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어야 몇 년 가겠나 싶던 케이팝의 수명이 꽤 길게 이어지고 있다. 지금이 정점인가 생각하는 순간마다 새로운 가수, 새로운 기록이 떠오른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화려하고 가장 자극적인 것들이 분초가 다르게 쏟아진다. 이 땅의 수많은 젊음과 재능과 열정과 땀이 뒤엉켜 만들어낸 결과다. 눈 부신 빛 아래 어둠을 왜 보지 않냐고, 음악 시장과 관련된 모든 게 깔때기처럼 케이팝으로 수렴한다고 꾸준히 외치는 소리는 의미만큼의 데시벨을 확보하지 못한 채 자꾸만 흩어진다. 허망함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 근처에서 그만큼이나 작은 소리가 들려온다. 이 모든 온갖 천태만상의 근원, 음악이다.
아이돌 음악의 운명은 꽤 얄궂다. 세상이 온통 케이팝이라지만, 정작 음악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다. 세상이 궁금한 건 순위, 수치, 금액처럼 숫자로 환산할 수 있는 것뿐이다. 사람들은 케이팝도 팝이란 걸 자주 잊는다. 이곳에도 노래가 있다. 속절없이 유행에 휩쓸린 작품이 있는가 하면, '이런 게 가능해?' 싶은 것도 태어난다. 볼품없는 만듦새 다음으로, 도대체 어떤 기술로 완성했는지 궁금해지는 사운드가 등장하기도 한다. 음악이 케이팝이라는 큰 그림의 일부인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동시에 노래가 만들어지는 순간만큼은 노래가 전부일 거란 믿음도 여전히 유효하다.
NCT 127의 '킬링보이스'는 그렇게 듣는 사람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아이돌 음악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콘텐츠다. 2016년 데뷔로 활동 7년 차, 국내에서만 4장의 정규 앨범과 4장의 미니 앨범, 한 장의 라이브 앨범을 발표한 NCT 127은 이제 발매 첫 주에만 앨범 150만 장 이상을 팔아 치우는 대형 그룹이지만, 이들이 노래로 기억되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딱 떨어지는 22분의 '킬링보이스' 영상을 보는 순간, 당신의 생각은 조금 달라질 것이다.
자신들을 소개하는 곡이라며 첫 곡으로 선보이는 '영웅(英雄; Kick It)'부터가 그렇다. 'New thangs'과 'Bruce Lee'가 반복되는 강력한 훅에 한 번, 의상에서 조명까지 각종 화려한 비주얼에 두 번 가린 노래는 하얀 배경 앞 고요하게 놓인 마이크 여섯 대 앞에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해찬-정우-태일-도영으로 이어지는 미려한 프리 코러스와 퍼포먼스를 빼고, 오로지 래핑 그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는 마크와 태용의 랩은 이미 소비될 만큼 소비되었다고 생각한 노래를 한 번 더 돌아보게 한다. '소방차(Fire Truck)', 'Cherry Bomb' 등으로 이어지는 'NCT 127의 역사' 파트는 노래와 퍼포먼스가 동시에 가능하도록 어린 시절부터 단련해 온 멤버들의 안정적인 발성과 역량을 섬세하게 확인할 드문 기회다.
사실 본편은 지금부터다. 팀 자체 투표를 통해 선정된 수록곡 라인업이 이 콘텐츠의 핵심이라는 건 '지금부터 사랑하는 수록곡이 이어진다'며 소개하는 도영의 살짝 상기된 음성부터 느낄 수 있다. 멤버들의 가성으로 후렴구를 채운 칠한 분위기의 팝 넘버 'TOUCH'를 시작으로 9곡의 '좋은 노래'가 아낌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NCT 127은 알아도 노래는 몰랐던 사람, 또는 타이틀곡은 알아도 수록곡까지 들어볼 생각은 못 했던 사람이라면, 기분과 날씨에 따라 만든 나만의 플레이리스트에 넣을 만한 곡을 몇 곡쯤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NCT 127에 호감이 있어 꾸준히 봐왔거나 이들을 조금 더 알고 싶었던 이들이라면 평소 BGM처럼 들었던 노래 속에 이런 목소리와 이런 조화가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닫고 즐거울 것이다. 'Highway to Heaven'에서 태일과 재현, 도영과 쟈니의 목소리가 기분 좋게 오버랩 되는, 유혹적인 목소리로 'Favorite(Vampire)'의 문을 여는 도영의, 차분한 줄만 알았던 재현의 목소리 속 나긋함을 끄집어내 보여주는 'Dreams Come True'의 순간. 새 앨범의 수록곡인 'Designer'와 'Faster', 타이틀곡 '질주(2 Baddies)'까지 이어지는 흐름에 절로 호감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목소리로 기억되는 가수들의 히트곡을 한데 모아 들을 수 있는 콘텐츠 '킬링보이스'는 케이팝을 만나 '숨은 노래'와 '노래에 숨은 무언가의 발견'이라는 복합적 효능을 갖게 되었다. 아직도 낯선 이가 많을 NCT 127을 소개할 때, 맘 편히 권할 만한 콘텐츠가 드디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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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
기릿기릿
2022.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