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황정은) : 오늘은 단호박 님이 안 계십니다. 저희 둘밖에 없어요.
그냥 : 방금 전까지 있었는데, 없습니다.(웃음)
한자(황정은) : 네, 안 계십니다.(웃음) 저희가 외부 녹음을 잡아서, 원래 사용하던 녹음실이 아니에요. 그런데 인터뷰 녹음이 예상보다 길어져서, 단호박 님의 이후 일정하고 시간이 너무 타이트해져서 자리를 뜨셨어요. 양해를 부탁드리면서, 오늘은 저희 둘이 방송을 하는 것으로 할까요?
그냥 : 네, 그래야 된다고 하는데...(웃음) 늘 있던 멤버가 없으니까 너무 당황스럽습니다. 사실 단호박 님이 녹음하려고 준비를 다 해 오셨는데 갑자기 결정된 사항이잖아요. 그래서 어안이 벙벙하고...
한자(황정은) : 오늘 준비해 주신 내용은 다음 주에 해주시겠죠.
그냥 : 예, 그렇죠.
한자(황정은) : 그럼 오늘은 '삼자대책'이 아니라 '이자대책'인가요?(웃음) 두 사람이 진행하는 책 소개를 진행해볼까요?
한자(황정은)의 선택
최정화 저 | 열린책들
제가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흡입력이 있는 책이었습니다. 부제가 ‘소설가의 제로 웨이스트 실천기’라고 붙어 있습니다. 저는 이 부제가 약간 부담스러워서 조금 미뤄두고 있었거든요.(웃음) 그러다가 우연히 이 책을 펼쳤는데 책이 너무 흡입력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중간에 덮지를 못하고 다 읽어버렸어요. 단숨에 읽었습니다. 다방면으로 정보도 많고 흡입력도 대단하고, 그래서 ‘나 혼자만 읽고 덮어두기엔 아깝다’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오늘 가져왔습니다.
이 책을 한마디로 소개를 하자면 '실천기'입니다. 고금숙 대표님의 ‘알맹상점’이 ‘우리가 같이 해보자’에서 출발한 실천이었다면, 이 책에 소개된 내용은 ‘일단 나라도’에서 출발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같은 지향이지만 약간은 결이 다릅니다. 최정화 작가님은 소설가로 활동하기 전부터 관련 단체에서 일을 한 적이 있어요. 생태 환경 문화 잡지사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살림지기로 근무를 하셨다고 해요. 그러다가 2012년에 <창작과비평> 신인소설상에 「팜비치」라는 소설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녹색연합에서 제작한 영상 캠페인에도 참여를 하셨고, 국립 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소식지에 환경 만화를 그리기도 하셨더라고요. 원래 이쪽에 관심이 대단히 있었고 쭉 이어온 분입니다.
그리고 장편 소설로 『없는 사람』, 『흰 도시 이야기』 등을 썼고 단편집으로 『지극히 내성적인』, 『오해가 없는 완벽한 세상』 등을 낸 소설가이고, 책을 좋아해서 읽는 분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작가예요. 그리고 에세이 책도 두 권을 내셨더라고요. 『책상 생활자의 요가』, 『나는 트렁크 팬티를 입는다』 이렇게 두 책을 냈고, 저는 이번에 세 번째 에세이를 워낙 재미있게 읽어서, 나머지 두 책도 조만간 읽어보려고 해요.
원래 고기를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2018년에 갈라파고스 제도의 무인도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플라스틱 제품을 먹고 새들이 죽어가는 내용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알바트로스>를 보고 삶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최정화 작가는 플라스틱부터 시작해서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의 소재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고 해요. 그리고 물건을 집에 들일 때, 사물의 소재를 대단히 중요하게 묻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중하게 들이고 천천히 내보내는 생활을 하게 된 거죠.
지금은 고기를 먹지 않고, 에어컨 없고, 냉장고 없고, 인터넷 없고, 화장실에서도 휴지를 사용하지 않는 제로 웨이스트의 삶을 지향하면서, '영쩜일 웨이스트'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영쩜일 웨이스트'는 최정화 작가가 만든 말입니다. ‘비건을 지향하거나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완벽에 사로잡혀서 너무 지쳐버리지 않도록, 그래서 실천을 계속할 수 있도록 생활을 열어두는 일’에 영쩜일 웨이스트라는 이름을 붙인 거예요. '제로(0)'에 한없이 가깝지만 '일(1)'에서는 한없이 멀어지는, 그런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예를 들어서 패스트푸드 가끔 먹어요. 그리고 비닐 포장된 소시지도 생각나면 가끔 먹습니다. 이런 행동들이 어떻게 장점이 되냐면, 먹지 않을 때 ‘뭐, 가끔 먹을 수 있으니까’라고 생각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금지로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줄이고 지속 가능성을 올릴 수가 있는 거죠. 저한테도 되게 유용한 팁이었어요, 영쩜일 웨이스트라는 태도가.
