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밤 늦은 시간까지 강변북로엔 정체가 심했다. 라디오에선 DJ와 초대 손님의 대화가 흘러나왔다. 청취자가 보낸 고민을 소개하고 도움이 되는 노래를 들려주는 코너였다. 이런 코너가 으레 그렇듯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사연이 이어졌다. 엄격한 아버지의 통금 시간이 너무 빨라 불만이라는 대학생,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취업 준비생, 회사 상사와의 갈등이 고민이라는 직장인, 그리고 다음으로 출산 후 우울증을 겪는 청취자의 사연을 소개하는 중이었다.
“요즘 우울증을 호소하는 분들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사실 주변을 보면 우울한 일이 많잖아요. 우울증을 겪지 않고 살기 어려운 세상인 것 같아요. 저도 자주 기분이 다운되는 편인데요. 그럴 때면 저는 일단 밖으로 나가요. 집에 혼자 있는 것보다 낫더라구요.”
“요즘 날씨가 굉장히 좋은데요. 일부러라도 나가서 산책을 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햇볕을 쬐며 걷는 게 기분 전환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구요.”
“네. 친구도 만나고, 맛집에 가서 좋아하는 음식도 먹구요. 지금과 같은 때일수록 그런 일상 생활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때로는 마음 먹기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하거든요. 이럴 때일 수록 나약해지면 안되겠죠. 귀여운 아기를 생각해서라도 기운 내셨으면 좋겠어요.”
“너무 힘들면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아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저희가 들려드리는 음악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활기찬 전주가 갑작스레 끊겼다. 라디오 스위치를 끈 것이다. 김유진 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택시 안에서 원하지도 않는 수다나 음악을 들어야 하는 건 고문에 가까운 일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스튜디오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진짜 우울증을 겪어본 적이 있을까. 마음 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내겐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잠시 정체가 풀리는 듯 하더니 택시가 분기점 길목에서 다시 멈췄다. 도로를 빠져나가기 위한 차들이 꼬리를 물고 늘어섰다. 옆 차선 승용차의 내부가 시선에 들어왔다. 운전석에 앉은 여자가 보조석의 남자 어깨에 손을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저들은 괜찮은 하루를 보냈을 것이고, 내일을 기다리며 잠이 들 것이다. 멀리 한강 다리가 보였다.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건 어떨까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차디찬 강물이 몸에 닿는 건 싫었다. 그녀는 유독 추위를 많이 탔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방법을 가리는 게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컴컴한 강물 속은 너무 춥고 무서울 것 같았다. 눈물이 나왔다.
택시 기사가 오디오 스위치를 만지작거렸다. 이번엔 라디오가 아니었다. 김유진 씨에게도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음악이 끝나자 택시 기사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제야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분기점을 빠져나온 택시가 교차로를 몇 번 지나고 정지 신호에 멈춰 서자 그녀가 말했다.
“기사님, 그냥 여기 세워주세요.”
아직 집까진 좀더 가야 했지만 지금은 걷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택시에서 내리고 보니 괜한 짓을 했구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지만 내가 하는 선택은 결국 항상 후회를 부를 뿐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걷고 있는데 자신만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 건너편 건물에 편의점이 보였다. 커피라도 마시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건널목 앞에 멈춰선 그녀의 시선이 편의점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이층과 삼층은 모두 불이 꺼져 있었는데, 삼층 구석에 유독 환하게 밝혀진 창이 보였다.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어요. 그래서 회사에 들어갔을 때 정말 기뻤고, 누구보다 더 열심히 했다고 생각해요. 일이 좋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매달린 적도 있었고, 성취감도 많이 느꼈죠. 입사 동기들 중에 가장 먼저 대리로 진급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의욕이 나질 않아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삼 개월 전에 부서가 바뀌었어요. 이전에는 마케팅 쪽이었는데 지금은 대리점을 관리하는 일이 주 업무가 되었어요. 이전 부서에선 제가 생각해 낸 아이디어가 가장 중요한 결과였는데 지금은 관리하는 대리점의 판매 실적이 중요하죠. 모든 게 수치로 표시되요. 이런 게 저랑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스트레스도 많구요.”
진료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김유진 씨와 의사가 마주앉아 있었다.
“제 성격도 문제인 것 같아요.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에게 뒤쳐지는 걸 싫어했어요. 남들보다 잘해야 해. 완벽해야 해. 그런 생각을 많이 했죠.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과가 좋지 못하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걸요.”
“그런 성격 덕분에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 아닌가요? 들어가고 싶었던 회사에 갔고, 일을 잘 해냈고, 인정받아 진급까지 하게 된 거잖아요.”
