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인생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다.
‘<사인필드>를 처음 본 건’이라고 쓰고 난 후 정확한 연도를 찾고 싶어서 인터넷을 뒤졌지만, 한국에서 방영한 시절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없다. 이 시트콤을 한국에서 방영한 방송국은 EBS였다(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내 기억은 그렇다). 나는 EBS에서 방영한 또 다른, 훌륭한 (드라마는 아니지만) 프로그램을 알고 있다. <샐러리맨 딜버트>라는 애니메이션인데, 둘 다 (시청자들이 알아차리면 안 된다는 듯이) 늦은 밤 몰래 방영되었고, 어느 날 일언반구도 없이 종료되었다. <사인필드>를 봤을 때(아마도 2000년대 초중반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이 시트콤의 화면이 다소 예스럽다고 느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한 <사인필드> 속 거의 모든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었고 최첨단이었다. 그리고 이 생각은 매일 밤, 넷플릭스로 에피소드를 하나씩(아니다. 사실은 두개씩, 아니 세개씩, 아니…) 다시 보고 있는 요즘도 변함없다.
좋아하는 드라마에 대해서는 언제나 그렇듯이, <사인필드>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이 혁신적인 시트콤이 남긴 빛나는 성취는 지금 당장 구글에 <사인필드>라고 검색하는 순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드라마를 설명할 때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정의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쇼”인데, 이 완벽한 문장은 평론가의 독창적인 표현이 아니라, <사인필드>에서 등장인물의 입으로 직접 말해진 것이다. 매 에피소드는 이 시트콤의 기획자이자, 창작자이자, 주연배우이자 스탠드업 코미디언 ‘제리 사인필드’의 공연으로 시작된다(그렇다. 이 시트콤 안에서 그가 맡은 역의 이름은 ‘제리 사인필드’이고, 직업은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극 중에서 사인필드는 맨해튼에 사는, 이제 막 명성을 얻기 시작한 코미디언이다. 또 다른 등장인물이자 사인필드의 친구인 조지 코스탄자와 일레인 베네스 그리고 코스모 크레이머의 관계는 훗날 <프렌즈>나 <윌 앤 그레이스>, 심지어 <섹스 앤 더 시티>에 나오는, 뉴욕에 살고 있는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거의 가족과도 가까운 관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예상해볼 수 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문장 속에 숨겨진 의미는 명백하다. 말 그대로 특별한 일이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은 거의 항상 똑같은 식당에서 만나 아침을 먹고, 출근을 하고, 누군가를 만나 데이트하고, 소파를 사러 가고, 집들이 선물 때문에 빵집에 들르고, 쇼핑몰 주차장에 주차해놓은 차를 찾아 나선다. 어떤 에피소드는 오로지 각 인물의 지하철 여정만을 그리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거의 모든 에피소드는 비극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새로 산 소파에 누군가 오줌을 싸고, 빵집에서는 새치기를 당해서 마지막 남은 완벽한 케이크를 살 수 없게 된다. 쇼핑몰에서 주차해둔 차를 절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일정은 망가지고, 지하철이 멈추는 바람에 일레인은 친구의 결혼식에 제때 도착하지 못한다(일레인은 그들의 결혼반지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런 상황을 ‘비극’이라고 말하는 것은 의도된 호들갑이다.
‘비극’이라고 불려질 자격을 얻으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시즌4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NBC 방송국의 사장은 일레인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어서 사장직을 그만두고 고래잡이 배를 저지하는 활동가로 일하다가 바다에서 목숨을 잃는다. 시즌6 6화에서는 서커스에서 외줄타기를 하던 단원이, 신장 결석에 시달리던 크레이머가 통증 때문에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균형감각을 잃고 추락한다. 제리의 먼 친척 할머니는 제리가 꺼낸 기분 나쁜 이야기 때문에 불쾌감을 느끼고 시름시름 앓다가 갑자기 사망한다. 본의 아니게 암이라고 제리를 속인 친구는, 운전 중 제리에게 선물 받은 가발을 매만지다가 교통사고로 죽는다. 이것 말고도 많다. 아무도 어떤 악의를 가지지 않았고,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지도 않았건만 이 시트콤의 많은 사람들은 죽거나 다쳤다. 그렇다면 이걸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쇼’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런 식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사인필드> 속 죽음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의 단면일 뿐이라고. 특별하지 않은 것으로서의 죽음. 어떤 사람이 길을 걷다가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처럼, 죽음이 언제 어디에나 산재해 있다는 이러한 아이디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곤혹스럽다. “이사할 땐 온 세상이 상자가 되죠. 상자 생각 밖에 안 해요, ‘상자가 어디에 있지?’ (…)대화도 불가능하죠. 집중이 안 되거든요. ‘닥쳐! 상자 좀 찾게!’(…) 가게에 들어가서 이러죠. ‘여기 상자가 있어, 감히 없다고 말하지마, 젠장 냄새가 난다고!’ 집착하게 돼요(…) 장례식장에서도 다른 사람은 우는데 관을 보며 이래요. ‘멋진 상자야. 저거 어디서 샀는지 알아요? 장례식 끝나면 내가 가져도 돼요? 손잡이가 꽤 괜찮은데?’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 이사입니다. 영구차는 이삿짐 트럭, 상여꾼들은 친한 친구들이죠. 그런 중요한 이사를 부탁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 말이에요. 관은 정말 우리가 그토록 찾던 완벽한 상자입니다. 일단 찾으면 우리가 들어가야 한다는 게 문제지만요.” 극 중에서 스탠드업 무대에 선 사인필드가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 후 얼마간은 애처롭고, 얼마간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 관객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들은 웃는다. 소리 내어 웃는다.
이 시트콤에서는 죽음을 비롯한 모든 것이 웃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수치스러운 경험, 잔인한 실연, 부모님의 이혼, 갑작스러운 해고,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순간들조차.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드라마가 끝난 후, 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쇼’가 누군가의 죽음과 상처, 좌절과 수치심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 기이한 감정 혹은 이상한 낯섦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그들에게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들을 그저 웃고 넘겼다는 뒤늦은 자각 같은 것. 그리고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게 될지도 모른다. ‘아, 그래, 그런 게 삶이지. 모든 웃음 속에는 비극이 숨어있지. 아, 이 얼마나 무서운 삶이냐!’ 하지만 다시 다음 에피소드를 재생시키는 순간, 우리는 또한 웃을 것이다. 소리 내어서. 그러므로 이 드라마에서 추구하는 목표는,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격언,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를 정확히 뒤집어 놓은 바로 그 상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고 멀리서 보면 비극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을 최대한 가까이서 봐라. 당신 스스로를 보고 웃을 수 있도록.
가까이서 봐도 희극이고 멀리서 봐도 희극인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까이서 봐도 비극이고 멀리서 봐도 비극인 인생은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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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소설가)
드라마와 빵을 좋아하는 소설가. 『디어 랄프 로렌』,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맨해튼의 반딧불이』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