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삶에 관한 질문들이 담겨있다. 결국 그림을 본다는 것은 삶에 대한 관찰이자, 나에 대한 관찰이기도 하다. 커다란 액자 속에 담겨있는 그림들은 우리의 생각과 말문을 틔워주고 오롯이 나에게 잠길 수 있게 하는 안내자이다.
손수천 저자는 위로가 필요할 때 그림을 보러 간다. 그리고 이렇게 모인 95개의 그림과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그림에 젖어』는 저자가 명화 속에서 얻었던 위로와 감동, 삶의 발견을 전하고, 그가 그랬듯 지친 누군가에게 한 점의 그림이 상처를 보듬고 어루만져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림에 젖어』는 어떤 책인지 소개 부탁드려요.
처음 『그림에 젖어』를 기획한 이유는 서점에서 미술책을 둘러보다가 화가나 그림에 관련된 지식에만 중점을 둔 책이 너무 많다는 개인적인 불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자라는 미술사적인 지식과 상식을 최대한 배제하고, 하나의 그림을 보며 느낀 제 감상과 감정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기획과 초고 단계에서는 책을 펼쳤을 때 왼쪽은 그림이 한 면 가득 차지하고, 오른쪽은 그 그림과 관련된 저의 감상과 감정의 파편들이 숨 쉬는 책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책을 아무렇게나 펼쳐도 양쪽으로 그림과 함께 제 감상문이 나오는 형식의 책이었지요. 그 때문에 꼭지마다 글 자체가 한 페이지 분량으로 짧은 에세이가 되었습니다. 출판사와 편집자의 고마운 충고와 디자인 편집에 따라 지금의 『그림에 젖어』가 완성되었으니 개인적으로는 95% 이상 만족하고 있습니다.
책의 앞표지와 뒤표지의 그림 속 아이의 얼굴이 참 인상적입니다. 존 에버렛 밀레이의 <나의 첫 번째 설교>, <나의 두 번째 설교>를 고르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미술에 관련된 책을 쓰고자 마음을 먹었을 때 표지화는 존 에버렛 밀레이의 두 작품으로 정해뒀습니다. 제목보다 먼저 정한 것이지요. 두 그림을 처음 봤을 때부터 화가의 딸인 귀여운 소녀 에피의 모습에 반해버렸는데요.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독자에게 제가 두 작품을 보고 느꼈던 예쁘고 귀여운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그림에 젖어』를 한 번 더 돌아봤으면 하는 마음 또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림에 젖어』를 펼쳐 읽기 시작한 독자가 처음에는 ‘나의 첫 번째 설교’처럼 눈이 초롱초롱했다가 점점 ‘나의 두 번째 설교’처럼 지겨워하겠구나 하는 제 나름의 농담이 담겨있기도 합니다.
마음이 우울한 날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도 명화를 자주 보고, 명화 속 장면을 떠올리시는 것 같습니다. 그림에서 위로를 찾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그림은 작가님께 어떤 의미인가요?
학창 시절 그림에 재능이 없어 미술 시간이 너무 싫었습니다. 스케치북과 물감, 팔레트, 붓 등 많은 준비물을 손에 들고 가야 했기에 더 싫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20대 때 누군가의 추천으로 우연히 프리다 칼로의 ‘상처 입은 사슴’이란 자화상을 봤는데 화가가 그림 속에 투영시킨 자신의 슬픔이 도리어 저를 위로해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는 그림을 보면서 그 속에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는지 혼자 상상해보는 묘한 취미가 생겼습니다. 그림은 제게 위로와 안식을 주는 한편 저의 부족한 글솜씨를 숨겨주고 보완해주는 친구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피에트 몬드리안, 에드워드 호퍼, 프란시스코 데 고야, 마르크 샤갈 등 여러 예술가의 그림을 담았는데 95편을 선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한다면 100편 정도의 그림과 글이 적당하다고 어렴풋이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숫자와 날짜에 쓸데없는 집착이 있는 저로서는 100이란 숫자가 완벽을 강요하는 엄중하고 답답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서 95편 정도면 적지도 않고, 많지도 않은 뭔가 적당한 느낌이 들어서 95편으로 선정해봤습니다. 사실 『그림에 젖어』 175쪽과 176쪽에 왜 95편인지 좀 더 내밀한 이유가 들어있습니다. 하여 그 이유에 대한 답은 책을 직접 읽은 독자에게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불안하거나 우울할 때, 작가님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그림을 소개해 주신다면요? 위로가 필요한 독자님들께 추천해주고 싶은 그림도 좋습니다.
