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전, 나는 해외 출장을 밥 먹듯 다니는 사람이었다. 뉴욕, 파리, 런던 같은 대도시는 물론, 위치조차 가늠 안 되는 세이셸, 타히티 같은 섬나라까지 다녀온 나에게 친구들은 말했다. “너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냐?”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지는 모르겠고, 지금은 세계의 도시들을 떠돌던 불과 2년 전 그 시절이 전생처럼 느껴진다.
팬데믹은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다. 여행에 관한 욕심과 정보력만큼은 남들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던 나는 그동안 내가 알고 기억하는 여행에 대한 생각을 버렸다. ‘하와이 노스쇼어에서 서핑하기’, ‘아이슬란드 로드 트립’, ‘유카탄반도의 세노테에서 수영하기’, 나만의 구체적인 버킷 리스트도 제쳐뒀다.
나는 그저 하늘과 바다와 숲을 보며 누워 있을 것이다. 캐노피가 드리워진 침대에 누워 실링 팬이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을 것이다. 아침마다 쫑알대는 이름 모를 새소리와 오후엔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늦은 밤엔 풀벌레와 이름 모를 짐승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것이다. 저녁 무렵에는 슬리퍼를 끌고 자전거를 타고, 동네 슈퍼에 가서 차가운 캔 맥주를 몇 개 사와 후르륵 만든 국수와 함께 들이켤 것이다. 며칠 전 만난 현지인 친구 몇 명을 관객으로 앉혀두고 서툰 우쿨렐레 연주를 하며 내년엔 연주 실력이 일취월장할 거라고 호언장담할 것이다. 그곳은 지중해의 작은 섬나라여도, 발리의 우붓이어도, 일본의 소도시여도 좋다. 팬데믹 이전에도 해본 여행인데, 새삼스러울 게 뭐가 있냐 싶다. 다만 그곳이 어디인지, 나에겐 중요하지 않다는 것.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계획도 동선도 미리 짜놓지 않을 것이다. 그냥 낯선 곳의 공기와 시간과 촉감만 온전히 느끼는 여행. 평생 이런 여행을 할 수만 있다면. 내 인생의 남은 행운을 오로지 그 여행에만 쏟아부어도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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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연(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