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평론가 최지선의 책 『여신은 칭찬일까? : 여성 아이돌을 둘러싼 몇 가지 질문』에는 아이돌과 색채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여돌의 이름은 왜 컬러풀할까?」라는 챕터가 있다. ‘아이돌이 색채를 사용하는 법’이라는 부제 아래 남성 그룹에 비해 색과 훨씬 밀접하게 연결된 여성 아이돌 그룹명에서 청순함을 표방하는 여성 아이돌이 자주 사용하는 흰색에 담긴 다채로운 함의까지 시원시원하게 살핀다. 비주얼이 음악만큼 중시되는 케이팝 세상에는 흑백에서 무지개색까지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색이 존재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만큼 강하게 색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 형성되어 있기도 하다.
화이트와 핑크가 대세를 이루던 여성 아이돌 시장에서 최근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색은 단연 레드벨벳의 빨강과 블랙핑크의 검은색이다. 대중문화에서 성적인 암시를 표현하는데 자주 쓰이던 빨강은, 레드벨벳이라는 아이콘을 통과하며 어딘가 위험한 전복적인 이미지를 추가로 얻었다. 최지선의 말처럼 ‘불 같고(red-hot) 혈기 왕성(red-blooded)’하고, ‘적색기와 레드 콤플렉스, 현행범(red-handed), 홍등가(red-light district) 등의 표현에 쓰이며 혁명, 범죄, 섹시함으로 치환’되기도 하는 이 색은 레드벨벳 특유의 쿨 하고 을씨년스러운 이미지와 섞이며 아이돌이 표현하는 빨강에 다채로움을 더했다.
블랙 역시 마찬가지다. 레인보우 블랙이나 우주소녀 더 블랙 등, 여성 그룹의 경우 명확한 콘셉트를 가진 유닛에만 사용되던 블랙은 그룹 블랙핑크의 성공으로 이제 ‘멋진’ 여성 그룹 이미지를 대표하는 색채가 되었다. 실제로 블랙핑크는 뮤직비디오를 통해 밤과 어둠이 장악한 명도 낮은 이미지를 꾸준히 내세웠다. 거칠고 불안한 블랙이 세련과 멋의 상징으로 위치를 바꿨다.
그리고 아이브(IVE)다. 사실 아직 데뷔한 지 채 6개월도 지나지 않은, 대중에게 선보인 결과물이 수록곡 포함 4곡밖에 되지 않은 그룹의 색채를 본격적으로 논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들이 타고난 잿빛 쿨 톤은, 아이브의 캐치프레이즈와도 같은 ‘나와 사랑에 빠진 나’라는 테마를 만나며 시각적, 정서적으로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만든다. 데뷔곡 ‘ELEVEN’은 이들의 차갑고 매캐한 색채를 파랑과 보라로 그려낸 노래였다. ‘내 안에 빼곡하게 피어나는 블루’, ‘그날 향기로운 보라빛의 무드’ 같은 노랫말은 아이브의 쿨한 색채를 규정했고, 뮤직비디오에 담긴 풍경 역시 명확한 색으로 메시지를 뒷받침했다. 그룹을 대표하는 얼굴인 원영의 원피스나 일부 멤버의 의상에 쓰인 핫 핑크 정도가 거의 유일한 온기였다.
신곡 ‘LOVE DIVE’는 그런 서늘함이 가진 날카로움을 좀 더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곡의 테마를 이끄는 주요 소품인 큐피드 화살의 눈부신 핑크가 영상 내내 넘쳐흐르지만, 이는 곡의 화자가 그 화살의 끝이 자신으로 향해 있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단번에 차가운 푸른빛으로 형질을 바꾼다. ‘난 그 맘을 좀 봐야겠어’라는 가을의 선언과 함께 전환되는 파랑은, 이어지는 원영의 가사 ‘Narcissistic, my god I love it’으로 이어지며 곡과 그룹의 이미지를 관통하는 중요한 순간을 만든다. 이어지는 ‘서로’가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직감이 든 순간, 심연의 깊은 곳에서 울리는 듯한 챈트(Chant)로 구성된 후렴구가 나쁜 메아리처럼 퍼진다. 청춘이라면 마땅히 마주치게 되는 순간처럼 불온하게 퍼지는 소리마저 잿빛이다.
이토록 화사한 것들이 이토록 어둡게 가라앉아 있는 건 분명 이 모든 것 위로 드리워진 ‘나의 그림자’ 때문이다. 뭔가에 홀린 듯 끊임없이 나를 들여다보는 나의 그림자는 아이브가 소화하는 수많은 색채 위에, 음표 하나하나 위에 드리우며 이들을 둘러싼 세상의 온도, 명도, 채도를 모조리 낮춘다. 모든 걸 화려한 잿빛으로 바꾼다. 온통 새롭고 반짝이는 것들로 가득 찬 이곳에서마저 이런 화려함은, 이런 잿빛은, 이런 사랑은 처음이다. 나를 도무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익숙한 푸른 눈이 끈질기게 나를 들여다보며 사랑을 고백한다. 매혹당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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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