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은의 무해한 말들] 무대 뒤에서 함께 만드는 변화
고양에 사는 나에게 김해는 꽤 먼 거리였지만, 거리감을 뛰어넘을 만큼 깊은 신뢰를 나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글ㆍ사진 홍승은(작가)
2021.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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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장유도서관에서 강연 섭외 메일을 받았다. 메일을 열어보니, 다정한 안부 인사와 간단한 자기 소개가 보였다. 강연을 기획하게 된 계기와 그 자리가 어떤 자리가 되면 좋겠는지에 대한 방향성이 적혀 있었다. 그 뒤로는 숫자를 붙여 강연 일정, 시간, 대상, 형식, 강연 장소와 강연료, 강연료 입금 일시가 차례대로 정리되어 있었다. 더불어 세 장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강연 장소를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나는 일정을 확인한 뒤에 바로 답장을 보냈다. “제가 더 질문할 게 없는 꼼꼼한 안내 감사합니다.” 고양에 사는 나에게 김해는 꽤 먼 거리였지만, 거리감을 뛰어넘을 만큼 깊은 신뢰를 나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강연이 확정된 뒤로도 꼼꼼함은 이어졌다. 강연에 필요한 기기와 물품이 무엇인지, 홍보 자료에 사진을 활용해도 괜찮을지, 책 글귀를 인용해도 괜찮은지, 어떻게 홍보할 예정인지, 강연 전후 식사는 어떻게 하는지 물으며 픽업을 해줄 수 있다는 내용까지 정리된 메일이 도착했다. 그때마다 나는 감격해서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내가 강연을 수락했을 때, 사서 선생님은 “바쁜 시간을 쪼개 먼 거리를 달려오시는 만큼 누가 되지 않도록 꼼꼼히 준비하겠습니다”라고 말했고, 그 말은 바로 앞에서 현실로 일어나고 있었다.

강연 노동을 하면서, 나에게는 꼭 필요한 서류가 생겼다. 지자체나 재단 지원 사업으로 강사료를 지급할 경우 대부분 이력서가 필요한데, 덕분에 나에게는 2016년부터의 강연 경력을 적은 강사 카드가 생겼다. 종이에는 내가 다녔던 여러 공간이 한 줄로 기록되어 있다. 리스트를 쭉 읽으면 그리운 장소와 얼굴들이 떠오른다. 무대에서 이야기를 나눈 경험만큼, 무대 뒤에서 경험한 일도 겹겹이 새겨져 있다. 그중에는 이번처럼 합이 딱 맞아 감격한 순간도 있고, 서툴지만 최선을 다해 좋은 자리를 만들려고 협동했던 기억도 있고, 조금은 찜찜하게 남은 기억도 있다.

어느 날 밤 11시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자마자 “글쓰기 수업을 해주면 좋겠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떨결에 알았다고 답하고, 메일로 내용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메일 내용도 전화 통화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하나하나 질문해야 했다. 대상이 누구인가요? 장소는 어딘가요? 강연료가 어떻게 되나요? 그 뒤로도 그분은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 전화해 강연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털어놓아서 나를 당황하게 했다. 몇 달 뒤, 같은 곳에 초대받은 동료 작가가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당시 문제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만약 내가 정확하게 말했다면 다른 강연 노동자가 당황할 일도 없었을 거고, 그도 다른 사람에게 모르는 새 무례해지지 않을 수 있었을 거였다.

한번은 경기도의 중학교에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성교육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교장의 반대로 강연 며칠 전에 인원이 스무 명으로 바뀌었다. 담당 선생님은 청소년 대상이니 자극적인 이야기나 정치적인 색을 조심해달라고 당부했다.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일단 알았다고 답하고 어느 정도가 허용될지 가늠하면서 내용을 정리했다. 결과적으로 무척 급진적인 이야기로 들렸는지 학생들에게 “자유로워진 기분이에요!”라는 피드백을 들었지만 말이다. 정치적인 색을 빼고 치우치지 않게 강연하라는 제안은 청소년 대상 강연뿐 아니라 공공기관이나 다양한 곳에서 자주 듣는 말이다.

여러 경험을 거치며, 나는 강연도 노동이라는 마음으로 섭외 메일 앞에서 당당하게 권리를 요구하기로 다짐했다. 그건 나를 포함한 동료 강연 노동자들, 그리고 섭외하는 상대에게도 필요한 경험일 거였다. 작년에는 한 공공기관에서 직원 150명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성 교육 섭외를 받았다. “너무 한 방향으로 치중되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이 문장 앞에서 ‘이 분은 내 글을 읽고 나를 섭외한 걸까’ 의심이 들었지만, 잠시 망설이다가 답장을 보냈다. “강연에 제 관점이 녹아있으니까 치우치게 보일 수밖에 없을 텐데, 저는 퀴어 페미니즘과 아픈 몸, 장애 등 차별에 대한 이슈는 모두에게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홍보 포스터에 작가의 학력을 기재하는 부분도 건의했다. “프로필에 꼭 학력이 들어가야 할까요? 그런 문화는 바뀌면 좋을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그러자 바로 답장이 왔다. “작가님 의견을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학력을 빼고 올려보겠습니다!” 나는 아주 작은 변화라도 만들었다는 사실에 기뻤다. 앞으로 그 기관에서는 작가의 학력을 기재하지 않을 거고, 페미니즘을 ‘편향적’이라고 수식하지 않을 거로 믿고 싶었다.

무대를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품이 드는지 알기에 처음엔 내 권리를 말하기가 조심스러웠다. 내가 너무 까다로운 걸까? 하지만 서로 존중하는 무대 뒤 문화를 일구는 과정도 내게 주어진 역할이라고 믿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은, 강연자가 마이크를 잡는 순간 이전의 모든 소통 과정에도 적용될 테니까. 나는 무대 뒤에서도 적극적으로 권리를 말하는 강연자가 되기로 했다. 그간 곳곳에서 강연 노동의 권리가 논의되면서 내가 굳이 묻지 않아도 노동 조건을 알 수 있는 섭외 메일이 늘고 있다. 누군가의 ‘말하기’ 덕분에 내게도 주어진 변화였다. 나는 앞으로도 당당하게 권리를 이야기하는 강연 노동자이자 그 자리를 준비하는 또 다른 노동을 알아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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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은(작가)

페미니즘 에세이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글쓰기 에세이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등을 썼다. 함께 해방될 수 없다면 내 자유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