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용의 아직도 고민] 새로운 사람을 만날 자격이 있을까요?
타인에게 조언해주듯 스스로에게 조언해주세요.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듯 내 마음을 헤아리고 따뜻하게 말해주세요. 너는 아픈 과거를 피하지 않고 부딪히며 이겨내고 있는 용감한 사람이며, 앞으로 좋은 이를 만날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라고 말이에요.
글ㆍ사진 김지용(정신건강의학과 의사)
2021.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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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에서 격주 화요일마다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아직도 고민’ 상담 칼럼을 연재합니다.

독자 분들의 사연을 받아 채택된 고민에 따뜻한 처방을 드립니다.

익명으로 신청이 가능하며, 간단한 소개(연령 등)와 함께 고민을 보내 주세요. 

chyes@yes24.com

언스플래쉬
독자에게 온 사연 

1년 반 동안 외상후스트레스, 우울, 불안 증상으로 병원 치료를 받고 있는 30대 후반의 미혼 여성입니다. 대학 졸업 후 취직해서 한 직장을 10년 넘게 잘 다니다, 5년 전쯤 직장 상사의 추행이 있었습니다. 상사는 제게 강요와 협박을 했고요, 저는 이 일로 너무 시달리다가 회사에 경찰이 출동하는 일까지 겪었고 노동부와 직장에 그 상사를 형사고소 한 상태입니다. 당시 상사에게는 회사에서 징계가 내려졌지만, 저는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져야했고, 많은 헛소문과 직원들의 시선에 지쳐 결국 휴직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고등학교 시절 유부남 교사에게 당한 성폭행까지 기억이 나면서 두 사건에 대한 악몽을 계속 꾸고 있어요. 

제가 궁금한 것은 제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되느냐, 입니다. 얼마 전 병원에서 상담을 받던 중 의사 선생님께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건강한 관계를 쌓는 것 역시, 중요한 치료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하셨거든요. 그러면서 제게 의사가 있는지 물으셨는데 저는 “만나고 싶다”는 답이 아니라 “만나야죠”라는 답이 나왔어요. 사실 사람을 만나는 게 무서워요. 좋은 사람이 아니면 어쩌나 걱정도 되고, 형사고소 사건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라서 저의 불안, 패닉을 감추고 만날 수 있을지도 불안하고요.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싫지만 저는 거짓말도 못하는 성격이고요.

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자격이 있을까요? 이런 상황이 다 마무리된 다음에 만나는 것이 맞을까요? 과연 어떤 마음이 들면 괜찮아지는 걸까요? 상담을 계속 받다 보면 정말 나아지는지도 궁금하고요. 

참고로 저는 제 감정, 의사 표현을 잘하지 못해요. 거절도 못하는 성격입니다. 상대에게 거의 다 맞춰주고 참는 성격이라 항상 ‘을’의 연애만 했습니다. 이러한 패턴을 고치고 싶은데 과연 가능할까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생기는 세상의 많은 일을 담담하게 반응하고 싶은데, 너무 힘이 듭니다. 선생님께 조언을 부탁 드려요.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처방전

많이 힘드시죠. 이렇게 너무도 안타까운 사연들을 접하다 보면 저 또한 세상이 야속하고 두렵다 느껴지는데, 독자분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요. 글에 남겨 주신 여러 생각들은 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반응이란 사실부터 먼저 말씀드리고 싶어요.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제각각 다르지만, 비슷한 상황에서는 특정한 방향으로 마음이 흘러가게 됩니다. 큰 상처를 겪은 후 다시 상처받을까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지 못하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심리 반응입니다. 

이 아픔을 가지고 진료실에 찾아오는 분들을 위로하고, 위로에서 끝나지 않고 해결책을 찾아 나가는 것은 어렵고 긴 과정입니다. 그런데 사실 답은 정해져 있지요. 진료실에 오시는 모두가 그 답이 무엇인지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미 알고 계세요. 