그녀가 설풋 웃었지만 의사의 말이 큰 위로가 된 것 같진 않았다.
“요즘은 어떤 기분이 들어요?”
그녀가 잠시 생각한 뒤 답했다.
“방에 갇힌 느낌 있죠? 창문도 없고 출구도 없는 방. 거기에 갇힌 느낌이 들어요. 이런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거든요. 갈수록 더 나빠질 거란 생각에 답답하고 짜증이 나요. 애초에 이 회사를 선택한 것부터 잘못이었던 것 같아요.”
“어떤 게 제일 힘든 지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요.”
“하루가 너무 길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또 보내야 하나. 해는 또 언제 지나 하는 생각부터 들어요. 저녁이 온다 해도 달라질 건 없지만요. 겨우겨우 하루를 버티고 집에 와서 멍하니 있다가 그냥 자는 거예요.”
“잠은 잘 자나요?”
“잠이라도 잘 자면 나을 것 같아요. 피곤하긴 한데 불을 끄고 누우면 잠이 달아나요. 침대에서 뒤척거리는 것도 너무 괴로워서 요즘은 소파에 앉아 그냥 케이블 티비 봐요. 아무거나 적당한 영화 틀어 두고. 제가 원래 영화를 좋아해요. 보면서 잘 울고. 근데 요즘은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이 안 나더라구요.”
“이전에 좋아하던 것들에 흥미를 잃어버리는 건 우울증의 대표적인 증상이에요.”
“제가…… 우울증인가요?”
“그렇게 보이네요.”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김유진 씨에게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부서가 바뀌고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해야하는 상황이 우울증을 불러온 거죠.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도 해요. 그만큼 흔하고, 누구에게나 올 수 있습니다.”
“사실 우울증에 걸린 게 아닌가 생각도 했었는데요. 다들 겪는 직장 스트레스로 나만 너무 유난을 떠는 것 같기도 해서 병원에 올 생각까진 못 했었어요.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좀 홀가분해지네요. 그럼 제가 정신과에 가야 하나요?”
그녀의 표정은 오히려 이전보다 편안해 보였다.
“그건 경과를 보고 다시 상의해보지요. 하지만 치료는 시작할 수 있어요. 그런데 오늘은 어떻게 병원에 올 생각을 했어요?”
“음악 때문인 것 같아요. 아베 마리아요.”
의사가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택시 안에 있는데 꽉 막힌 길이 꼭 제 처지 같은 거예요. 게다가 다른 차에 있는 사람들은 이 길만 지나면 다들 갈 곳이 있는데 나는 그렇지 않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눈물이 났어요. 그때 아베 마리아를 들었어요. 아마 택시 기사님이 제가 우는 걸 보셨나 봐요.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 음악이 마치 저를 위한 기도처럼 들렸어요.”
이 주일 뒤 김유진 씨가 반딧불 의원 진료실을 다시 찾았다. 세 번째 방문이었다.
“오늘은 기분이 어때요?”
“우울해요. 설마, 보름 만에 우울증이 완치되어 기분이 날아가야 하는 건 아니죠?”
그녀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불안한 말투로 물었다. 의사가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물론 아니죠. 그보단 시간이 더 걸려요. 하지만 작은 변화 정도는 생길 수도 있을 거예요.”
“부서가 바뀌는 건 흔한 일인데 저만 적응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제 자신이 한심하고 바보처럼 느껴지는데 고장 난 레코드 판 돌아가듯이 하루 종일 그 생각만 반복하는 거예요. 그게 제일 괴로웠어요. 그런데.”
의사는 그녀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어제 식당에 갔어요. 예전엔 자주 가던 곳인데 몇 개월 만에 간 거죠. 즐겨 먹던 메뉴를 시켜서 먹는데,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음식을 먹으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꼈어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이렇게 즐거웠었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더라구요.”
그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잘됐네요. 의지가 약해서, 성격에 문제가 있어서 우울증이 생기는 게 아니에요.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부르는 건 누구나 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기처럼 나을 수 있는 병이기도 하구요. 그렇다고 너무 쉽게 봐선 안 돼요. 감기는 혼자서도 이길 수 있지만 우울증은 치료가 필요하니까요.”
“정말 쉽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여기 처음 오던 날, 라디오에서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마음 먹기 나름이라고, 나약해지면 안된다고 하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만 먹으면 달라지는 건데 제 의지가 약해서 못하는 것 같고, 그래서 더 우울해졌거든요. 왜 흔히 그런 말 하잖아요.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당장 아픈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 도움이 안되는 것 같아요.”
