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선의 Desktop
유현선의 데스크톱 환경은 단출하다. 머물러있는 성향이 아님을 바로 알겠다. 작업창들이 잘 정돈된 가구처럼 짜여져 있는 대신, 진행할 일들이 얼기설기 메모되었을 뿐이다. 작업과 작업 사이로 휙휙 지나다닌다. 작업 책상도 마찬가지. 많지 않은 물건들이 정리되진 않았지만 또 흐트러지지도 않은 채 무심히 놓여 있다. 작업 속도에서도 아이디어를 신속히 생각 해내는 편이다. 온라인에서의 행보 역시 민첩하다. 한 사이트에 오래 머무르는 대신 하이퍼링크를 타고 서슴없이 유동한다. 꼼짝 않은 채 사색하거나 혈기 왕성하게 활동하기보다는 조용하게 흘러 다닌다.
유현선의 책 작업은 사진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왔다. 기술적인 메커니즘으로 대상의 실체를 가급적 품질 저하 없이 구현하기보다는, 강렬한 그래픽적인 성격이 부여되는 사진들을 다룬다. 이 세계에서는 이미지가 이야기를 이끌고, 현실과 유리되지 않은 채 그로부터 비어져 나오는 초현실적인 상상력이 만개한다. 유현선에게 사진의 ‘그래픽 처리’와 ‘보정’의 경계는 세 단계 정도의 스펙트럼을 가진다. 먼저 프로젝트 그룹 파일드의 전시 도록인 『파일드 SS 2020』의 한 펼침면을 보자.
합성 같지만 실사다. 현실 속에 이미 그래픽적인 세계를 연출해 그것을 사진으로 포착한다. 잡티를 지우는 등 보정 작업을 공들여 하기에, 물리적 세계의 노이즈 많은 현실과는 쨍하게 유리된듯 보인다. 왼쪽 사진의 경우, 사진이 프린트된 천에 난 구멍으로 모델이 자신의 뒷모습 위에 얼굴을 보이고 있다.
전시 도록 『박하사탕』에서는 조각 작품을 전시한 현장 사진에 상당한 그래픽적인 개입을 했다. 물리적인 세계와 인쇄되는 세계는 달라서다. 전시장이 환기하던 정서와 힘을 인쇄 매체에 ‘의역’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역설적인 존중에서 행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단행본인 『첫 번째 팝 아트 시대』.
대부분의 책 작업에서 디자이너는 이런 정도의 이미지 보정만 가한다. 원작을 직접 보지 않았으니 원본에 인쇄되는 이미지를 종속시키며 재현하기보다는, 책에 수록되는 이미지들의 전체 톤을 맞추는 데 신경을 쓴다. 책은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이미지의 시각적인 힘을 나르는 미디어이기도 하다. 유현선이 소장한 로저 밸런과 아스거 칼슨의 사진집 『노 조크(No Joke)』의 책장을 넘기니, 현실에 깃든 초현실적인 감각이 일상의 공기를 한순간 휘젓는다.
유현선의 Desk
인쇄물 역시 그래픽 디자이너의 수집 대상이다. 파일철에 빼곡하게 모아둔 리플릿과 각종 인쇄물은 디자인도 인쇄 상태도 온통 넋을 놓을 만큼 시각적 흥미를 돋우고, 특히 도쿄 시모키타자와에서 수집한 인쇄물들이 눈길을 끈다. 이런 자료들을 병치해보면서 작업의 영감을 얻는다.
