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당선된 직후 경희대 교정을 방문한 존 아이켄베리 석좌교수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국제질서에 대한 명료한 초점을 가진 거장의 깊은 눈빛이 전례 없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조커나 베인의 등장으로 고담 시티의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감지한 배트맨의 우울한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는 강연장에서 사회자인 내가 던진 포퓰리즘 질문에 어느 때보다 개방적 태도로 답변하려고 노력했다. 포퓰리즘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눈살을 찌푸리는 일반적인 미국 주류 학계의 지성들과 다른 열린 태도였다. 트럼프 쇼크가 내가 수년간 알던 아이켄베리 교수마저 바꾸어놓았다. 아직도 그때의 놀라움이 생생하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 출간된 그의 『민주주의가 안전한 세상』을 읽고 다시 한번 놀랐다. 아이켄베리 교수는 마치 다크 나이트 라이즈처럼 자유주의적 질서의 회복탄력성 구상을 들고 고담 시티에 귀환했다. 그의 문제의식은 시야 확대, 실천적 함의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흥미롭다. 첫째, 기존 저작들에서 상대적으로 그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던 분석의 차원이 강하게 도입되었다. 그는 근대성이라는 문명적 차원의 변수와 자유주의 질서의 중첩과 갈등을 더 세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배트맨에게 서구문명의 절멸을 추구하는 라스 알굴이라는 ‘근본악’이 충격을 던졌듯이, 그에게는 근대가 낳은 부작용과 심지어 그 부산물로서의 새로운 악(21세기 라스푸틴인 스티브 배넌의 배너니즘(?))이 영향을 미친 것처럼 보인다. 아이켄베리 교수는 과거의 계몽주의적 낙관주의의 자장에서 벗어나 신중하게 근대성이 야기한 경제와 안보 등의 복잡하고 상호의존적이며 부단히 난제를 낳는 불확정적인 세계를 수용한다.
둘째로 아이켄베리 교수의 회복탄력성 구상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고정관념을 흔든다. 흔히 수십 년간 세계에 (제국주의가 아니라) 제국적 질서를 부여한 이 세계관은 비록 때로는 냉정한 국가 이익 계산과 인권 방치로 비난받았지만, 내게는 대체로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이미지로 기억된다. 이 자유주의 질서는 때로는 세계를 평평하다고 단순하게 판단했고 때로는 중국과 러시아와 같은 비자유주의 국가가 점차 순치되리라 순진하게 믿었다. 오죽하면 마틴 인딕 이스라엘 주재 미국 전 대사는 미국 외교를 ‘해외에서의 순진함(Innocent Abroad)’으로 압축했을까? 물론 아이켄베리 교수는 여전히 자유주의 질서의 가장 큰 강점인 열린 가치에 대한 확신과 열정을 버리지 않는다. 개방성, 다자주의, 민주적 연대, 협력안보, 진보적 사회 목표 등 더 인간다운 자유주의 가치 말이다. 하지만 아이켄베리 교수는 더 인간다운 고담을 위해 배트맨이 국제법 질서를 무시하고 악당을 체포하듯이 현실에 냉정히 적응하려 한다. 그는 지구를 일원론적인 자유주의 모델로 전환하려는 충동을 완전히 버리고, 미국 국내 정치(중산층 위한 외교!)와 국제관계의 안정성(민주국가 블록의 견제력)에 더욱 주력하고자 한다. 이러한 보수적 경사는 곧 오늘날 바이든 행정부가 지닌 두 가지 핵심적 화두이다.
실용주의적 적응과 회복탄력성은 아이켄베리가 지적하듯이 자유주의 최대의 무기이고 그가 지닌 명민한 사고의 강점이다. 다만 과연 그가 믿는 것처럼 근대성이 제기하는 복잡한 문제들을 실용주의적으로 해결해나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세상은 근대성 시대 최적의 세계관이었던 자유주의가 대처할 수 없는 ‘뉴노멀’인지도 모른다. 비록 자유주의는 열린 진화의 여정에 있는 사상이지만 미국은 아직 (어쩌면 영원히) 취약한 ‘존재’들에 충분히 열려 있지 않다. 애초 자유주의 소프트웨어의 핵심 원리인 소유적 개인주의와 모든 존재의 동등성 충돌은 부단히 버그를 양산한다. 우리는 지금 자유주의 소프트웨어의 오작동과 이를 방어적으로나 공격적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더 위험한 권위주의 소프트웨어들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
이 소용돌이가 지나간 후 새로운 세상으로의 이행이 비자유주의적 기업 제국, 권위주의 연대 블록, 혹은 생태대(Ecozoic Era) 문명 블록이 될지 아니면 모순적 공존일지 우리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자유주의자 정치인들이 어떻게 탄력적으로 적응하거나 혹은 비틀거릴지를 알고 싶다면 단연코 아이켄베리의 이 이론서 『민주주의가 안전한 세상』을 읽어야 한다. 단순한 정책 처방이나 역사적 기술을 넘어 근대 문명론에서부터 세부 자유주의 제도론까지, 그의 깊은 시야와 흔들리는 고뇌는 지금까지 근대 자유주의가 빚어낸 최고의 숙성된 와인이다. 그 끔찍했던 아프간 철군과 새로 시작된 비극, 민주주의 정상회의와 다가오는 ‘신냉전’의 암운을 포착하고자 하는 이에게 이 책은 사유의 실마리를 풍부하게 제공해준다. 그의 2022년 고뇌와 화두가 벌써 궁금해진다.
한편, 위 도서는 미국의 국제관계 평론지 <포린어페어(Foreign Affair)>에서 '올해 최고의 책'에 선정됐다.
*존 아이켄베리(G. John Ikenberry) - 『민주주의가 안전한 세상』 저자 1954년 출생해 맨체스터대학교를 졸업하고, 시카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무성정책기획국, 브루킹스 연구소 주임연구원, 우드로 윌슨 국제센터 펠로우, 조지타운대학교 교수로 일했다. 현재는 프린스턴대학교 정치학과 국제관계론 석좌교수이다. 프린스턴 국제안보연구센터의 공동 소장이며, 경희대학교 석학교수이기도 하다. 최근 국제관계론 학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지난 20년간 이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저작을 배출한 학자 10위, 5년간 가장 흥미로운 저작을 배출한 학자 8위에 올랐다. |
*안병진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 - 서평 뉴스쿨 대학원(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로널드 레이건과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비교한 박사 논문으로 한나아렌트상을 받았다.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장, 총장실 정책실장을 역임했고, 현재 미래문명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미국은 그 미국이 아니다』 『미국의 주인이 바뀐다』 『트럼프, 붕괴를 완성하다』 『예정된 위기: 북한은 제2의 쿠바가 될 것인가』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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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진(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