쓰레기 줄이기를 처음 시도했을 때, 최정화 작가가 완벽하게 실천을 하려고 애쓰다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해요. 스스로 만들어낸 금지 사항들을 지키려고 애를 쓰다가 지친 거죠. 이때 이 작가를 구제해 준 것이 ‘줄이기’라는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책의 내용인데요, "'거절하기'가 환경 유해 물질을 아예 허용하지 않는 단단한 지침이라면, 그에 비해 '줄이기'는 조금 타협적이다. 나는 이 방식을 '영쩜일 웨이스트'라고 이름 붙였다. '영'과 '영쩜일'의 차이는 제법 크다. 제로를 지향하다 겪게 되는 피로감에서 벗어나, 지치지 않고 계속할 수 있다."라는 내용입니다. 방법은 완전히 그만두지 않고 분량을 줄이는 거예요. 그리고 ‘언제나, 늘, 꼭’이라는 강박을 버리고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입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삶에 들이지 않고 내보내지 않는다’는 습관을 지키면서도 작은 틈을 마련하는 생활 방식인데요. 이런 태도를 갖추게 되면서 실천이 스트레스가 아닌 즐거운 선택이 되었다고 작가가 말을 해요.
짤막짤막한 산문들이 실려 있는데, 각 산문을 시작할 때 제로 웨이스트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단편 소설, 그래픽 노블, 영화, 사회학서 등을 다양하게 인용하는데, 그래서 다양한 문헌을 소개받는 재미도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는 동안에 만든 리스트가 굉장히 늘었는데, 이렇게 소개받은 책 리스트도 만들어 가면서 재미있게 읽다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분명 한 가지쯤은 찾을 수 있다’라는 책입니다. 제로 웨이스트라는 말이 거느린 어떤 아우라 같은 게 있잖아요. 대단히 뭔가를 각오해야 될 것 같고 많은 걸 포기해야 될 것 같고 그런 것들이 있는데, 이런 아우라나 선입견에 짓눌려서 ‘나는 그 정도는 할 수 없어’라거나 ‘그렇게는 살 수 없어’라는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고, ‘이 중에 무언가는 나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책이었어요. 제 경우에는 여태까지 비닐, 플라스틱 줄이기에는 어느 정도 신경을 쓰고는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휴지 줄이기를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낸다는 마음으로 버린다」 꼭지에서는 분리수거를 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버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로 간다는 것만 잊지 않는다면, 그리고 분리수거 현장에서도 나와 같은 사람이 일하고 있다는 그 감각을 잃지 않는다면, 딱히 어려울 것이 없다’라고 최정화 작가는 말을 합니다. 버리는 게 아니라 보낸다, 누군가에게로 간다는 것을 생각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는데요. 이때 누군가는 사람뿐만은 아니고, 이 행성에 살아가는 다른 많은 생명체일 수도 있겠죠.
‘지금 내가 할 수 있으면 일단은 이걸 해야지’ 이 마음으로 넘어가는 게 가능해지는 책입니다. 이 책의 내용을 설명하는 글이 뒤표지에 이미 깔끔하게 실려 있어요. '재활용보다는 재사용', '비건이 어렵다면 채식주의 리얼리티', '제로에 앞서 영쩜일 웨이스트' 이 말들을 메모지에 적어놓고 벽에 붙여놓고 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지난 시간에 인터뷰로 소개한 『알맹이만 팔아요, 알맹상점』의 여는 글에서 ‘친환경 실천은 불편이 아니고 궁극의 자기 돌봄이다’라는 말을 저는 가장 인상 깊게 읽었거든요. 오늘 소개한 『비닐봉지는 안 주셔도 돼요』는 그 이야기의 또 다른 실천 편이기도 합니다.
그냥의 선택
박연준 저 | 은행나무
박연준 시인님의 첫 번째 장편 소설을 가지고 왔어요. 화자의 이름이 ‘여름’입니다. 이 소설은 어른이 된 ‘여름’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새기면서 이야기하는 구성으로 되어 있어요. 여름의 일곱 살부터 시작해서 십 대 초반까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곱 살의 여름은 자신이 온통 규율과 법칙에 둘러싸여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얼굴이 다 닳은 이파리처럼, 일찍이 시들어 있었다”고 이야기해요.
