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무너졌다. 홀로 서울살이를 하며 회사생활 바쁘다는 핑계로 식사도 대충 때우며 살아간 지 10년이 훌쩍 넘은 시점이었다. 원인도 모른 채 찾아온 돌발성 난청으로 나는 오른쪽 귀의 청력을 심각하게 잃어가고 있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도, 조용한 카페에서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 건강하다 자부했던 나를 비웃듯이, 갑자기 들이닥친 그 병은 가뜩이나 예민한 나를 끝도 모를 불안감 속으로 밀어 넣었다. 치료를 하기 위해 처방 받은 스테로이드 약 수십 알을 들이부으며 부작용으로 울렁이는 속만큼이나 내 정신은 쇠약해져 갔다. 이대로는 정말 위험하겠다 싶어 회사에 병가를 내고 고향의 부모님 댁으로 도망치듯 내려갔다.
오랜만에 만나는 부모님과 먼지 한 줌 안 섞인 시골 고향집의 맑은 햇살은 패배자처럼 잔뜩 주눅이 든 큰딸을 다정하게 맞아주었다. 묵직한 나무로 만들어진 튼튼한 식탁에 앉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서울의 내 자취방에는 밥을 먹는 식탁이 없었다. 책상 겸 화장대에서 끼니를 때웠을 뿐. 음식의 대부분을 사 먹었기 때문에 집 안에 식탁을 들일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고향집 부엌의 커다란 식탁은 그 듬직한 존재감으로 ‘식사’가 삶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거라고 나에게 항변하는 듯했다.
“힘들었지? 아무 생각 말고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올라가거라.”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회사에 들어갔으니 거기서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여 있던 나에게 아빠가 해주신 말이 너무 다정하게 다가와서, 나는 되려 너무 울고 싶어졌다. 식탁에 앉아 덤덤한 부모님의 목소리를 들으니 내 정신을 잡고 있던 고집이 뚝 하고 끊어지면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자존심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 없이 식탁에 앉아 불안함을 쏟아내듯 꼴사납게 울고 휴지로 코까지 팽 풀고 나니 이상하게도 속이 시원해졌다. 식탁 위 하얀 접시에 놓인 가지 무침이 눈에 들어왔다.
그 가지는 우리 집 마당에서 자랐다. 봄에 가지 모종을 서너 개 사서 심었는데 여름이 되자 팔뚝만큼 큼직한 가지가 주렁주렁 열렸다. 시골 특유의 강한 햇살과 바람, 그리고 세찬 빗줄기를 맞으며 큰 통통한 가지에는 보랏빛 윤기가 흘렀고, 잘 씻어 뭉텅뭉텅 썰어내면 풀 냄새 섞인 달큼한 향기가 났다. 그렇게 실한 가지를 썰어 접시에 올리고 비닐을 씌운 뒤 전자레인지에 3분 돌리면 따끈따끈하고 부드러워졌다. 그 위에 엄마의 특제 양념장을 끼얹으면 가지 특유의 신선함과 옅은 짭조름함, 고소함, 달콤함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정말 맛있었다. 서울에서 배달 음식으로 맛보던 맵고 짜고 단 맛과는 다른, 위에 부담이 없는 반찬의 맛이었다. 내게 가장 필요한 약은 그런 건강한 집밥이었는지도 모른다.
시골 공기와 부모님의 사랑을 먹으며 3개월을 지내면서 내 상태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귀 상태도 많이 좋아졌지만 무엇보다 극심한 우울감에 빠져있던 내가 많이 먹고, 텃밭 식물을 가꾸면서 다시 빛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회사 복직을 앞둔 저녁, 엄마가 가지 양념장 만드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해서 기대하며 엄마 옆에 바짝 붙어 섰다. 간장을 네 숟갈, 매실청 한 숟갈, 고운 고춧가루 반 숟갈, 참기름 아주 약간 그리고 쪽파를 송송송 썰어 넣고 휘휘 저어준다.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는 나에게 엄마는 이게 완성된 양념장이라고 하셨다.
“이게 다야. 매실청은 엄마 아빠가 담근 거고 쪽파도 우리 텃밭에서 자란 거라 우리 집만의 맛이지.”
대단한 건 아니지만 우리 집만의 맛. 끝없는 우울과 불안으로 가라앉던 나를 건져 올린 것은 엄마, 아빠의 응원과 사랑, 그리고 부모님의 정성과 태양빛으로 열심히 자라준 우리 집 텃밭 작물들의 에너지였다. 나는 그간 식사를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 그저 입에 달고, 간편하고 배가 부른 음식들을 탐하면서 더부룩한 속을 부여잡고 건강을 망치며 지낸 건지도 모른다. 엄마의 특제 양념장을 곁들인 가지 무침은 내 스스로가 나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깨달음을 준 소중한 우리 집 음식이다. 내가 먹는 음식이 쌓여서 나의 건강을 만들어간다고 믿으며 나는 이제 밥을 짓는다. 서울에서 만든 가지 무침은 엄마의 요리만큼 맛있지는 않지만, 내가 나 자신을 돌본다는 다짐을 다시금 새기게 해주는 소중한 증표다.
박샛별 그늘을 살피고 삶에 즐거움을 주는 글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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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샛별(나도,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