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은 생애 첫 에세이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의 주제로 여행을 골랐다. 400쪽에 가까운 여행의 기록은 ‘정세랑 월드’ 안에 있다. 다정하고 따뜻한 세계다.
정세랑의 ‘첫’ 에세이예요. “여행책을 좋아해서 오래 소비해왔으니 한 권쯤 용기 내어 갖고 싶다”(9쪽)고 담백하게 밝혔지만, 소설이 아닌 에세이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분명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이야기의 조각들이 어디서 왔는지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아주 사소한 경험들을 씨앗 삼아 확장하고 연결해서 이야기로 만드는 과정을 슬쩍 보여드리면, 꼭 이야기가 아니라도 다른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지지 않을까? 제가 에세이를 읽을 때 그런 자극을 받을 때가 많았거든요. 아, 이 사람의 재료가 이것이었구나, 그런 것들이 다른 장르에 비해 잘 보여서요. 읽는 분들 안에 있는 아이디어들을 살짝이라도 깨우고 싶다, 그런 의도가 있었던 것 같아요. 여행의 기록은 보편적이면서 풍성한 재료니까요.
두 번째 글 제목이 「여행을 왜 즐기지 않느냐면,」이에요. 서툰 여행자임을 서두에 밝힌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가까이 지내는 여행작가님들이 많아서, 주제 파악을 빨리 했습니다.(웃음) 여행 전문가도 아니고, 많은 사람이 선택하는 평이한 여행지들에 다녀왔으니 아예 툭 내려놓고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여행을 그렇게 즐기지 않고 그걸 솔직히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호감도 있었어요. 여행은 대개 젊음과 건강의 상징이고, 좁은 동그라미가 그려지는 순간들이 있기에 여러 이유로 항상 열광할 수는 없었던 듯합니다.
2012년 5월, 퇴사하고 뉴욕으로 떠났어요. 케네디공항에서 L의 집으로 향하는 택시에서 ‘현타’와 마주해요. “평범하고 뻔한 내가, 흔하디흔한 이유로 뉴욕에 갔다.” 그 여행은 결국 구원이 됩니다. 어쩌면 이 책은 그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쓰였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목적 없는, 혹은 목적을 규정하지 못한 여행이 필요한 시기가 있는 것 같아요. 스스로를 새로운 환경에 노출시키는 것만으로 떠나온 곳에서부터 가지고 온 질문에 갑자기 답이 떠오를 때가 있었어요. 마음속이 질문으로 부글부글할 때 헤매고 떠나고 변화할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면 좋겠어요.
그 드라마 같은 일이 정세랑의 여행에서 실제로 일어나더라고요. 하인라인파크에서 ‘최대 가능성’을 발견한 순간은 특히 드라마틱하게 서술돼 있었어요. 또 다른 ‘그 순간’이 있었나요?
하와이의 쓰레기 없이 깨끗한 해변 모래에서 충격을 받았을 때도 비슷했어요. 수많은 사람이 다녀가도 이런 존중이 가능했구나, 동해를, 서해를, 남해를, 제주도를 이렇게 존중하고 싶다 생각했거든요. 아끼고 싶은 대상을 자세하게 아끼면 감각이 열리고 그런 순간들이 오지 않나 해요. 기회가 된다면 바닷가에 살면서 떠밀려오는 쓰레기들을 줍고 싶어요. 플로깅이라고 부르던데 해보고 싶더라고요. 허리가 안 좋으니까 긴 집게는 하나 있어야 할 것 같고, 모래에 푹푹 빠질 테니 달리기 연습을 미리 해둬야겠습니다.
역시 정세랑 월드, 이번 책에서 가장 많이 느껴지는 감정은 역시 ‘다정함’이에요. 여행을 더욱 다정하게 채우는 정세랑의 기술을 빌리고 싶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경험해야겠다는 강박을 버리기가 정말 쉽지 않더라고요. 여행지에 가면 2만5000보씩 걸어서 몸살이 나곤 합니다. 지치지 않았을 때 더 다정해질 수 있으니까, 어떻게 하면 더 머무는 마음으로 여백이 있는 여행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피프티 피플』에 정말로 50명을 등장시킨 정세랑이잖아요. 이번 책에도 정말 많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 여행의 이유는 명백히 친구 L이었고, 많은 여행의 순간이 사람을 중심으로 만들어져요. 그 사람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이 책이 400쪽이 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요. 늦게 완성한 이유는 책의 두께 때문이라고 둘러대려고요.(웃음) 사실 훨씬 긴 기록을 했지만, 제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한 순간들을 글에 고정시키면서, 내밀한 부분이 너무 드러나지는 않게 어디를 보여주고 어디를 가릴지 고민하며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친구들은 짧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지금 길을 잃고 서 있을 때 아무렇지 않게 길을 가르쳐주고, 고맙다는 인사도 대충 듣고 훌쩍 가버렸던 분들이 이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지내실지, 안전하게 계시면 좋겠다, 기원하게 됩니다.
소설가의 여행법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했어요. 정세랑 월드의 씨앗이 어느 도시에서 어떤 사람으로 인해 싹텄는지도, 소설가는 여행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도 알게 됐죠.
걸어 다니며 간략하게 메모하고 숙소에서 저녁에 쉬는 시간에 문장으로 정리해두곤 했어요. 단어로만 메모해두면 나중에 알아보기 어렵더라고요. 다녀와서는 간단한 몇 문장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 제대로 기록해두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순간들도 잊힌다는 게 슬픈 것 같아요.
여행자가 느끼고, 또 배제해야 할 혐오와 폭력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말해요.
눈에 띄는 외국인 입장이 되면 라벨이 쉽게 붙어서 상처받을 때가 많았어요. 아시아인, 아시아 여성에 대한 전형적인 편견을 맞닥뜨렸을 때 다른 사람에게 편견을 가지고 싶지 않다고 마음먹게 되었기에 불쾌한 경험도 의미가 생겼지만요. 한 사람을 온전히 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싶어요. 사람을 거칠게 요약하고 싶지 않아요.
400쪽에 가까운 두꺼운 책에서 꼭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문장은 역시 “플레인 와플을 시켜야 한다”(196쪽)일까요?
“쑥스럽지만 어떤 날, 우리가 함께 보냈던 짧은 낮과 길게 붙잡았던 밤이 나를 구했다고 친구에게 꼭 이야기하고 싶다.” 오늘은 이 문장을 고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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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