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름다움을 오해하고 있다
인간은 쓸모 이상의 쾌락과 위안을 원한다. 영양만이 아니라 미각과 시각을 만족시킬 음식을 찾고, 실용성 이상의 멋진 옷을 찾고, 작은 문구류 하나도 예쁜 것을 고르려 한다. 기원전 5000년경의 문명에서도 인간은 그릇에 문양을 넣고 각종 장신구를 만들었다.
아름다움은 이러한 ‘장식’ 정도로 오해받곤 한다. 겉치레, 꾸밈, 허영, 사치 등으로 폄하받는다. 특히 가부장제-자본주의 사회에서 꾸밈은 여성의 몸을 점점 상품화해왔으며 머리카락 한 올, 손톱 하나까지 영토화한다. 여성의 꾸밈 노동은 성차별의 산물이지만, 나이/장애/성정체성 등을 생각하면 그렇게만 볼 수도 없는 복잡한 면이 있다. 더구나 여성에게는 ‘뚱뚱함’도 강력한 정체성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여성의 몸에 따라 미니스커트는 구속이 아닌 도전이 된다. 꾸밈을 둘러싼 담론은 고정적이지 않고 사회 문화적으로 계속 변한다. 실크 스타킹에 하이힐을 신은 18세기 프랑스 루이 14세의 꾸밈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꾸밈은 계층과 무관한 적이 없었다.
‘내면의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거북하게 여기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 가진 권력과 정치적 문제를 오히려 단순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면과 내면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는 아름다움을 더욱 오해받게 만든다. 겉으로 드러나는 미는 속임수, 가짜가 된다. 아름다움을 이렇게 가볍게 만든 후 이를 여성성과 연결 짓는다.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이 헝클어진 머리를 보여주는 것은 나름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이미지를 연출한다는 해석도 있다. 그럴 법하다. 같은 보수당이었던 테레사 메이나 데이비드 캐머런이 보여준 세련됨과는 달리 그는 적극적으로 차별화된 모습을 보인다. ‘일하는 남자’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패션에 관심 없어 보이도록 연출한다. 이런 전략은 점점 더 ‘계집애 같은’ 인간들이나 꾸민다는 인상을 준다. 아름다움은 그저 얄팍한 유행이며 불필요한 소비를 낳는 성질로 전락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과 혐오는 어떻게 정치화되는가
몇몇 연예인들이 수상 소감에서 ‘선한 영향력’을 언급하면서 이 표현은 대중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선한/악한이라는 구도를 대체로 경계하고, ‘영향력’이 때로는 권력을 순화시켜 일컫는다는 의구심 때문에 나는 이 표현에 호감을 느끼지 않는 편이다. 그렇지만 타인에게 되도록 ‘선한 영향력’을 끼치겠다는 마음을 너무 곡해하고 싶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이 표현에 호감을 갖고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현상에 더 눈길이 갔다. 실제로 ‘선한 영향력’이 발생하는지와는 별개로, 인간에게는 타인의 좋은 행동을 모방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과 정의로움에 대하여』에서 일레인 스캐리가 말한 “낳기를 향한 추동”이 이러한 현상과 연결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리는 멋진 풍경을 볼 때 ‘그림 같다’고 말하며 사진을 찍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좋아 보이는 행동을 모방하려고 하듯이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이나 그림으로 복제하고 싶어 한다. 오늘날 SNS는 이 사진들을 타인에게 전시하도록 부추기지만, SNS가 없던 시절에도 그저 개인의 사진첩에 꽂히는 아름다운 풍경 사진들은 존재했다. 이는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소유욕이면서 동시에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이다. 아름다움을 대상화하여 이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바라보는 주체와 응시의 대상을 권력 관계로 만든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아름다움에 대한 일레인 스캐리의 주장에 나는 온전히 동의하지 못한다. 응시의 권력은 인간과 자연, 남성과 여성, 인간과 동물 사이의 위계와 너무도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름다움이 실제로 진리와 연맹을 맺고 있다는 견해를 제출하려고 노력”하는 일레인 스캐리처럼 나 역시 이 관계를 놓을 수가 없다. 아름다움을 포획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주체와 공존하려는 열망이 가진 긍정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을 때 조금이라도 덜 상처주며 다른 주체와 함께 살 수 있지 않을까. ‘공정한’을 뜻하는 영어 fair에는 ‘아름다운’을 뜻하는 beautiful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실제로 이 두 가지가 본질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겹침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내게 ‘아름다움’은 비정치적인 낭만적 수사가 아니다. ‘장미’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정치적 행동을 낳는 언어이다.