외젠 카리에르의 ‘아픈 아이’입니다. 2011년에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직접 봤는데 보자마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더군요. 화가는 자신의 아내와 아픈 아이가 안고 있는 모습을 그렸는데 아이는 엄마를 위로하는 듯 왼손으로 엄마의 뺨을 만지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 아이의 왼손이 저를 울린 것이지요. 인파로 붐비는 휴일의 미술관에는 특히 부모와 아이들이 많았는데 울고 있는 저를 본 어느 아이가 자신의 부모에게 ‘저 아저씨 울고 있어요’라며 걱정스럽게 말을 했습니다. 저를 걱정해주는 그 아이가 고마워서 힘껏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 아이는 왼손으로 제 뺨의 눈물을 닦아주었을 것 같습니다.
빌헬름 하메르스회의 <휴식>을 보는데, 배경 지식 없이도 편안함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그림을 감상하려면 전문지식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명화 애호가로서 어떻게 하면 명화와 친해질 수 있는지, 명화를 즐기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 그림은 미술관이 아니라 극장의 스크린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시라노: 연애조작단>이란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 이민정이 이 그림을 보기 위해 미술관으로 간다는 설정이 있었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도 ‘휴식’ 속 여자의 보이지 않는 앞모습이 어떨지 내내 궁금하더군요. 그래서 이 그림과 화가에 대해 검색하는 대신 혼자서 멋대로 상상해보기로 했습니다. 잠깐의 휴식 시간에 의자에 앉아서 무엇을 할까 하고 말이죠. 요즘 같으면 누구나 스마트폰을 보고 있겠죠. 그러나 저는 그림 속 여자가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면 누군가에게 받은 편지를 읽을 것이라고 상상했습니다. 그것은 달콤한 연서일 수도 있고, 가슴 아픈 내용일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그 편지는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속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그것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대필 연애편지라고 상상의 나래는 더욱 번져갑니다. 이제 빌헬름 하메르스회의 ‘휴식’은 제게 편안함을 주기도 하지만 가슴 서늘한 뭔가를 동시에 주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방식으로 명화를 즐깁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어떤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히길 바라시나요?
이 책을 부모님께 가장 먼저 드렸습니다. 속지에 두 분께 드리는 감사의 짧은 편지를 써서 말이죠. 며칠의 시간이 흐른 후 몰래 그 책을 훔쳐봤는데 아버지께서 저의 친필 사인 밑에다가 이 책이 세상의 많은 이들에게 읽혔으면 한다는, 아들을 위한 소망이 쓰여 있더군요. 다소 감상적으로 변한 저는 조용히 책을 덮었습니다. 아버지의 소망과 함께 단 한 명이 읽더라도 그 독자에게 약간의 위로와 행복이 스며든다면 정말 좋겠다는 가식적인 부탁을 함께 드립니다.
*손수천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중에 ‘성경이 있는 정물’이란 게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화가의 자화상이나 풍경화가 아니라서 그리 유명한 작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도 그저 스쳐봤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빈센트 반 고흐에 관련된 책을 읽었을 때 그 그림의 유래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이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조용히 아버지의 방에 들어간 화가는 아버지가 내내 읽으셨던 성경을 그린 것이라고요.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장남의 회한과 슬픔이 그림 속에 스며 있는 걸 그제야 알게 되어 눈물이 터져 나오더군요. 당대에는 무명의 화가였지만 세월이 흘러 머나먼 곳에 떨어져 있는 이에게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릴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림과 예술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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