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작가 마리옹 카디에게 무루 작가가 묻다
첫 그림책 『아리에트와 그림자들』로 2022볼로냐 라가치상 오페라프리마를 수상한 작가, 마리옹 카디를 만나다.
글ㆍ사진 출판사 제공
2022.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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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rion Kadi, 문학동네

심리학에서 ‘그림자’는 한 사람의 정신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가장 골치 아픈 것이다. 내 무의식이 버리기로 선택한 것들이 모여 만들어 낸 또 다른 나, 그게 바로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페르소나와 달리 그림자는 나에게도 남에게도 좀처럼 환영받지 못한다. 숨어 있고, 열등하며, 부도덕하거나 비규범적이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다. 미우나 고우나 그림자 또한 엄연히 나의 일부이므로.

그런데 작가들에게 그림자는 조금 다른 존재인 모양이다. 그들은 종종 창작의 과정을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좀 더 깊은 무의식에 기대어 ‘이야기가 나를 데리고 갔다’라거나 ‘이야기가 먼저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라고도 한다. 마리옹 카디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한다. “어느 날, 이야기가 저를 찾아왔죠.”

카디의 첫 번째 그림책 『아리에트와 그림자들』을 읽고 난 감상을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강렬하다. 자유분방하다. 호쾌하다. 대담하고 역동적인가 하면 다정하고 섬세하다. 한 권의 그림책에서 이토록 다양한 감흥이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드물다. 작가에 대해 천재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천재적이라는 건 대체 어떤 걸까. 적어도 독자의 눈에는, 그 결과가 쌓아 올린 노력의 결실이기보다 타고난 재능의 발화처럼 보인다는 뜻일 테다.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우물에서 흘러넘친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기도 할 테고.


ⓒ Marion Kadi, 문학동네 

보나르( Pierre Bonnard)의 팔레트에서 찍은 물감으로 마티스(Henri Matisse)의 붓을 빌려 그린 것 같은 카디의 그림에는 생기와 활기가 넘친다. 춤추는 듯한 갈기를 가진 사자의 그림자가 벌이는 한바탕 소동을 통해 독자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러나 곧 이 시원스러운 해방감의 정체가 스타일이나 서사, 혹은 캐릭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이야기의 힘은 주제에 있다. 그림자를 이토록 매력적으로 다루며 환대하는 이야기가 또 있었던가? 

호기심이 끓어오르던 차에 카디와 서면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첫 책으로 우리의 마음을 훔쳐 간 작가의 창작 과정이 몹시 궁금했다.


 

이야기의 힘은 주제에 있다
그림자를 이토록 매력적으로 다루며 환대하는 이야기가 또 있었던가?


그림책을 만들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사실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했습니다. 회화나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하기 훨씬 전부터요. 오히려 궁금한 건 이런 거예요. 왜 15년이나 걸렸을까. 아마 나한테는 책을 만들기 위해 이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던 거겠지요. 그동안은 그래픽 아트와 타이포그라피 같은 분야에서 일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야기가 저를 찾아왔죠.

그림에 반한 독자가 많습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유쾌하고 힘찬 에너지를 느꼈어요. 다채로운 색채와 역동적인 인물들, 그리고 그들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엑스트라들의 생동감이 어우러져 이야기가 마치 한 편의 오케스트라 같았고요. 장면마다 등장하는 동물들과 그들의 그림자, 생과 사의 꼬리물기를 보는 즐거움도 컸습니다. 온갖 살아 있는 것들이 소란스럽게 세계를 꽉 채우고 있는 느낌이었달까요. 그림 작업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그림은 첫 장면부터 순서대로 그렸어요. 처음에는 평소 스타일대로 그렸기 때문에 여유로웠고요. 알렉스 카츠(Alex Katz)의 그림을 많이 봤습니다. 그러다 조카들이 책을 읽는 모습을 봤는데, 디테일을 정말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편집자도 디테일을 더 추가하자는 의견을 주었죠.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떠오르지 않아 쉽지 않았어요. 무의미한 묘사가 아니라 시각적이고 서사적인 흐름과 일관성을 찾아야 했으니까요. 예를 들면 반복되는 디테일의 일부를 흑백으로 표현한다거나, 가장자리에 동물들이나 꽃 이미지를 배치한다거나, 중세의 태피스트리 같은 장식적 요소를 차용하는 방식이었죠. 장면 구성은 계획적이었지만 세부는 보다 즉흥적으로 만들어졌어요.

반복되는 장면들의 변주도 무척 재미있어요. 아리에트의 방에 걸린 그림이나 어항 속의 동물들, 혹은 카펫의 테두리 그림이 매번 바뀌잖아요. 마당에 놓인 공도 모양이 달라지고요. 저에게는 신비로운 방식의 유머로 느껴졌어요.

『아리에트와 그림자들』에 등장하는 공간은 얼마 안 돼요. 사자의 연못, 아리에트의 방, 등굣길과 학교 정도죠.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시도한 변형이에요. 제가 사랑하는 작가 앤서니 브라운(Anthony Browne)의 작품에서 받은 영감이기도 하고요. 그가 한 것처럼, 그림 속에 독자가 눈치채거나 눈치채지 못하는 작은 변화를 만들어 놓았죠.


『아리에트와 그림자들』 마리옹 카디 지음, 정혜경 옮김, 문학동네

책을 읽고 저는 당장 작가님의 작업실과 책상을 훔쳐보고 싶어졌어요. 작가님의 책상에서 이 책이 만들어지는 동안 어떤 것들이 즐겁거나 어렵거나 혹은 중요했나요?

