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새로운 책을 쌓아 두고는 이 책 저 책을 오가며 병렬 독서를 하는데, 문학을 읽다 막힐 땐 비문학으로, 비문학을 읽다 막힐 땐 문학으로 사랑의 도피를 하곤 한다. 하지만 문학도 비문학도 막힐 땐 이도 저도 못한 채 죄책감에 시달리다 읽던 책을 전부 슬쩍 방치하고는 모른 척 새 책에 도전한다. 구독 서비스의 장점은 모든 책을 끝까지 다 읽을 필요가 없다는 사랑의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물론 어설픈 나는 한 번 펼친 책은 마지막 장까지 완주하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참 사랑꾼이라서 좀처럼 여기에 위안을 얻지 못하고 만다. 그렇게 읽다 만, 언젠가는 다시 읽을 거라 믿고 있는 책들은 점점 늘어만 가고, 한 달 전에 읽던 책을 일 년 뒤에도 읽고 있는 사태가 벌어지곤 하는 것이다. 이런 때 꺼내는 비장의 카드가 있는데, 바로 덕후로서 결코 피하지 않을 최애 장르 판타지·SF다.
시인을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는데, 나를 책덕후로 키운 건 팔 할이 판타지·SF였다. 그런 내게 이번 달의 북클럽은 독자로서도 기대되는 한 달이었는데, 바로 『달러구트 꿈 백화점 2』와 『어둠의 속도』가 업데이트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판타지와 SF는 지금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꿈꾸는 장르라는 점에서 닮았다. 하지만 그 기반이 현실과 다른 세계를 향한 상상 그 자체에 있느냐 아니면 현재에 발 딛고 선 과학기술에 있느냐에 따라 차이를 지닌다. 이번에 소개할 책 두 권은 판타지와 SF의 장르적 문법에 익숙한 독자도, 그렇지 않은 독자도 모두 손쉽게 빠져들 만한 세계관을 가진 작품으로 함께 소개하고 싶다.
‘잠들어야만 입장 가능합니다’라는 말로 100만 독자들을 꿈의 세계로 이끌었던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우리가 잠든 뒤 펼쳐지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꿈 백화점’의 형태로 펼쳐낸 작품으로 사랑받았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조만간 호그와트 입학 허가서를 받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해리 포터 덕후에게 이 책은 매일 밤 잠들기 전 ‘오늘은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서 무슨 꿈을 고를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잠들기에 충분한 기대감을 심어주었다. 이번에 소개할 책은 이 책의 속편으로 어느 순간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 발길을 끊은 단골손님들을 다시 찾아가 그들의 마음속 고민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다.
매번 즐겁고 행복한 꿈만 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에 따뜻하고 평화로운 시간만이 존재한다면 얼마나 기쁠까. 하지만 일상의 스트레스가 꿈에도 쉽게 반영되는 나는 종종 반복해서 꾸는 악몽 같은 꿈이 있다. 이를테면 길을 잃고 헤매며 열심히 뛰어다니지만 끝끝내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는 꿈. 공부를 하나도 못했는데 갑자기 시험을 치러가는 꿈. 마감이 코앞에 닥쳐 허겁지겁 메일을 쓰고 거래처에 전화를 돌리는 꿈. 그런 꿈을 꾸다 깬 날이면 아침부터 벌써 피곤해서 하루를 살아갈 의욕조차 나지 않는다. 그런 날이면 상상하곤 하는 것이다. 볕 잘 드는 빨랫줄에 마음을 내걸어, 햇살을 머금은 이불처럼 보드랍고 뽀송뽀송 해진 마음으로 다시 한번 일어날 기운을 얻고 싶다고. 『달러구트 꿈 백화점 2』의 녹틸루카 세탁소는 지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따뜻한 상상력의 위로를 전해줄 것이다.
이처럼 『달러구트 꿈 백화점 2』가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상상력으로 잠깐 현실을 잊게 해 준다면, 『어둠의 속도』는 우리가 종종 현실에서 잊거나 치워버리곤 하는 존재들을 오롯이 직면하게 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이 책은 자폐스펙트럼장애의 치료법이 개발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마지막 남은 자폐인 세대인 루 애런데일이 회사로부터 ‘정상화 수술’을 강요당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자폐는 나 자신의 한 부분”이라고 선언하는 주인공 루는 자폐가 사라지더라도 과연 ‘나’가 ‘나’일 수 있을지,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을지 고민을 거듭한다. 이야기는 ‘정상’은 무엇이고 ‘비정상’은 무엇인지, 기술이 과연 질병과 장애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구원 일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마법사가 되고 싶다는 허무맹랑한 꿈이 아니더라도,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기를 갈망하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내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내가 아시아인이 아니었다면, 내게 장애가 없었다면, 내가 퀴어가 아니었다면 같은 상상들. 사람의 정체성은 여러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지만, 한 가지 정체성이 곧 나 자신을 대변하게 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될 때면 무너져버리는 마음 한 구석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어둠의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빠를지 몰라. 빛이 있는 곳에 늘 어둠이 있어야 한다면, 어둠이 빛보다 먼저 나아가야지.” 빛보다 빠른 속도로 도착한 어둠 앞에 세상을 긍정하고 나를 긍정하는 날이 올까 의구심을 지울 수 없는 순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의 속도』는 언제나 변화하는 스스로에 대한 가능성의 빛을 놓치지 않게끔 이끈다.
이번 달에는 북클럽에서 20권의 책을 담았고, 그중 4권의 책을 읽었다. 한 권은 아직 읽는 중이고, 2권은 일단 펼쳐는 봤다. 나머지 책들은 또 언제쯤 펼쳐볼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남은 책들은 뭐, 죽기 전엔 다 읽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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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