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조악한 무대 위에서, 그리고 얼마 되지도 않고 냉소적이기까지 한 어린 관객들 앞에서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라는 듯한 그의 에너지에 감화되고 말았다. 저 사람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이 축제의 어설프고 키치하고 우스꽝스러운, 그러니까 ‘K스러운’ 부분을 찾기 위해 약간의 삐딱함을 장착한 채 두리번거렸던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마저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칠순잔치만도 못한 동네 축제”겠지만(이는 이 축제에 관한 어떤 이들의 불평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이 축제가 중대한 장소, 중대한 순간일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 마술사에게는 그런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오은의 옹기종기> 오은입니다. 김혼비, 박태하 작가님의 책 『전국축제자랑』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정념과 관성이 교차하는 한국의 지역 축제를 찾아다니며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K스러움’을 목격하는 김혼비, 박태하 작가님. 그러나 두 작가는 그 안에서 분명하게 빛나고 있는 불꽃 같은 순간들 또한 섬세하게 발견합니다. 마술을 믿지 않는 어린이들에게 정성껏 풍선 인형을 만들어주는 마술사의 모습처럼 말이죠. 그리고 말합니다. “축제를 통해 방문했던 지역들은 유독 사람들로 기억에 남았다.”라고요. 오늘 <책읽아웃 - 오은의 옹기종기>에 김혼비, 박태하 작가님을 모시고 한국의 지역 축제를 한바탕 돌아볼까 해요. 많은 기대 부탁드려요.
<인터뷰 – 김혼비, 박태하 편>
오은: 오시자마자 기분 좋은 소식이 들렸습니다.
김혼비: 네, 『전국축제자랑』이 오늘 2쇄에 들어갔다고 해요.
오은: 김혼비 작가님께서 <김하나의 측면돌파> 출연 당시, 책이 큰 사랑은 받았지만 많은 사랑은 받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었잖아요. 그런데 벌써 2쇄라면 곧 많은 사랑에 당도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네요. 오늘은 김혼비 작가님의 책에 늘 ‘T’로 언급이 되던 박태하 작가님도 함께 하셨어요. 박태하 작가님은 2쇄 소식, 어떠셨나요?
박태하: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다니, 싶고요. 편집자 분께 수정 사항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는데요. 제가 편집자다보니 뭔가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잠시 직업병이 발동했어요.(웃음)
오은: 김혼비 작가님 먼저 소개를 해드릴게요. “작가. 퇴근이 너무 좋아 출근하는 직장인. 인생의 3원색을 책, 술, 축구라고 말하는 사람. 귀신을 아주 무서워하면서도 『오싹오싹 공포체험』 같은 책들을 무척 좋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내리 반장을 했다. 큰 키와 작은 동네가 빚어낸 연쇄작용의 결과였다. 손으로 하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재주가 없지만 몸으로 하는 것은 잘했다. 피구왕이었던 김혼비의 공을 피하기 위해 친구들은 일부러 금을 밟았을 정도.
전방위 글쓰기를 좋아했고, 한때는 <다모> 팬픽을 쓰기도 했다. 매사 두괄식이기보다 미괄식인 인간이었다. 블로그에 서평, 에세이 등을 꾸준히 써오던 중 블로그가 ‘흥했고’, 그의 축구 일지를 본 한 회사에서 칼럼 제안을 해왔다. 마침 닉 혼비라는 이름이 세 글자였고, 마침 축구 에세이 『피버 피치』를 쓴 작가였고, 마침 자신이 닉 혼비처럼 축구광이기도 해서 세 개의 ‘마침’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김혼비라는 이름을 거의 2분 만에 지었다. 칼럼은 <릿터> 연재로 이어졌고, 첫 책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20대 초까지는 야구팬이었는데 우연히 호나우두의 아름다운 플레이에 반해 축구에 열광하게 됐다. 역시 미괄식으로, 그렇게 K리그 팬이 되고, 축구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10년 이상 고수하던 긴 머리는 축구를 시작하며 과감하게 숏컷으로 잘랐다. 축구공을 따라 뛰다 보면 시간은 거꾸로도 흘렀다. 30대 초반에 비해서, 중반에 비해서, 마흔 즈음의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 몸이 되었는지 자주 생각한다. 축구를 해서 가장 좋은 점은 잘 싸우게 된 것이다. 와일드푸드파이터 동메달리스트. 반주를 즐기고, 마트 구경을 좋아한다. 대추를 무척 좋아해 길에서 대추가 눈에 띄면 사 먹을 정도다. 김밥에 소주, 떡볶이에 레드와인, 1년에 한 번은 소주에 딸기맛 츄파츕스 먹는 것을 즐긴다.
