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언트 펭TV>를 기획한 작가이자, 영화 <백야>, <현피> 등을 만든 영화감독, 다양한 연극과 영화에서 연기한 배우 염문경. ‘다목적 프리랜서 배우’라는 수식을 명함에 넣고, 만약 책을 쓴다면 소설을 써서 자비출판이라도 하겠다고 생각했던 왕성한 창작자인 그가 올해 『내향형 인간의 농담』이라는 에세이를 출간하며 에세이스트라는 새로운 수식을 추가했다. ‘오랫동안 공들여온 일보다 뜻밖에 찾아온 행운이 더 강력하다는 삶의 아이러니를 목도’한 프리랜서의 고민, 세상의 무례를 농담으로 거리두기 하는 삶의 노하우, 연극계에 만연했던 성폭력의 경험 등을 솔직하게 내놓은 염문경은 이 이야기가 “창작하는 사람들, 사회에 막 발을 내딛어 부딪히고 있는 사람들에게 건네고 싶은 글”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배우 정체성을 가진 창작자로서 자신만의 시선을 찾아가는 그의 태도에서 나를 더 잘 알고자 노력하는 사람을 목격한다. ‘조금이나마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것은 창작자로서도 배우로서도 그가 가장 바라는 소망이다.
제가 가지고 싶은 태도는
가제가 ‘아무도 불편하지 않은 농담’이었다고요. 그 제목에 담으려던 이야기, 그리고 결국에는 제목을 바꾸어야 했던 이유가 궁금했어요.
2019년에 ‘헤이조이스’라는 곳에서 <자이언트 펭TV>와 관련해 대담 같은 걸 한 적이 있어요.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데 제가 그때 “어쨌든 이건 예능이고, 농담을 만들어내는 일인데 최대한 아무도 불편하지 않는 농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느라 등골이 빠진다”(웃음)는 이야기를 했대요. 책 제안을 주신 편집자님께서 그 말이 인상 깊으셨는지 ‘아무도 불편하지 않은 농담’이라는 주제에 맞춰 책을 써보자고 제안하셨어요. 그래서 글을 하나씩 쓰기 시작했는데요. 제 이야기밖에 솔직하게 쓸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생각보다 분노했거나 좌절했던 일들이 많이 쓰여서 고민을 많이 했죠. 편집자님이 다시 주신 제목 중 ‘무례한 세상에 친절한 선긋기’도 있었는데요. 선을 긋는다는 게 저의 태도와 연결이 되면서도 좀 냉정하게 느껴질 것 같았고요. 결국 ‘내향형’이라는 좀 더 공감할 만한 키워드로 결정이 되었어요. 결국 제가 빨리 말을 못하고 내향적으로 계속 고민해서 생긴 일이에요.(웃음)
작가님은 책 제안을 받고 난 뒤에야 내가 무슨 책을 쓸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건가요? 그 전에 책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크지 않았고요?
언젠가 책을 쓰면 좋겠다는 정도로만 생각했고, 아직은 그럴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했었어요. 감사하게도 제안이 빨리 온 것 역시 ‘펭수’ 덕분이라는 생각도 당연히 있었고요. 그럼에도 출판사에서는 단지 펭수의 성공에 관한 이야기뿐 아니라 제가 해온 이야기도 충분히 담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해주셨어요. 덕분에 용기를 얻어서 썼죠.
아무도 불편하지 않은 농담, 누군가를 해하지 않는 농담은 말씀하신 대로 <자이언트 펭TV>의 지향점이기도 한데요. 실은 무척 어려운 부분이에요.
일단 말씀드려야 할 것은
지금은 시청자도 인권 감수성 측면에서 많이 민감하게 바라보고, 다양한 목소리를 내잖아요. 그럴수록 더 많이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라는 생각도 해요.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죠. 물론 저희가 실수를 할 때도 있어요. 궁극적으로 아무도 불편하지 않은 농담이라는 게 가능한가 싶기도 하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그건 불가능해’ 라고 생각하고 그냥 하고 싶은 걸 해서 자기 색깔이 강해지는 창작자도 있을 텐데요. 저는 그러기 어려운 성격의 사람인 것 같아요. 제가 가지고 싶은 태도는 이것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상황마저 다 인정한 뒤에 그래도 하려는 이야기를 최대한 녹여내는 방식이에요. 그런 것을 계속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원하는 작업들을 선택하자
책에는 일에 대한 생각이 굉장히 많이 담겨 있어요. 그 중, 지금까지는 관심이 가는 대로 작업을 해왔다면 이제는 “내가 선택하는 작품과 행보가 하나의 결을 만들고, 그것이 모여 나의 정체성이 된다는 것”(43쪽)을 안다고 적은 부분이 눈에 띄었어요.
