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8월 4일 새벽,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소프라노 윤심덕과 극작가 김우진이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 뒤이어 윤심덕의 음반 ‘사의 찬미’가 발매되고, 전에 없던 광풍이 조선 일대를 휩쓴다. 클래식의 불모지인 조선에서 ‘사의 찬미’ 음반은 물론 축음기까지 불티나게 팔려나간 것이다.
우리는 대중음악사상 가장 극적인 이 사건을 비극적인 로맨스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 사건에는 실체가 없다. 두 사람이 함께 죽었다는 소식은 사실일까? 아니, 두 사람이 정말 연인이기나 했을까? 어쩌면 ‘사의 찬미’는 누군가에 의해 철저히 기획된 것인지도 모른다. 전대미문의 실화를 바탕으로 거대한 음모를 파헤친 소설 『생의 찬미』의 공저자 강헌 작가를 만나봤다.
『생의 찬미』는 윤심덕의 삶을 새롭게 조명하는 소설입니다. 그간 사람들은 윤심덕을 ‘로맨티시스트’ 정도로 기억해 왔는데요, 소설 속 윤심덕은 어떻게 다른가요?
‘식민지 최초의 소프라노’. 한국 현대사가 윤심덕에게 부여한 단 한 줄의 설명입니다. ‘현해탄의 정사(情死)’는 영원히 그를 따라다닐 카피이고요. 우리는 그동안 윤심덕을 부유한 가문의 여식으로 태어나 서구 문물에 경도된 인물로, 식민지의 시대적 환경에 절망하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하며 유부남인 정인 김우진과 관부연락선에서 동반자살한 인물로 기억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실과 다릅니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는 평양의 콩나물 장사하는 가난한 집안의 후손이고, 경성 유학과 동경 유학은 오로지 억척 같은 그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었어요. 그는 누구보다도 낙관적이고 독립적인 인물이었으며 그 어느 누구보다도 끈질긴 잡초 같은 생명력의 화신이었죠. 죽음의 스캔들이 발생했으니 그를 퇴폐주의의 상징처럼 여길 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스캔들이 거대한 조작 혹은 치밀한 기획이라면 어떨까요? 우리는 진짜 윤심덕, 살과 피로 살아 움직이는 진짜 인간 윤심덕을 다시 호명해내어야 합니다.
당시 ‘사의 찬미’의 인기가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사의 찬미’ 신드롬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인기를 가늠할 수 있는 기록이 있을까요?
식민지 조선의 음악 소프트웨어(음반)와 하드웨이(축음기) 시장이 열린 것은 한마디로 ‘사의 찬미’ 신드롬 덕분입니다. 구체적인 판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숫자로는 증빙할 길이 없겠죠. 하지만 가늠할 수는 있습니다. 당시 열 살이었던 고 박용구 선생의 회고담에 따르면 경북 영주시 풍기읍 같은 오지에도 축음기와 ‘사의 찬미’ 음반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이런 자료들을 통해서 당시에 음반과 축음기가 얼마나 많이, 널리 보급되었는지 추정할 수 있는 거죠.
‘사의 찬미’의 가사는 윤심덕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추정에 불과한데요, 누가 어떤 심정으로 가사를 썼을 거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음반에 기록된 작사가는 윤심덕입니다. 그러나 명사로서의 윤심덕이 신문 잡지 매체에 쓴 기록들이 남아 있는데, 그의 필력은 성악 실력과는 달리 소학교 수준으로 형편이 없습니다. 반면 ‘사의 찬미’의 노랫말은 거의 백 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깜짝 놀랄 만한 비유로 가득한 명문이고요. 전문적인 작가의 손에서 쓰였음이 거의 명백하다고 생각해요. 역사 속에선 사라진 그 작사가를 추적하는 것이 이 소설의 주요한 뼈대 중 하나입니다.
서울과 일본을 오가며, 여러 기록을 토대로 오랜 기간 취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생의 찬미』를 집필하기 위해 어떤 정보를 찾아다니셨나요?
서울과 목포, (평양은 가지 못했습니다) 도쿄 등을 다니며 윤심덕과 이토오레코드사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유령 같은 존재였죠. 수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그들의 존재를 증빙하는 기록은 없었습니다. 후쿠오카 언론사의 오보 사건 이후 조선과 일본에서 윤심덕과 김우진에 대한 함구령 아닌 함구령이 내려진 것처럼, 그들은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이들인 것처럼 흔적도 없었어요. 그래서 실재한 인물들을 등장인물로 삼았으면서도 오로지 역사적 상상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작가님이 시간을 거슬러 당시로 돌아가 윤심덕을 만날 수 있다면 어떨까요? 단 한 시간만 머물 수 있다는 조건이 있다면 어디서 만나 무엇을 묻고 싶으신지요?
오사카 이토오레코드의 녹음실에서 한 시간. 왜 계약서에도 없는 ‘사의 찬미’라는 노래를 취입하려고 하는지 질문할 겁니다. 무엇 때문에? 무슨 대가로?
윤심덕이 실종되고 ‘사의 찬미’가 발매된 지 100년가량이 지났습니다. 100년이 지난 시점에 독자들이 『생의 찬미』를 통해 이 이야기에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윤심덕의 삶은 우리에게 식민지·여성·예술가라는 세 겹의 마이너리티에 대한 화두를 던져줍니다.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고, 민주화를 이루어내었으며, 한류라는 위대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화두로부터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압축고도성장이 우리로부터 숙고의 깊이를 거세시켰으니까요. 이 소설은 여전히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는 이 타자성을 성찰하는 이야기입니다.
『생의 찬미』는 물론이고, 벌써부터 다음 작품까지 기대됩니다. 또다시 대중음악가의 삶을 소설로 다루실 계획은 없으신지요?
예술가를 서사의 주인공으로 다루는 것을 독일에선 ‘예술가소설’이라는 하위 장르로 부릅니다. 예술가는 그 시대의 가장 민감한 더듬이와 같은 존재로, 그렇기 때문에 매력이 충만한 캐릭터죠. 제가 다음으로 다루고자 하는 인물은 대중음악가가 아닙니다. 해방공간 시대의 천재 음악가였지만 북에선 남에서 넘어왔다고 숙청되고 남에선 북으로 넘어갔다고 역사에서 삭제된 비운의 작곡가 김순남의 삶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다음 작품은 아마도 그가 주인공인 소설이 될 겁니다.
*강헌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사대부고를 졸업할 때까지 부산에서 살았다. ‘장산곶매’라는 독립영화집단에서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닫힌 교문을 열며> 등을 만들었고, 상업 영화 시나리오 <아담이 눈뜰 때>, <정글스토리>, TV 드라마 <제3극장> 등을 썼다. 후배의 부탁으로 김현식에 대한 평론을 썼다가 졸지에 음악 평론가가 되어 꽤 오랫동안 먹고살았고, 그 과정에서 <예감>, <상상>, <리뷰> 같은 문화계간지들을 또래 동료들과 만들기도 했으며, 홍익대와 성공회대 그리고 단국대와 성균관대 등에서 대중음악사를 20년 동안 가르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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