남는 게 없는 시간 보내는 것을 싫어한다. 가장 두려운 것은 남에게 충고를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고 믿지만,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되어가는 걸 모르고 사는 것이다. 김솔통 같은 글을 쓰고 싶다. 꼭 써보고 싶은 책은 인터뷰집. 만약 단 한 사람의 능력을 고스란히 가질 수 있다면 ‘더글러스 애덤스’의 글 쓰는 능력을 고를 것이다. 버킷리스트는 1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철학공부만 파는 것. 어글리해질 수 있고, 어글리해질 수밖에 없고, 어글리해지기 마련인 상황에서 자신과 상대를 구해낼 수 있는 사람을 존경한다.” 반장을 오래 하셨네요. 제가 아는 김혼비 작가님은 어떤 일을 주도적으로 하는 것도 같지만 보통은 마지 못해 하시고, 어떤 경우에는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인데 말이에요. 이런 성격이 반장이라는 직책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김혼비: 반장도 사실 마지 못해 하게 됐는데요. 한 번 반장을 하면 ‘쟤는 반장감이야’라는 믿을 수 없는 신뢰가 생기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막상 반장을 하라고 하면 안 하겠다고 하는 게 저의 내향적인 성격에 오히려 너무 힘든 거예요.(웃음) 많은 아이들 앞에서 안 하겠다는 얘기를 길게 해야 할 텐데 그럴 용기를 낼 수가 없어서 어쩌다 보니 계속 반장을 하게 됐어요.
오은: 이제 박태하 작가님 소개를 할게요. “편집자. 작가. 축구는 ‘잠재된 공간의 미학’에 관한 스포츠라 말하는 사람. 초등학교 수련회에서 캠프파이어를 할 때면 부모님 은혜에 대해 생각하긴 했지만 딱히 눈물까진 안 나오고, 솔직히 좀 지루해 하기도 했던 어린이였다. 늘 축구 하는 것을 좋아했다. 고등학교에서는 축구동아리 활동을 했고, 그때부터 종종 k리그를 보러 다녔는데 결정적인 입덕 계기는 2002년 월드컵 3-4위 전이던 터키전 때였다. 이후 약속을 잡거나 개인 일정을 짤 때는 성남FC의 경기 일정을 가장 먼저 고려하는, 진정한 한 해의 시작을 시즌 개막으로 인지하는 ‘직관주의자’이자 K리그 마니아가 됐다.
황의조 선수는 성남FC를 향한 박태하 마음의 방아쇠를 당기게 해준 존재다. 첫 책 『책 쓰자면 맞춤법』에 수록 예문을 성남FC와 황의조 선수 얘기로 도배한, 김혼비를 축구의 세계로 인도한 장본인. 박태하는 민주노동당 소속 축구팀에서 스트라이커로 활동하기도 했다. 축구 유니폼을 입고 웨딩사진을 찍었고, 신혼여행으로 간 아이슬란드에서 인구가 4,500명인 섬에 들어가 1부리그 경기를 직관하기도 했다.
소설이나 웹툰을 볼 때도 내 안의 편집자가 튀어나오곤 하는, 노래방에서 두 곡만 불러도 목이 쉬어버리는 사람. 어딜 가도 뻘쭘해하기 일쑤이며, 언제나 언더독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인데 어떤 감정이 와서 흔들 때 보면 그것은 언제나 ‘마이너리티’였다. 매끈하고 잘 굴러가는 세계에는 크게 매력을 못 느끼는 편이다. 물건에 과하게 이입하는 사람이기도 한 박태하는 자취 시절을 함께한 냉장고를 버릴 때도 울컥, 창고에서 꺼내 씻다가 날개가 부러져 버린 10년 된 선풍기를 버릴 때도 울컥하고 말았다. 자취 시작할 때 쓰던 낡은 냄비, 김혼비와 연애를 시작할 때 김혼비가 기약 없이 외국에 나가면서 사준 프라이팬도 못 버리고 다 모아 놓았다. 그런 성향 덕분에 박태하와 김혼비의 집에는 커다란 캐리어가 두 개나 있다.” 축구를 ‘잠재된 공간의 미학’에 관한 스포츠라고 말하시는 분이에요. 축구가 다른 스포츠와 비교해 더욱 그런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지 듣고 싶어요.