책을 쓴 작가님들이 흔히 글을 쓰는 것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말하잖아요. 그걸 실감했어요. 여기에 쓴 글은 애초에 직업인으로서 혼란스러운, 격변의 시기에 쓴 글들인데요. 쓰면서 정리되는 부분들이 있더라고요. 당시에는 지금까지 제가 해온 작업을 사람들이 왈가왈부하는 게 싫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죠. 그런데 글을 쓰고, 이후 여러 작업을 제안 받는데 결국 제가 선택하는 이야기는 여전히 누가 보기에는 좀 불완전할 수 있는 소재, 여성의 이야기들, 첨예한 이야기더라고요. 그러면서 결국 내가 걸어온 길이 그렇고, 내가 앞으로도 아직 여기서 하고 싶은 얘기들이 있구나 깨달았어요.
내 정체성으로 내가 욕먹는 것까진 괜찮다. 하지만 공영방송으로서 안전성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프로그램에 불이익을 끼치고 싶진 않았다.(중략) 프리랜서로 다른 작업들을 선택할 때, 내가 속한 팀의 성격에 위배되지 않는지를 고려해야 하는 걸까. 별 생각 없이 주어진 일들에 감사하며 바쁘게 지내다가도 가끔씩 그게 헷갈렸다.(41쪽)
앞으로 일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어요. 일을 선택할 때의 기준이 생겼다면, 그것은 어떤 것일까요?
배우로서 하는 작업들은 작품의 지향이나 정체성, 작품이 가지는 태도 등을 다 고려해 선택하기가 쉽지 않아요. 일단 내가 맡을 배역이 재미있는지, 내가 할 만한 배역인지를 고민하는 데 더 집중하게 되죠. 그건 소위 말하는 큰 배우가 되더라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주변에 너무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배우 언니들을 봐도 결국 비슷한 고민을 하거든요. 특히 여자 배우에게 오는 배역의 제한성이 있으니까요. 그래도 지금은 뭔가 포기하더라도 조금씩 내가 원하는 작업들을 선택하자, 생각해요. 제작사와의 인맥, 포트폴리오 같은 것이 욕심 나더라도 나와 맞지 않는 작업은 결국 내 프로필에서 지우고 싶어질 거라는 생각을 옛날보다 더 하려고 애쓰고 있어요. 작가로서는 그런 생각이 훨씬 크죠. 작업하는 동안 충실하게 충족감을 느낄 수 있는 작업 위주로 선택하자는 생각을 해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서 있는 자리가 불안정해서 고민하게 될 때도 있지 않나요?
누구나 경제적인, 또 심리적인 면을 고려하게 되죠. 그걸 고려해서 설령 나를 조금 죽이는 선택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그래서 나를 잘 알아야 하는 것 같아요. 안 맞는 부분이 있어도 일을 끝마쳐야 하잖아요. 작업 기간, 힘든 사람을 만나는 횟수 등을 잘 고려해서 내가 견딜 수 있는 힘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판단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누군가는 경험 있는 사람이 잘 끌어주기를 바랄 수 있잖아요. 반면에 그게 힘든 사람도 있고요. 내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스스로 잘 물어보고 판단해서 결정을 하는 게 중요할 거예요.
작가님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언제 알아차렸나요?
제가 똘똘한 이미지가 있는 것 같은데요.(웃음) 스스로는 되게 늦되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배우가 된 게 아닌가 생각도 하고요. 내 안에 여러 감정들이 들끓고, 세상은 부조리하고, 나는 거기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기분을 줄곧 느꼈거든요. 누군가는 그런 기분이 들어도 탁 털고 다른 페이지로 넘어갈 수 있을 텐데요. 저는 계속 탐구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연극을 했죠. 나한테 가해지는 혹은 사회에 있는 폭력들과 거리두기가 안 되니까 아예 이야기라는 세계로 도피하듯이 들어가서 해결해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배우로서도 저를 던지는 작업을 되게 많이 했어요. 그러다 ‘현타’도 왔고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사람들이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뭔가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발견했던 것 같아요. 그게 한 서른즈음이었어요.
“이토록 뜨거운 내향형 인간인 내겐 그래서 농담이 필요하다. 좋은 농담은 대체로 자기 객관화와 거리두기를 연습시켜주니까.”(10쪽)라고 쓴 부분이 떠오르네요.
