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운드와 소재의 안락한 일체감, 이이언의 Fragile
앨범은 지금껏 다져온 세계관이 또 한 번 현 시류의 알고리즘과 영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도전이자 대답으로 보인다.
글ㆍ사진 이즘
2021.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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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언은 시간의 흐름에 솔직했다. 밴드 못(Mot)의 8년 공백을 깬 복귀작 <재의 기술>이 5인 체제의 확장된 편성으로 새로운 단상을 기획했듯, 그리고 가 각각 차가운 일렉트로닉과 따뜻한 어쿠스틱의 온도 차를 가져왔듯 맹목적인 스타일 고수보다는 시대에 적격인 방식으로 여유롭게 형상을 바꿔오곤 했다. 물론 용기(容器)가 다르다고 본질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에서 정교하게 제시한 우울과 공허의 세계관은 앨범과 앨범 사이를 잇는 주축을 수행하며 오늘날까지도 정체성의 기반으로 단단히 자리하고 있다.

9년 만의 솔로 앨범인 정규 2집 역시 이전과 동일하게 '죄책감'을 다룬 1집에 이어 비슷한 인간의 고질적 약점인 '연약함'을 소환하고 특유의 부연 잔향으로 분절된 악기 사이의 여백을 채운다. 다만 차이 면에서는 긴 공백만큼이나 간극이 드러난다. 우선 주된 어법은 트렌드를 적극 위시한 대중적 터치다. 이러한 선택은 최근 여러 유튜브 플레이리스트의 세례를 받은 언니네이발관 출신 이능룡과의 2인조 그룹 나이트오프 활동 경험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모던 록이나 트립 합, 일렉트로니카 등 당시 관심사에 따라 여러 작법을 오가던 유동적인 행보를 고려한다면 합리적인 결과물일 것이다.

방탄소년단의 RM이 참여한 첫 트랙 '그러지 마'는 그 양상을 집약한다. 무한히 늘어지는 전자음과 보컬 아래 격한 몰입을 유도하던 'Bulletproof'와는 달리 일반적인 팝의 문법이라 보아도 손색없는 보편적인 멜로디와 느릿하고도 익숙한 트랩 리듬, 그리고 한결 담백해진 창법이 자리를 대체한다. 음산한 피아노 도입부의 'Null'과 동화 속 기괴한 판타지아를 호출하는 'Mad tea party'는 비주류적 요소를 피력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에서 취하던 섬뜩한 전달법에 비하면 충분히 용인될 수준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성공적인 편입이다. 타 아티스트와 활발한 교류를 거친 이 세 곡은 우수한 합을 수행하는 것 외에도 앞으로의 시장 가능성을 해금한다는 의의를 가져온다.

다만 사운드 샘플 자체의 강도를 낮추고 진입 장벽을 낮추려는 대중성 지향의 일환 가운데 그를 상징하던 자기 침잠의 정서는 그저 나른한 무게감 정도로 순화된다. 여기서 장단점이 극명히 나뉜다. 최면을 거는 듯한 몽롱한 신시사이저 중심의 '어쩌면'과 '우리 함께 길을 잃어요'는 기존 팬층이 환호하던 모던 록 특유의 키치하고도 암울한 감성을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유약한 보컬과의 탁월한 시너지로 드림 팝의 푹신한 심상을 제공한다. 간단한 스타카토 발성의 '그냥'과 '세상이 끝나려고해'의 훅을 오마주한 간결한 라임으로 곡을 이끌어 나가는 '바이바이 나의 아이'는 독특한 박자감의 '5 in 4'나 '11 over 8'에서 나타나던 실험적 태도와 거리가 멀지만 복잡한 카타르시스보다 쉽고 캐치한 각인을 유도한다.

점층적 멜로디와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변칙성이 낳는 쾌감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에 비해 에 사용된 탐구 정신은 분명 덜하다. 다만 개개 트랙이 지닌 수려한 완성도는 물론, 사운드스케이프와 소재의 안락한 일체감은 비록 정체성 약화라는 명확한 핸디캡을 수반하더라도 팝적 작법을 택한 가치를 증명한다. 결국 앨범은 지금껏 다져온 세계관이 또 한 번 현 시류의 알고리즘과 영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도전이자 대답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이언은 그저 솔직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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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