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케이팝이 아닌 다른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요즘 주위에서 드라마 좀 본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이야기한다. 천재적인 두뇌와 자폐 스펙트럼을 동시에 가진 변호사 우영우가 다양한 사건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그린 드라마는 방영 3주 만에 수도권 시청률 10%를 넘어섰다. 그러나 빛과 어둠은 늘 동시에 오는 법. 마냥 밝기만 할 것 같던 드라마의 앞길에 그늘이 드리웠다. 드라마를 둘러싼 논의의 결을 모두 헤아리자면 이 페이지 전체가 모자랄 만큼 길고 복잡한 이야기가 될 테다. 요는, 극 중에서 서번트 증후군을 가진 ‘천재’로 설정된 우영우가 자폐 스펙트럼을 대표하며 생기는 문제점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와 그런데도 그런 이들이 활약하는 작품이 사회 전반에 긍정적 신호를 전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인식의 대립이었다.
서론이 길었다. 그렇게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인기 드라마와 그가 다룬 소재가 현실과의 접점에서 만들어내는 수없이 많은 말들의 길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있지의 새 노래 ‘SNEAKERS’가 떠올랐다. 지난 7월 15일 발표한 미니 앨범
무엇이든 ‘내 멋대로’ 하겠다거나 언제 어디서나 ‘나’이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들 시선을 신경 쓰지 않겠다’는 메시지는 있지가 2019년 ‘달라달라’로 데뷔하면서부터 줄곧 이어온 일종의 ‘있지 시그니처’다. ‘남들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며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소리 높여 외치는 노래는 그 당찬 모습 그대로 ‘할 말은 한다’는 MZ 세대에 대한 세간의 의식을 대표하는 곡으로 자리하기도 했다. 이후 3년 반 여 동안 꾸준히 이어진 동일한 서사의 끝에, ‘SNEAKERS’가 놓였다. 위대한 인물의 초상화처럼 고급스럽게 장식된 스니커 그림을 지나 스니커를 신고 춤을 추고,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스니커를 찾아 달려나가는 예지의 모습은 그 자체로 있지가 말하는 자유의 상징이 ‘스니커’임을 증명한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지만 느리나마 꾸준히 움직이고 있는 세상의 축을 느끼는 건 이 지점이다. 불과 6년 전인 2016년 발표된 브레이브 걸스의 ‘하이힐’이라는 곡을 보자. 보는 것만으로 위태로움을 자아내는 붉은 하이힐을 신은 여성의 다리를 커버로 내세운 노래는 ‘그대가 좋아한다고 해서 신은 섹시한 하이힐’을 목놓아 부른다. 시계를 조금 더 과거로 돌려본다. 2014년을 강타한 AOA의 ‘짧은 치마’다. 짧은 치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궁합을 자랑하는 ‘아찔한 하이힐’과 ‘새까만 스타킹’으로 무장해 ‘나만 무시해서 날 힘들게 하는 너’를 유혹하기 위한 한 여성의 눈물겨운 스토리가 펼쳐진다. 사실 굳이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다. 같은 소속사 JYP 선배인 미쓰에이의 대표 이미지는 2010년에 발표한 데뷔곡 ‘Bad Girl Good Girl’부터 멤버들의 얼굴이 등장하기 전까지 줄곧 그물 스타킹과 하이힐을 신은 여성의 하반신이었다.
하이힐이 여성의 자율성을 옥죄고 스니커만이 자유를 선사할 수 있다는 도식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스니커를 신은 있지의 의상 가운데는 스니커를 신었다고 해서 딱히 거동이 편하지는 않을 것 같은 것들이 존재하고, 스니커를 신는 것만으로 여권이 자연스럽게 활장할 리도 만무하다. 그래도 희망을 보는 건, ‘SNEAKERS’가 신나게 부르며 바라는 것이 자신들을 자유롭게 만들어 줄 스니커 한 켤레라는 점이다. ‘내가 길을 걸으면 모두 나를 쳐다봐서’ 신은 구두나 ‘그대가 좋아해서’ 신은 섹시한 하이힐이 아닌 ‘자유롭게 뛰며 나로 살고 싶어서’ 신은 스니커. 누군가는 저렇게 신은 스니커에서 어떤 진취적인 의미가 있냐고 말하고, 누군가는 저렇게 신은 스니커 하나가 세상을 바꿀지도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 누구의 말이 맞을지 지금은 알 수 없다. 사실 답이 영원히 나지 않을 논쟁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언제나 그래 왔듯, 그 대립 자체가 우리를 지금보다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스니커를 신고 온 화면과 무대를 뛰어다니는 있지의 경쾌한 발놀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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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