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허쉬>의 원작자이자, 조선일보판타지문학상과 백호임제문학상 수상작가 정진영의 신작 장편소설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이하 『엄마에게』)가 출간됐다. 이번 소설의 테마는 ‘어머니’다. 그간 소설 속 ‘어머니’라는 주제는 당위적인 사랑과 헌신의 존재일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엄마에게』에서 주인공이 어머니의 옛 흔적에서 발견하는 것은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시절’을 간직한 어머니의 삶, 그 자체다. 꿈을 품었던 소녀, 욕망을 가졌던 여인, 나름의 갈등과 고뇌와 슬픔과 좌절 속에서 삶을 일구어 왔을 한 개인적 주체로서의 ‘어머니’를 탐구한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주인공인 아들(범우)은 관계를 올바르게 정리하고 제대로 이별하는 법에 대해서, 그리고 누군가와 온전히 소통하는 법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엄마에게』를 통해 상처와 오해뿐인 가족사 속 ‘소통’을 이야기하는 정진영 작가를 만나보자.
소설의 출발점이 자살한 어머니를 AI로 재현해 다시 만나는 일이에요. 이런 아이디어는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요?
14년 전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늘 제 곁에 계실 줄 알았던 어머니와 아무런 준비 없이 이별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슬픔 속에서 어머니를 추억하는 나날이 오래 이어졌습니다. 놀랍게도 저는 어머니에 관해 아는 게 거의 없더군요. 어떤 음식을 좋아하셨는지, 어떤 노래를 즐겨 부르셨는지, 취미는 무엇인지...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유품 대부분을 태우거나 버렸는데, 일기장만큼은 차마 버릴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남긴 생생한 흔적이 담겨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차마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아 일기장을 오랜 세월 책꽂이에 꽂아둔 채 외면했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 속에서 겨우 빠져나오고 있는데, 그걸 보면 다시 슬픔 속으로 빠져들 것 같아 겁이 났거든요. 언젠가 내가 일기장을 펼쳐도 슬퍼지지 않을 날이 오면, 어머니를 소설로 되살려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제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겨우 일기장을 펼칠 용기가 나더군요. 그 속에는 제가 아는 ‘어머니’가 아니라 낯선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제 돌아가신 어머니의 나이와 가까워진 저는 한 ‘여자’로서의 어머니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해외에서 고인이 SNS에 남긴 흔적을 바탕으로 고인을 AI로 되살리는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라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어머니를 AI로 되살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고, 그 상상이 이 소설의 집필을 이끌었습니다.
데뷔작인 ‘도화촌 기행’은 판타지, ‘침묵주의보’ ‘젠가’는 사회적 사건, ‘다시 밸런타인’은 청춘연애 등으로 장르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이번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는 성장소설이자 가족소설이면서, SF적 소재인 인공지능(AI)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주요한 소재가 됩니다. 이처럼 다양한 장르를 오가는 데 특별히 의도하거나 생각한 순서가 있었나요?
저는 작품을 쓰기도 전에 다음 작품의 의도나 순서를 생각할 만큼 치밀하지 않습니다. 데뷔작이 조선일보판타지문학상 수상작이다 보니 처음에는 저를 장르소설 작가로 보는 시선이 많았습니다. 최근에는 언론 조직의 부조리를 다룬 ‘침묵주의보’를 원작으로 JTBC 드라마 ‘허쉬’로 만들어지고, 기업 조직의 부조리를 다룬 ‘젠가’도 드라마로 만들어질 예정이어서 그런지 이제는 저를 사회파 소설가로 보는 시선이 많아졌습니다. 사실 그런 시선이 그리 달갑지 않습니다. 저는 장르와 상관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풀어내고 싶을 뿐입니다. 틀에 박히지 않고 독자에게 흥미로운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독자에게 무슨 주제로 이야기를 써도 읽을 만한 작가라는 믿음을 주는 게 목표입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어머니입니다. 엄마 혹은 아내로서의 ‘순옥’보다 여자로서의 ‘혜진’을 발견하는 아들 ‘범우’의 시각이 조금씩 성장하는 것이 감동적입니다. 여기에 전 여자친구 ‘유민’과의 관계도 주변 설정 같지만 같은 맥락에서 성장해갑니다. 범우와 혜진, 유민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요?