박태하: 운동장 크기에 그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농구도 정해진 목표점이 있고, 사각의 필드에서 공을 운반해 갖다 놓는 것은 같죠. 그런데 공간이 좁다 보니 순간적인 움직임이 중요해요. 결정적으로 공을 골에 넣을 때도 슛의 정확성이 굉장히 많이 작용하고요. 반면에 축구는 빈 공간을 어떻게 찾아 들어가느냐, 또 그 공간을 어떻게 막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마치 땅 따먹기 하듯이 공간을 자기 몫으로 살살 가져오고, 주도권을 잡아가면서 골 넣을 확률을 높이는 느낌이어서요. 그 공간성이 축구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오은: 이제 『전국축제자랑』을 작가님께서 직접 소개해주는 시간이에요. 김혼비 작가님께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김혼비: 수도권, 지방 광역시,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 가운데 12곳의 축제를 돌아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쓴 여행기 혹은 에세이입니다.
오은: 저는 두 분의 책을 다 읽었고,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이번 책은 두 분의 시너지가 극대화되면서 한 번 더 미쳤다는 생각을 했어요.(웃음) 코로나 직전에 다녀온 곳까지 포함해 12개의 축제가 책으로 묶이게 됐는데요. 많은 축제 가운데 12곳을 고르는 것도 힘들었을 것 같아요.
박태하: 우선 2018년 가을 처음 ‘의좋은형제축제’를 다녀와서 책을 써보기로 했고요. 본격적으로 지역 축제를 다녀보자는 생각에 2019년에 하는 축제들의 목록을 모았는데요. 그것이 지금 생각하면 아주 허술했던 것 같아요. 막상 축제에 갈 때가 되니까 날짜가 겹치는 경우가 많았어요. 처음에 체크해둔 목록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됐고요. 축제가 너무 비슷하면 안 되고, 지역도 고려해야 해서 어려웠죠. 준비할 때 거실에 화이트보드가 있었는데요. 위쪽에는 다녀온 축제를 적어두고, 아래쪽에 같은 기간에 어떤 축제들이 있는지 쭉 적은 후 일정이 다가올 때마다 균형을 생각하면서 일정을 짰어요. 그래도 저희가 생각할 때는 담아야 할 이야기, 주제, 지역이 고르게 들어간 것 같아서 만족하고 있어요.
오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나요?
김혼비: ‘음성품바축제’에 갔을 때였는데요. 숙소가 없어서 약간 외곽에 있는 무인텔에 간 거죠. 다음날 아침에 보니까 101호 차고에서 무료 조식을 제공한다는 거예요. 무인텔에서 조식을 제공한다는 게 어떤 건지 너무 궁금해서 갔죠. 그런데 꽤 괜찮았어요. 심지어 사장님이 갓 구운 애플파이를 가지고 오셨는데 먹을 때마다 입안이 작은 프랑스가 되는 거예요.(웃음) 무인텔 조식이라는,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아침을 먹는데 너무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박태하: 저도 ‘음성품바축제’ 때의 일이 생각나는데요. 책에 등장한 글로벌 랩 대회가 끝난 뒤에 품바 패션쇼가 있었어요. 대학의 모델학과 학생들이 꾸린 무대였어요. 그 학생들은 오랜 기간, 옷도 직접 준비했을 거잖아요. 그걸 바라보는데 느낌이 묘했어요. 그들이 열심히 준비했을 시간과 그것이 펼쳐지고 있는 이 이상한 공간 때문에요. 당연히 관객은 거의 없고 대부분은 부모님들이었죠. 이 친구들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빛나는 어떤 순간이었는데요. 이 친구들은 진짜 진지한 얼굴로 쇼를 펼쳤거든요. 누군가에게는 헛짓일 수 있지만 말이에요. 감정이 정리가 안 돼서 이 순간들을 책에는 쓸 수 없었는데요. 그래도 어떤 종류의 뭉클함으로 남아 있어요.
오은: <오은의 옹기종기> 공식 질문을 드릴게요. <책읽아웃> 청취자에게 영업하고 싶은 단 한 권의 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박태하: 좋은 책이 정말 많지만 『전국축제자랑』의 정체성과 어울릴 책을 골랐어요. 『무주에 어디 볼 데가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무주군을 다룬 에세이예요. 이곳을 너무 사랑하는 에세이스트가 무주에서 발품을 엄청 많이 팔아 사람들을 만나고, 공간을 만나면서 겪은 이야기를 엮은 책이고요. 사진도 아름답고요. 지역성을 다룬 책이 많이 없어서 소개하고 싶어요.
김혼비: 녹음 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을 했는데요. 한 권을 꼽지 못했어요. 소개하고 싶은 책은 『라면 :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라는 책이고요. 이틀 전에 나왔는데 당장 읽고 싶은 책이라 뽑아봤어요. 윤이나 작가님은 제가 다음 책을 늘 기다리는 작가님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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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