“아프니까 청춘이라거나.”
그녀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맑은 웃음 소리에 맞춰 주변의 공기도 잠시 들썩였다. 한참을 웃던 그녀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아픈 게 당연한 것도, 참아야 할 것도 아니잖아요. 아프면 의사를 찾아 상담을 받거나 약을 먹어야죠.”
이번엔 의사가 피식 하고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지난 번에 회사에서 작은 거라도 새로운 일 한 가지를 해보라고 하셨잖아요. 제가 관리하는 대리점에 아이디어를 하나 드렸어요. 예전부터 제품 진열 방식만 조금 바꾸면 훨씬 좋을 것 같았는데 그동안 잊고 있었거든요. 대리점 사장님이 미처 생각 못했던 부분이라고 좋아하시더라고요.”
“김유진 씨 특기를 발휘한 거네요. 새 부서에도 그럴 수 있는 부분이 있어 다행입니다.”
진료가 끝나고 일어선 그녀가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머뭇거렸다. 의사가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죽을 만큼 힘든데 왜 그런지 이유도 모르고 그저 제가 문제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진단을 받고 나서는 치료를 할 수 있고 힘든 것도 나아질 수 있다는 생각에 희망이 생겼어요. 처음 왔을 때 우울증이라고 알려주시지 않았다면 지금도 창문 없는 방에서 울고 있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난 속에서부터 고장났다. 천천히 날 갉아먹던 우울은 결국 날 집어삼켰고 난 그걸 이길 수 없었다.” 2017년 자살로 생을 마감해 충격을 주었던 아이돌 그룹 샤이니 종현의 유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후에도 설리, 구하라 등 유명 연예인의 안타까운 죽음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 매일 서른 여덟 명이 자살로 사망하며, 우울증이 있는 경우 자살로 사망할 위험이 네 배까지 높아진다. 우울증의 국내 평생 유병률은 약 5퍼센트로, 우리나라 국민 백 명 중 다섯 명이 살면서 한 번은 우울증을 앓을 정도로 흔하다. 코로나19 판데믹 이후에는 우울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급격히 늘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OECD 발표에 따르면 판데믹 이후 전 세계적으로 우울 증상을 겪는 사람의 수가 두 배 늘었으며, 한국의 경우 36.8퍼센트로 비교 대상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치를 보였다. ‘우울감’과 ‘우울증’은 다르다. 일시적인 우울한 감정은 누구나 겪을 수 있다. 하지만 2주 이상, 거의 매일,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우울해하고 그로 인해 일상 생활에 지장이 될 정도라면 우울증을 의심할 수 있다. 우울증의 경우엔 우울한 감정 외에 부정적 사고, 의욕 상실, 집중력 저하, 불면증, 식욕의 변화 등을 흔히 동반한다. 우울증의 원인은 아직까지 정확히 모르지만 신경전달 물질 또는 그 수용체의 변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체의 질병과 마찬가지로 생리적 이상이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신경전달 물질에 작용하는 약물이 우울증의 주된 치료 방법이 되는 이유이다. 약물 치료와 심리 치료를 병행하면 대부분의 경우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지만, 우울증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에 치료 받기를 꺼리는 경우도 많다. 우울증은 마음 상태를 바꾸어서 해결할 수 있다거나, 의지가 약하거나 성격에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 우울증이 생긴다는 인식이 대표적인 예이다. 우울증에 대한 편견을 줄이기 위한 ‘마음의 감기’라는 비유는 치료에 대한 장벽을 낮추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하지만 감기와는 달리 우울증을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자살과 같은 가슴 아픈 결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우울증이 나아진 뒤 환자는 종종 병을 앓기 전보다 성숙해졌다고 느낄 수 있다. 치료 과정에서 가족의 소중함이나 일상의 즐거움을 새로이 느끼기도 하고, 삶을 돌아보고 인생의 가치를 찾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치료 이후 나타나는 결과일 뿐이다. 현재 우울증을 앓고 있는 상태의 환자에게 섣부른 조언을 하는 것은 오히려 상처를 줄 수 있다. 전문가들은 우울증 환자에게 긍정적 사고를 강요하거나 막연한 희망을 불어넣으려 하는 것보다는 공감하며 들어주는 것, 옆에 있어주는 것이 더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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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원(서울대병원 강남센터 가정의학과 교수)
가정의학과 의사입니다. 만성 질환 예방과 건강 증진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환자를 만나고 그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에세이 <반딧불 의원>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