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에 듣기 좋은 음악 세 번째는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 죽음과 소녀 »입니다. 음악으로 표현하는 죽음과 현악 4중주가 자아내는 등골 서늘한 긴장감으로 뜨거운 여름을 잊어 봅시다.
슈베르트(1797-1828)의 현악 4중주 14번(D.810)에는 « 죽음과 소녀 » 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1824년에 작곡되었고 슈베르트가 죽기 바로 전 해인 1827년에 초연되었지요. 이 작품이 « 죽음과 소녀 »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이유는 슈베르트가 스무 살이던 1817년에 작곡된 동명의 가곡 선율이 2악장에서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현악 4중주를 듣기 전에 가곡을 먼저 들어 볼까요?
슈베르트, « 죽음과 소녀 », 피셔 디스카우 노래, 제랄드 무어 피아노
-소녀
가! 가 버려!
사라져 버려, 지긋지긋한 해골아!
난 아직 어리다고. 제발 가버려!
그리고 나를 내버려 둬!
-죽음
부드럽고 아름다운 창조물이여, 네 손을 내게 주렴.
나는 너의 벗, 그저 안심하기를.
두려워 말고 그냥 흘러가게 두렴.
천천히 다가와 내 품에서 잠들려무나
독일 시인,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1740-1815)의 시를 가사로 쓴 가곡, « 죽음과 소녀Der Tod und das Mädchen(D.531) »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소녀가 노래하는 불안하고 급박한 심리와 그를 유혹하는 ‘죽음’의 온화함이 대조를 이룹니다. 죽음을 향한 두려움에 매몰된 연약한 인간에 반해 ‘죽음’이 주는 평온함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소녀와 죽음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모두가 피하고 싶어 하는 죽음을 슈베르트는 다른 관점으로 그려 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노래하는 평화로운 멜로디는 동일한 음으로 거의 움직이지 않습니다. 내적 갈등이 없는 무위(無爲) 상태와 생기가 멈춰버린 죽음을 작곡가가 미묘하게 겹쳐 놓은 것이죠.
슈베르트의 또 다른 가곡인 « 마왕Erlekönig(Op.1, D.328) »에서도 비슷한 구도가 그려집니다. 눈보라를 뚫고 말을 달리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품에 안겨 마왕을 보고 두려움에 떠는 아이, 그리고 마왕이 부르는 노래는 얼핏 생각하면 마왕의 목소리가 가장 무섭고 거칠 것 같지만 그의 목소리는 « 죽음과 소녀 »에 나오는 ‘죽음’처럼, 부드럽고 온화하기만 합니다. 정작 거칠고 급박한 소리로 표현하는 이는 두려워하는 아이와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달리는 아버지예요. 슈베르트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인물의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이었습니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두려움, 피하고 싶은 거친 욕망, 그리고 모든 갈등이 사라져 버리는 종말을 향한 은밀한 동경 말이죠.
슈베르트, « 마왕 », 다니엘 노면 노래, 숄트 키노크 피아노, 제레미 함웨이-비드굿 영상
1827년, 슈베르트는 « 죽음과 소녀 » 주제를 다시 불러내어 현악4중주에 담습니다. 현악 4중주는 클래식 음악 중에서 쉽게 즐기기 힘든 어려운 음악에 속합니다. 오페라처럼 이야기가 있는 것도, 관현악처럼 다양한 음색이 섞인 것도 아니고 가곡처럼 가사를 가진 것도 아닐뿐더러 음색이 비슷한 네 대의 현악기만으로 음악을 이끌어 가야 하므로 자칫 잘못하면 지루하기에 십상이죠. 하지만, 작곡가에게는 최소한의 요소(바이올린 1, 2, 비올라, 첼로)만으로 완전체(4성부) 음악을 펼칠 수 있는, 간결하면서도 치밀하고 지적인 장르입니다. 또한, 전통적인 형식 구조를 따르면서도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자신의 개성을 최대한 실현할 수 있기 때문에 작곡가의 특징을 표본처럼 드러낸답니다.
« 죽음과 소녀 »를 표현하는 현악 4중주 14번은 가사 없이 기악으로만 텍스트를 표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덕에 더욱 풍성하게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2악장을 먼저 들어 보세요. 가곡을 먼저 들었으니 익숙하게 느껴질 겁니다. 더군다나 같은 주제를 변형해 반복하는 변주곡 형식으로 작곡되었기 때문에 동일한 선율을 다양하게 확장, 발전하는 음색을 즐길 수 있습니다.
아코스 현악 4중주단 실황 연주, 2악장부터
2악장 덕에 어느 정도 작품에 익숙해졌다면, 다시 1악장부터 들어 봅시다. 부드럽고 편안한 2악장과는 다른 아찔한 긴장감이 우리 귀를 사로잡습니다. 첫 음을 시작하기 전, 활을 들어 올리고 숨을 멈추는 연주자들이 만드는 정적에 주목하세요. 순간적으로 집중된 에너지가 폐부를 찌르는 첫 음으로 변환되어 소녀의 두려움을 표현합니다. 강한 리듬에서 터져 나오는 힘과 부드럽게 이완된 선율이 만들어 내는 대조와 균형의 축제가 1악장에서 펼쳐집니다.
아코스 현악 4중주단 실황 연주, 1악장부터
거친 긴장과 부드러움을 두 축으로 대조를 이루던 음악은 4악장에 이르러 죽음의 춤, 타란텔라(Tarantella)로 소용돌이치듯 빨려 들어갑니다.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빠른 3 잇단음표가 휩쓸어 가는 이 미친 춤곡은 듣는 이가 붙들고 있는 이성의 끈을 거칠게 흔듭니다. 그리고, 춤곡이 절정에 이를 때, 끈을 놓아 버리듯 춤곡이 끝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40여 분 동안 우리를 휘몰아친 음악이 끝난 후 찾아오는 정적은 한바탕 전력 질주를 한 후 피 맛 나는 숨을 고를 때와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두려움과 갈등이 사라져 버린 침묵의 시간 동안, 부스러기 조각처럼 남은 나의 감정을 추슬러 보세요. 내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희미한 환희를 경험할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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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혜
음악 선생. 한국, 미국, 프랑스에서 피아노, 오르간, 하프시코드, 반주, 음악학을 공부한 후 프랑스의 렌느 2대학, 렌느 시립 음악원에 재직 중이다. 음악 에세이 『음악의 언어』를 출간했다.
카민
2021.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