이 아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냐면, 엄마는 나(여름)와 아빠를 떠났어요. 그리고 아빠는 나를 고모에게 맡겨두고 아주 가끔씩만 만나러 옵니다. 고모는 피아노 교습소를 운영하는 원장이었는데 '겨울'이라는 이름의 딸이 있고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남편도 있어요. 여름은 “고모는 하면 안 되는 일을 삼 초마다 읊어대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왜 여름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건 규율과 법칙이었다”고 이야기를 하는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 여름에게 ‘루비’가 나타납니다. 여름은 “내가 사랑을 견디고 있을 때, 루비가 나타났다”라고 적고 있어요. 여름이가 여덟 살이 돼서 학교를 갔는데, 학급에서 좋아하는 남학생이 생겼거든요. 그 남학생도 어렴풋이 눈치를 챈 것 같아요. 둘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가지는 않습니다. 다만, 쉬는 시간마다 그 남학생이 여름을 찾아와서 팔을 집요하게 꼬집어요. 여름은 소리도 내지 않고 그 고통을 견딥니다. 눈을 꾹 감고. 여름은 나한테 왜 이러냐는 질문을 하기가 두려웠다고 해요. 이유는 모르지만 두려웠다고 합니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다가 루비가 둘 사이에 비집고 들어간 거예요. 남학생을 밀치면서 왜 이 친구한테 그러는 거냐고 하고, 여름에게는 넌 왜 가만히 있냐고 했던 거죠. 여름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루비의 눈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느껴요. 사랑이 내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여름과 루비는 친구가 됐죠. 여름에게 루비는 처음 만난 친구라고 할 수 있는데, 둘의 관계가 굉장히 현실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학창 시절의 친구를 생각해보면, 찰싹 붙어 다니면서 서로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어떤 순간에는 미끄러지기도 하고 또, 되게 미묘하게 마찰을 빚기도 하잖아요. 표면화되지 않아도 서로 불편함을 느끼고, 그게 쌓이고 쌓이다가 폭발하기도 하고... 그런 순간과 감정들이 세밀화처럼 그려져 있어요.
이 소설에는 처음 겪는 일들, 감정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나와요. 예를 들면 여름이 어른들을 지켜보면서 뭔가를 알아차리는 아이가 되어 갑니다. 어른들이 어떤 감정일 때는 저런 표정과 행동을 취해, 그럴 때 나는 이렇게 해야 유리해, 어떻게 하면 안 돼, 이런 것들을 알아가요. 그리고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우리가 가까운 사이지만 할 수 있는 이야기와 결코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구나’라는 것도 알아가고요. 어떻게 보면 어른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가는 것인 동시에, 살아가는 일이 어떤 것인가를 어렴풋이 배워나가는 과정이기도 한 것 같아요.
이 소설은 줄거리가 중요한 작품은 아니에요. 분절되어 있는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안에서 정말 세세하게 살아나는 무엇들이 있어요. 읽으면서 ‘지금의 여름이는 이 이야기를 왜 떠올릴까, 왜 이 이야기를 말할까, 왜 쓸까’라는 질문을 품게 되는데요. 많은 이유가 이미 소설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자들이 발견할 수 있게 해놨다고 생각해요. 그중에 하나는 여름이 쓰는 사람으로 성장했기 때문이에요. “나는 점점 시가 되었다”고 하거든요.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이 구절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유년이 시절이라는 것. 유년은 ‘시절(時節)’이 아니다. 어느 곳에서 멈추거나 끝나지 않는다. 돌아온다.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 컸다고 착각하는 틈을 비집고 돌아와 현재를 헤집어놓는다. 사랑에, 이별에, 지속되는 모든 생활에, 지리멸렬과 환멸로 치환되는 그 모든 숨에 유년이 박혀 있다. 붉음과 빛남을 흉내 낸 인조보석처럼. 박혀 있다. 어른의 행동? 그건 유년의 그림자, 유년의 오장육부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세세한 결이 많이, 잘, 표현된 소설이에요. 그래서 단편적으로 인물과 줄거리를 소개하는 것만으로 절대 말할 수 없는 작품이에요. 그러면 이야기가 너무 납작해져 버려요. 그래도 오늘 소개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너무 좋으니까요.(웃음) 저의 소개를 듣고 어떤 모습의 이야기를 상상하시든 실제 작품은 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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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