그림책은 아름다워야 하는 동시에 재미있기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해야 그런 책을 만들 수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름다운 책에 도달하기 위해 저는 오직 제가 할 줄 아는 일을 해요. 그럴 때 편안함을 느끼고요. 저는 최소한 흥미로운 조합의 색을 만들어낼 수 있죠. 패턴을 만드는 것도 좋아하고요. 제가 좋아하는 장식과 인테리어를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교실을 지루하게 그리고 싶지 않아서 로마 건축의 요소, 특히 바닥의 모자이크를 차용했고요. 아리에트의 방 역시 그릴 때 즐거운 공간이어야 했어요. 반면 아리에트의 생김새를 완성하기까지는 매우 어려웠는데요. 처음에 만든 캐릭터는 너무 딱딱하고 경직돼 보였어요. 아리에트의 성격이 드러나는 이미지를 찾아야 했는데, 그건 제가 잘하는 부분이 아니었죠. 우연히 아리에트의 머리카락을 먼저 그리면서 고민이 풀리기 시작했어요.


ⓒ Marion Kadi, 문학동네

그건 제가 잘하는 부분이 아니었죠
우연히 아리에트의 머리카락을 먼저 그리면서 고민이 풀리기 시작했어요


저에게는 이 이야기가 융의 그림자 이론에 대한 알레고리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사자의 그림자가 아리에트보다 먼저 등장하는 점, 아리에트가 아니라 사자의 그림자가 아리에트를 선택하는 점, 아리에트를 통해 발현되는 그림자들의 특징, 그림자들의 화합과 수용을 통해 아리에트가 성장하는 점들이 융의 이론과 겹쳐져 쾌감도 느꼈는데요. 특히 사자의 그림자 캐릭터가 정말 좋았습니다. 

저도 사자의 그림자 캐릭터를 무척 좋아합니다. 가장 먼저 완성된 캐릭터이기도 하고요.  모든 이야기가 그로부터 시작되었죠. 사실 그는 원래 다른 이야기 속의 캐릭터였어요. 그러다 어느 날 알게 됐죠. 그가 자기 이야기를 말할 자격이 생겼다는 것을요. 그는 곧바로 다른 누구도 아닌 아리에트를 찾아냈어요. 저는 융의 이론을 잘 모르지만 이야기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어져 기뻐요. 독자들의 해석은 놀라워요. 다만, 이야기를 만들 때 해석이나 주제를 염두에 두지는 않아요. 그저 이야기의 논리에 더 오래 머물 뿐이죠. 


『아리에트와 그림자들』 마리옹 카디 지음, 정혜경 옮김, 문학동네

결말에서 마당의 공을 빤히 보는 공작새 때문에 한참 웃었습니다. 작가님에게 유머란 무엇인가요?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큰 소리로 웃는 것을 처음 목격했을 때 놀랍고 기뻤어요.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그림책은 읽고 또 읽는 책이기 때문에 재미의 요소가 충분한지 아닌지 확신하기 어려워요. 물론 독자들의 반응을 계산할 수도 없고요. 유머는 일종의 지능인 것 같아요. 웃기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점점 더 장난스러워지는 것밖에 없었죠.


유머는 일종의 지능인 것 같아요
웃기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다음 그림책 계획이 궁금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준비하시나요?

지금 저와 일하는 편집자가 몹시 궁금해하는 게 바로 그거예요! 



자기 안에 있는 그림자들을 통합하는 일은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다. 타인을 이해하고 삶의 균형을 이루려면 우선 자신의 그림자부터 인식하고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천재성 또한 그의 페르소나보다 그림자에 닿아 있다. 그래서 카디에게 물었다. 특별한 그림자가 있는지.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언젠가 친구들과 가지고 싶은 동물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카디의 대답은 사자였다고 한다. 자신이 좀 소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이 이야기를 카디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사자의 그림자에 대해 질문할 때까지 그는 이 대화를 기억하지 못했다. 무의식이 그렇다. 온갖 것들이 거기에 다 모여 있다. 그러다 불쑥 ‘어느 날 이야기가 나를 찾아왔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의식의 문을 두드린다. 그러니 조금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우리가 저마다의 무의식 속에서 어떤 그림자를 만나게 될지, 그와 함께 어떤 재미난 인생을 살아가게 될지.



*저자 : 마리옹 카디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다. 프랑스 에콜 뒤페레와 에콜 에스티엔느에서 그래픽 아트와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했고 지금은 미국 보스턴에 살고 있다. 〈뉴욕 타임스〉 〈자디그〉 〈포트리〉 등의 신문잡지사와 정기적으로 작업하고 있으며 그림책 작가로서는 『아리에트와 그림자들』이 첫 작품이다. 이 책으로 2022 볼로냐 라가치상 오페라프리마를 수상하였다.



*인터뷰·정리 : 무루(박서영) 


그림책을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읽고, 번역하고, 여러 매체에 소개하는 일을 한다. 『섬 위의 주먹』, 『마음의 지도』, 『할머니의 팡도르』, 『고양이와 결혼한 쥐에게 일어난 일』, 『눈의 시』, 『사랑의 모양』등 여러 권의 그림책을 번역했고, 에세이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를 썼다.  


▶ instagra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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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에트와 그림자들
아리에트와 그림자들
마리옹 카디 글그림 | 정혜경 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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