유현선은 현재 디자인 스튜디오이자 출판사인 워크룸을 배경으로 일한다. 이곳의 테이블에 그가 디자인한 책들이 놓여 있었다. 둘러싼 책장에는 워크룸이 발간하고 소장한 책들이 의심스럽고도 만만치 않은 공력과 기세를 스멀스멀 흘려내고 있었다. 고요를 거스르는 기운이었다. 워크룸은 출판 문화 특유의 엄숙성과 보수성 속에서 창작자의 욕구를 적극 옹호하는 목소리를 지켜왔다. 자유롭고도 실험적인 디자인을 대형 서점의 매대에 올려놓았다. 책의 존재 영역을 확장하고 고리타분하게 낡아가지 않도록 싱싱한 활력을 불어넣는 힘, 이것이 지난 15년간 워크룸이 한국 북디자인에 해온 기여다.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 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 이렇게 자명한 가치에는 그 위세에 질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사진이 많은 책을 다루는 디자이너들은 이미지와 텍스트가 부딪힐 때 어느 한쪽을 위해 다른쪽을 양보하는 까다로운 판단의 기로에 선다. 이 둘은 트레이드 오프 관계여서, 전통적으로 문(文)을 숭상하는 책의 문화에서는 이미지 쪽이 생기를 잃고 양보하기 쉽다. 그러나 워크룸의 책들을 보면 앨런 튜링의 ‘반응-확산 모델’을 실마리로 이 관계를 다시 설정해보게 된다. 동물 무늬의 발현에 관계하는 활성자와 이를 소멸하는 억제자가 있어, 이 둘이 서로 반응하면서 호랑이와 표범 등 저마다의 무늬가 생겨나는 것이다. 확장하는 이미지와 수렴적인 텍스트는 ‘반응-확산’을 통해 어느 한쪽을 희생시키는 대신 다채로운 무늬를 책 디자인의 문화에 그려나간다.
유현선의 타이포그래피에도 시각적인 에너지가 거침없다. 본디 표지와 제목의 그래픽적 타이포그래피는 그림의 성격에 가깝고, 긴 본문의 텍스트적 타이포그래피는 글의 성격에 가깝다.
사진집 『무제 거울(Untitled Mirror)』의 지면 대부분은 카메라를 마주하는 모델들의 사진과 페이지 번호로만 이루어져 있다. 이 페이지 번호들은 숫자 폰트를 출력한 후 거울에 다양한 각도로 반사시켜 일일이 사진을 찍어서 디자인했다.
『고어 자본주의』에서는 산돌 카리스마 폰트를 더 드라마틱하게 조정해 책의 표지와 목차에 넣었고, 나아가 원문의 이탤릭체를 한글 본문에 옮기는 데에도 이 폰트를 응용했다. 유현선은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의 출판국장으로, 지금은 학회지 『글짜씨』의 디자인도 담당한다. 표제와 장 제목은 직접 레터링의 규칙을 만들어 변주해가고 있으며, 본문에는 각각 그레타산스와 아르바나 등을 적용했다.
최근에 출시된 폰트들에 가독성을 갖추어 매 호 조금씩 다르게 적용하는 이 학회지에는 타이포그래피의 기본 역량과 새로운 시도가 공존한다.
『첫 번째 팝 아트 시대』의 각주 처리는 특별히 흥미롭다. 왼쪽과 오른쪽 페이지의 두 색상이 한 세트를 이루는데, 각주가 페이지를 넘어갈 때 텍스트는 그대로 이어지는데도 색상은 달라져 있다. 글자들이 놓이는 판면을 말 그대로 공간적인 ‘면’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글자를 알알이 헤아리기보다는 전체 내용을 빠르게 간파하는 리듬의 독서 속도가 주어진다. 느긋한 신발을 신고 오솔길을 걷는 대신, 멋진 패션의 구두를 신은 기쁨으로 약간의 불편을 상쇄하고 대도시의 거리를 활보하는 듯한 독서.
이런 성격의 책을 열면, 기존의 책이라는 매체에서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의 세계가, 기이하면서도 현실의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 세계가 열린다. 일상의 공기가 싱싱하게 뒤척인다. 책은 정보와 사유와 텍스트도 나르지만, 소비적이고 강렬한 매혹도 실어 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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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원(디자이너)
글문화연구소 소장, 디자이너, 타이포그래피 연구자, 작가. 『글자 풍경』, 『뉴턴의 아틀리에』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