어떤 감정이나 생각을 욕으로 뱉어버리기 시작하면 언어를 고르는 습관, 서사적 상상력에서 점점 멀어진다. ‘생각하기’보다는 그냥 ‘뱉어내기’가 더 쉽다. 때로는 이런 태도를 대중적, 서민적, 민중적이라고 하면서 미화한다. ‘민중’의 언어에 대한 모욕이다. 욕설은 통쾌함은 줄지언정 ‘적극적으로 생각하기’를 방해한다. ‘시바’를 제 언어의 사인처럼 여기는 언론인과 시인, 팬덤 정치에 일조하고 내편 뭉치기에 혈안이 된 반지성적인 ‘지식인’들의 언어는 혐오에 저항한다기보다 혐오를 자원으로 삼는다. 이러한 언어들은 아름다움을 누리거나 생산하고 싶은 인간의 욕구를 뭉개버린 채 자극적인 어휘에 낄낄대도록 만든다. 보리스 존슨이 의도적으로 연출하는 엉망진창처럼, 의도적으로 상스런 말을 쓰는 사람을 경계한다. 게다가 솔직하고 털털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상스러운 언어를 입에 달고 사는 남성들은 그 세계에서 여성들을 대상화한다. 그렇게 ‘진보 마초’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아름다움은 분배와 돌봄이다
아침 산책길에 만나는 철새 왜가리를 통해 계절을 구체적으로 인지한다. 그들은 내가 인간중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타자다. 늦가을 나타난 왜가리는 초봄이 지나자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날아오르고, 먹이를 잡기 위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중하고, 가는 다리로 가볍게 걷는다. 해변이 당연하게 인간의 장소가 아니듯 내가 즐기는 산책로도 인간 주민의 전용 장소가 아니다. 성장과 개발이 벌인 많은 착취 중 하나가 아름다움의 파괴이다. 희귀종 생물 목록이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 아름다움이 희귀해진다는 뜻이다.
해마다 피어나는 꽃을 보고자 하는 욕망은 ‘살아있음’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은 단지 살아있음을 구경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타자를 살리려는 행동을 끌어낸다. 그렇기에 배가 고픈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시들해지는 꽃에게 물을 준다. 슬픔과 분노가 행동으로 이어지는 추동력이 된다면, 아름다움의 추구는 생명에 대한 관심으로 이끈다. 이 사소한 마음이 정의의 씨앗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사소한 마음을 파괴한다. 아이들이 만든 눈사람을 누군가가 부숴버렸을 때 우리는 왜 분노하는가. 아름다움을 파괴하고자 하는 행동에서 폭력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눈은 생명이 아니지만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었을 때 이 눈덩어리는 개성을 얻는다. 이 개성을 파괴하기. 그것이 폭력이다.
KBS <환경스페셜>에서 제주도 제2공항 예정지로부터 8km밖에 떨어지지 않은 하도리의 철새 도래지를 소개했다. 큰 카메라로 새들을 찍는 작가는 화면 안에 담긴 새들을 보며 “노랑부리 저어새 한 마리, 저어새 여섯 마리, 그리고 재갈매기 한 마리”라고 이름을 말해준다. 해마다 30여 종 5000여 마리의 새들이 찾아온다는 철새도래지를 그는 “새들의 국제공항”이라고 말했다. 이 한 마디에 나는 인간이 무엇을 파괴하는지 구체적으로 깨달았다. 인간 중심을 벗어나 새를 바라보는 마음이 있기에 가능한 표현이다. 이 표현은 정확해서 아름답다.
“새들의 노래나 시에 대한 여유가 또한 있지 않다면, 아름다운 토론이라고 해도 어떻게 그 토론의 뉘앙스를 듣겠는가?”라고 반문하던 스캐리의 주장은 관념이 아니라 이렇게 현실 정치에서 나타난다. 아름다움이 자본화되고 왜곡될수록 인간은 세계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폭력적 존재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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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영(예술사회학 연구자)
프랑스에서 예술사회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며 예술과 정치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여자 사람, 여자』(전자책),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