모든 만남은 이별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건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잘 압니다. 현재 지구에 사는 사람 중에 100년 후에도 살아있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요.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이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갑작스러운 이별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후회하며 괴로워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이별을 생각해본 일이 없는데, 갑자기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들이 차례로 제 곁을 떠나가니 견디기가 어려웠죠. 만남에 언젠가 이별이 다가올 거란 걸 생각하고 산다면, 우리는 지금의 만남에 훨씬 충실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삶을 산다면 이별을 맞이하는 날이 오더라도 조금 덜 슬프지 않을까요. 이 소설로 독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 소설은 범우를 중심으로 어머니, 아버지, 전 여자친구와의 소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특히 ‘제대로 이별한다는 것’에 대해 여러 번 언급됩니다. 주변 인물인 AI 연구원 경선도 전 남편, 사산한 아이와의 관계를 통해 시사하는 점이 많습니다. 소설의 내용과는 반대로, 혹은 역설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 완전한 소통이란 불가능한 얘기가 아닐까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전한 소통이란 환상에 불과합니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요?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라는 게 더 솔직하지 않나요? 누구나 언제든지 스마트폰만 있으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세상입니다. 과거보다 훨씬 쉽게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이 됐는데도, 우리는 소통이 안 돼 답답하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저마다 듣기보다 말하기에 집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위를 보세요. 다들 존재감을 드러내려다 보니 경청하기보다 떠들기에 바빠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말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은 대체로 말을 잘 들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유재석, 오프라 윈프리가 대표적이지 않습니까. 소통의 시작은 결국 경청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경청을 잘하는 사람인지 의문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작품 후반부에 주인공이 어머니 AI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울컥’했습니다. 여러 나이대의 어머니와 번갈아 대화하며 화해하고 위로한다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생각하고 의도한 건가요? 그리고 실제로 이 정도 수준으로 AI와 대화할 수 있나요?
이 소설에 언급된 AI는 현재 기술로도 충분히 구현할 수 있습니다. AI로 구현된 여러 나이대의 어머니와 주인공이 대화하는 장면도 최근 들어 주목을 받고 있는 기술인 딥페이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딥페이크 기술은 지금도 온라인상에서 누구나 체험해볼 수 있는 기술입니다. 한 사람의 나이 든 모습이나 어렸을 때 모습을 추측하는 기술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활용돼 왔고, 지금은 스마트폰 앱으로도 누구나 체험할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세상이 훨씬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제가 소설을 쓰면서 참고한 책 중 하나인 제임스 블라호스 저 '당신이 알고 싶은 음성인식 AI의 미래'(김영사)를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현재 음성인식 AI 기술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이 책에 언급된 기술보다도 더 발전된 기술이 세계 곳곳에서 개발 중일 겁니다.
예전 작품도 그랬지만 글이 굉장히 속도감 있고, 또 빠르게 읽힙니다. 작가로서의 장점인데, 혹시 기자 생활이 그런 글쓰기에 도움이 되었나요?
일간지 기자로 일한 11년이 제 글쓰기 스타일을 굉장히 많이 바꿨습니다. 기사의 독자는 불특정 다수입니다. 따라서 기자는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을 구사해야 합니다. 기자로 일하는 동안에 독자를 먼저 생각하는 습관이 체화됐습니다. 기자로 일하기 전에 쓴 데뷔작 ‘도화촌기행’과 이후에 쓴 작품을 비교하면 같은 작가가 쓴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많은 차이가 납니다.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문장을 사용하면 가독성이 높아지고 자연스럽게 문장에 속도감이 생깁니다. 저는 서사가 소설의 전부이며, 한눈에 들어오지 않게 문장을 쓰는 건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의 제 문장이 좋습니다.
이제 5번째 장편입니다. 차기 작품은 어떤 것을 구상하시나요? 아직 발표되지 않은 작품 중 지금 작업 중이거나 계약한 작품이 있나요?
지난 봄 새 장편소설 초고를 마쳤습니다. 정치를 주제로 다룬 소설인데 내년에 출간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정치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는 꽤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치를 피상적으로 다룬 작품이 대부분이었고, 입법 과정에서 벌어지는 부조리를 상세하게 다룬 작품은 없었습니다. 이 소설은 그런 과정을 정밀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올가을부터 자전거를 주제로 다룬 경장편소설을 집필할 계획입니다. 저는 전국의 모든 국토 종주 자전거길을 달려 ‘그랜드슬램 메달’을 받았을 정도로 자전거 타기를 좋아합니다. 그동안 자전거를 타며 경험한 일을 바탕으로 웃기는 작품을 써보고 싶습니다. 그동안 너무 무거운 소설만 써온 터라 조금은 가벼워지고 싶습니다.
*정진영 1981년 대전에서 태어나 한양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음악을 만들고 소설을 쓰다가 얼떨결에 언론계로 발을 들였다. 편집부, 사회부, 문화부, 산업부 등 여러 부서를 거쳤지만, 음악 기자 시절이 제일 즐거웠다. 2008년 장편소설 『발렌타인데이』로 한양대 학보 문예상 대상, 2011년 장편소설 『도화촌 기행』으로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을 받았다. 장편소설 『침묵주의보』, 『젠가』, 『다시, 밸런타인데이』 등이 있으며, 백호임제문학상을 받았다. 『침묵주의보』는 JTBC 드라마 [허쉬]의 원작이며, 『젠가』도 드라마로 제작될 예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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