다만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너무도 힘든 것일 뿐. 상처받는 것보다 혼자를 택한 것은 일견 합리적인 해결책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절대 좋은 답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회적 동물인 사람에게는 필연적으로 다른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미성년자였던 먼 과거에 큰 상처가 있었음에도 이후에 사람들을 믿고 만나왔던 독자분의 선택 또한 이를 증명하죠.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어요. 예전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더 이상 아니라고. 현재의 나는 큰 두려움에 압도되어 진정 그 누구도 가까이할 마음이 없다고요.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분명 사람에 대한 긍정적 기대를 완전히 버리진 않았기에 지금 또 새로운 사람을 찾아가 믿고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거겠죠. 난 그런 적이 없는데, 무슨 소리인가 싶을 수 있어요. 

다름 아니라 지금 받고 계신 상담 치료가 그렇습니다. 저는 독자분과 같은 마음을 갖고 계신 분들께 종종 이렇게 얘기하곤 합니다. 사람을 만나기 두려운 지금에도 저를 만나러 오지 않으셨냐고, 처음 만나는 이에게 자신을 열며 가까워지는, 다시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과정을 이미 여기서 해내지 않으셨냐고. 이는 상처 준 것도 사람이지만 회복 역시 사람을 통해야 가능하다는 것, 결국엔 사람이 답이라는 것을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다시 상처받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새로운 만남을 실천으로 옮겨낸 당신은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말이죠.

그럼에도 계속해서 망설여질 거예요.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을 만날 자격이 없다고 느껴져서 말이죠. 글의 서두에 말씀드렸듯 이런 마음은 큰 상처에 따른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하지만 옳지는 않아요. 자격이 없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그건 느낌일 뿐 진실은 아닙니다. 그렇게 느끼게 되는 마음에는 공감하지만, 그렇다고 동의할 수는 없어요. 

제가 정신과 의사의 입장이라서 고집부리는 것이 아니에요. 한 번 상상해 보세요. 독자분과 같은 일을 겪고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된 친구가 있다면 그에게 어떤 말을 해주게 될지. ‘그래, 안타깝지만 내가 보기에도 넌 자격이 없어. 혼자 지내는 게 맞겠다.’ 설마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겠죠. 운 없게 나쁜 이들을 만나 벌어진 것일 뿐 네 탓이 아니라고, 세상엔 좋은 이들이 훨씬 많다고 말하게 될 거예요. 그런데 이 너무도 당연한 말을 왜 내게는 해주지 못할까요? 그 누구보다 소중하고 아껴야 할 내 마음인데 말이죠. 

『2인조』를 쓴 이석원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결코 잃을 수 없는 내 편이 하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종종 잊은 채로 살아가지만 모두 내 안에 또다른 나를 하나씩 갖고 있고, 그러므로 날 때부터 2인조”라고.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왜 힘들고 아팠을지 계속 고민하던 중 이런 깨달음을 얻습니다. 항상 나보다 남을 우선시하며 살아온 그간의 방식은 나를 지킬 수 있는 길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를 사랑하는 길은 아니었다고. 중요한 건 나를 사랑하는 일이었는데, 그걸 너무 모르고 살았다고. 

독자분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요. 

항상 내 감정보다 상대방을 먼저 신경 쓰며 살아오셨죠. 이제는 과거와 다르게 내 마음을 우선적으로 챙겨야 합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먼저 나 자신을 챙기고 사랑해줘야 타인에게도 사랑받을 존재라고 여기게 될 수 있어요. 어떻게 대하는 것이 나 자신을 아끼는 것일지 잘 모르겠고 어색하실 거예요. 하지만 이미 방법은 알고 계세요. 타인을 위로하듯 스스로를 위로해보세요. 타인에게 조언해주듯 스스로에게 조언해주세요.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듯 내 마음을 헤아리고 따뜻하게 말해주세요. 너는 아픈 과거를 피하지 않고 부딪히며 이겨내고 있는 용감한 사람이며, 앞으로 좋은 이를 만날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라고 말이에요. 



어쩌다 정신과 의사
어쩌다 정신과 의사
김지용 저
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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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용(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책 <어쩌다 정신과의사>를 썼고 팟캐스트 <뇌부자들>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