은 시기가 과연 있었던가?' 후손들에게 좋은 교육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은 욕구는 종족 번식의 욕구에 버금간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살다 보면,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네트워크가 교육 환경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학군지로 더 몰리게 되는 것 같고요.
1970년대 강남 개발 과정과 비슷한 사례가 백 년 전 조선 건국 초기에도 일어났다고 책에서 말씀해주고 계시는데요, 어떤 사건인가요?
유성운 : 1970년대 강남을 개발했을 때, 서울의 중심지는 여전히 강북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명문고는 광화문 일대에 모여 있었고, 상업 중심지는 명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지간해서는 강남으로 가려하지 않았고, 결국 정부는 공무원들을 먼저 반강제로 이주시키다시피 했는데, 그들조차 집을 매각하고 다시 강북으로 돌아오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온 방안이 경기고, 휘문고 등 소위 명문 학교들을 강남으로 이동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교육에 올인하는 한국 사회의 특성상 학군을 이동하면 사람들이 따라올 것으로 판단한 것이죠. 그래서 압구정동, 청담동처럼 강북에 가까운 곳도 아니고 훨씬 남쪽인 삼성동, 대치동 일대로 옮겨버렸고 계획은 100% 성공했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사정이 비슷했는데, 막상 신수도 한양을 건설했지만 모든 인프라가 400년 넘게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개성 주민들이 내려오지 않자 조선은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는데 그중 하나가 '학군'입니다. 고려는 구재 학당 등 여러 인기 사립 학교들이 있었는데, 조선 건국 세력들은 이 사학들을 모두 폐교하는 한편, 한양에는 4개의 국립 학교를 세웁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성균관의 우수한 인재를 보내 교육을 맡도록 했습니다. 또 여기서 발군의 재능을 보이면 무시험으로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게 했지요. 개성이 아무리 좋아도 교육의 끈이 떨어졌는데 사대부들이 계속 버틸 수는 없었겠죠. 조선은 여기에 하나 더 극약 처방을 했는데 개성의 시장을 닫아버린 것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대형 마트를 모두 영업 정지시킨 것이죠. 그러니 한양에 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명문세가들이 개성에서 한양으로 내려왔고 이것이 지금의 서울을 만든 토대가 된 것이죠.
강남을 떠났던 회사들이 다시 유턴하는 등 지난 4년간 고소득 직장의 입지가 눈에 띄게 변화했습니다. 도심 집중 현상이 다시 가속화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상우 : 강남에 회사들이 본격적으로 몰려들게 된 것은 2000년대 초반 닷컴버블 때부터 였습니다. 최근의 스타트업 열풍과 비교했을 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만큼의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닷컴 기업들의 연봉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상장 기업들의 시가 총액은 상당한 수준까지 올랐었고, 테헤란로에 있는 멋진 사무실을 사용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진 기업들이 테헤란로를 점령했었죠. 버블이 꺼지고 닷컴 기업들은 분당으로, 판교로, 그리고 가산으로, 또 다른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들에서 새로운 성장을 이끈 업체들도 많아졌습니다. 이런 업체들의 연봉은 대기업 못지않게 빠르게 상승했습니다.
그동안 텅 비어버린 줄만 알았던 강남과 잊고 지냈던 광화문, 그리고 여의도 일대에는 빌딩 재건축이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강북은 노후지역의 재개발로, 강남과 여의도는 기존 빌딩을 재건축하는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대형 신축 빌딩은 근무 환경을 대폭 개선했고, 이런 곳들에 대기업들이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대기업의 이동은 대규모의 근로자들을 불러 모으게 되었고, 소비력이 있는 사람들의 증가는 오피스뿐 아니라, 인근 지역의 상업시설의 입주를 불러왔습니다. 낮에 사람들을 머무르게 하는 유인이 생긴 것이죠.
이런 변화가 다시 회사들을 도심으로 불러들이게 하고 있습니다. MZ세대는 그저 급여만으로 회사에 다니지는 않습니다. 만족할만한 근무 환경뿐 아니라 멋진 식사와 같은 것들이 함께 가능해야 합니다. 여기서 '멋진'은 '미쉐린'이나 '인스타그램' 등에 언급되는 수준을 의미합니다. 이런 것들이 가능한 곳들이 바로 서울 도심입니다. 접근성 등의 매력은 원래부터 있었던 곳들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서울에 집을 산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는데요. 조선 시대 한양의 집값은 어느 정도였나요?
유성운 : 조선 시대 한양은 인구 10만 명 정도를 예상하고 건설한 신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이미 세종 시대부터 집 지을 땅이 부족하다는 탄식이 터져 나왔고, 건국한 지 100년 정도 지난 성종 때부터는 다주택자 고위 공무원에 대한 성토가 나올 지경이 됐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인사동 30칸짜리 집이 종9품 관리의 녹봉 50년 치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현재 9급 공무원의 연봉(약 3,000만 원)을 대입하면 15억 원 정도가 되는 셈이죠. 칸은 당시 주택에서 기둥과 기둥 사이를 의미하는데, 지금의 평 정도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합니다.
다시 말해 북촌에서 30평짜리 집이 15억 원 정도인 셈이니, 지금 서울 아파트 값이랑 얼추 맞는 것 같습니다. 특히, 18세기 초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서울 집값이 뛰기 시작하는데, 지금 한양 장통방(서울 남대문로와 서린동 일대) 주택 매매 기록을 보면. 1719년 160냥에 거래된 집이 1831년엔 1,500냥으로 약 10배가 오른 걸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 집값을 감안하면 별것 아닐 것 같아도 물가 상승이 매우 제한적이었던 당시엔 매우 높은 상승률이었고, 한양에 내 집 마련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던 셈이죠.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각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상우 : 이 책을 단순히 부동산 투자 입문서로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거주 공간에 대한 인간의 시선과 개선과 개척의 의지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고 유지되어 왔는가를 살필 수 있는 인문서의 시선으로도 탐독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봐주신다면 시대를 관통하는 부동산 관련 이슈의 해법을 이 책을 통해 얻게 되실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유성운 : 부동산을 주제로 한반도의 삼한시대부터 21세기 대한민국까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시도를 했는데, 일단은 지루하지 않고 재밌게 읽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과거' 파트를 맡은 입장에서는 예전 조상들도 지금 못지않게 부동산을 선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으며, 그랬기에 많은 고민을 통해 신중하게 결정했다는 것, 그랬기에 과거에도 좋은 부동산의 기준은 지금과 별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상우 서울대학교에서 공학(학사·석사)과 경영학(학사)을 전공했다. 조선 업체에서 근무하며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산업재(기계·조선) 전문 애널리스트로 활동했다. 경제지에서 선정하는 베스트 애널리스트에 수시로 이름을 올렸으며, 현재는 인베이드투자자문의 대표로 활약중이다. *유성운 고려대학교에서 한국사를 전공했다. 20대 중반까지 인디아나 존스 같은 삶을 꿈꾸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려 입사한 언론사에서 15년 넘게 버티고 있다. <중앙일보>에서 정치부-사회부-문화부를 거쳤으며, 지면과 온라인에 '유성운의 역사정치', '역발상', '역지사지' 등 역사 관련 칼럼을 연재했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그때 어디에서 살고 있었나'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대학원에서는 기후환경학을 공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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