<모던 패밀리>라는 미국 시트콤이 있어요. 그 가족이 완전 막장이거든요. 시트콤이니까 그렇지 사실 엄마는 너무 강박적이고, 아빠는 아무 생각이 없고, 언니는 임신을 해서 오고, 엉망진창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시트콤, 무엇보다 희극 안에서 그 사람들은 서로가 결점이 있는 민간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화합을 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해요. 물론 힘들고 괴롭지만 바꾸거나 개선시키고 싶다면 농담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 마음은 그대로 가져가되 너무 힘들면 앞으로 갈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농담이 안전지대라고 표현을 했고요. 고통에서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볼 수 있는 시야가 장착돼 있으면 너무 힘들어도 다음 장으로 나갈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배우는 일종의 학문
작가님은 영화도 만드셨고, 배우로도 오래 활동하셨어요. 책에 배우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셨는데요. 내가 가장 강하게 가지고 있는 정체성 무엇인지, 그게 다른 작업에는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궁금해요.
이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는 혼란스러웠는데요. 지금은 그냥 배우라고 이야기해요. 아무래도 저의 시작이니까요. 또 저는 계속 공부하고, 탐구하고 싶거든요. 그런 저한테 배우는 일종의 학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 연기가 아니었다면 글도 쓸 수 없었을 거예요. 글을 쓰거나 연출을 하면서 다른 배우와 소통을 할 때도 연기 경험이 분명 도움이 되거든요. 대본에도 배우로서 내가 하기 힘들 것 같은 말은 최대한 쓰지 않으려고 하고요. 만약에 썼더라도 이 말투가 배우한테 불편하면 아무리 이 뉘앙스가 꼭 필요해서 썼어도 배우가 편한 쪽을 찾으려고 해요. 장단점이 있지만 저는 그 방향으로 가는 게 제가 쓰는 글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심지어 <자이언트 펭TV> 일도 배우가 아니었다면 지금 같은 역할을 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배우 활동을 할 수 있는 한 계속 하고 싶어요.
“학문 같다”는 말을 하셨는데요. 다른 일을 하면서는 배우지 못한 것을 배우를 하면서 배울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죠?
배우하고 작가의 비슷한 면은 어떤 인물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파악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에요. 그러면서도 배우 쪽이 비교적 이해심이 부족해도 이해해야 하는 면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완전히 그 사람이 된다는 개념은 사실 신화화되어 있는 것이고, 배우 역시 어떤 판단 하에 연기하는 것이지만요. 진짜 말도 안 되는 사이코패스도 어쨌든 내 안에서의 처리가 있어야 해요. 그런 면에서 배우는 훨씬 더 몸의 경험인 것 같아요. 작가는 어떤 인물의 경우,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일종의 기능을 위해서 쓸 수 있는 반면 배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 한 명만을 이해하려고 내 마음과 몸을 써줘야 하는 작업이니까요.
아까 주신 명함에 ‘다목적 프리랜서 배우’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어요. 이러한 수식을 갖고 활동하는 입장에서 지금 가장 크게 하는 고민은 뭔가요?
정체성 고민이 아직 많기는 해요. 어떤 길을 가려면 유리한 선택이라는 게 있을 텐데 그런 기준에 맞지 않은 일들을 선택하다 보니까요. 내가 좋은 일들을 선택했다 생각하면서도 ‘이러다 몇 년 뒤에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진 않을까’하는 불안이 수시로 찾아오죠. 그렇지만 찾아올 뿐 내 앞에 있는 일을 하려고 해요. 만드는 에너지가 즐거우니까 하는 거겠죠. 앞으로도 그런 선택을 하게 될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배우 일이 줄어드는 건 고민이에요. 코로나19 때문이기도 했는데요. 올해도 역시 배우로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더 늘리고 싶어요.
일터에서 겪은 성폭력 경험에 대해서도 쓰셨죠. 공감하는 분들이 아주 많을 것 같아요. 쓸 때의 마음은 어땠는지 듣고 싶어요.
글 몇 개는 5년쯤 전에 웹진 <핀치>에 기고했던 글을 다시 수정한 거예요.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화가 많이 나 있었어요. 그래서 책에 실어도 되나라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수정했죠. 그런데 5년도 전에 겪었던 것과 같은 진창에 지금도 누군가는 있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어요. 그건 분명히 잘못됐다, 빨리 잘못됐다는 걸 알아야 하고, 빠져나와야 한다, 그런 마음이 제일 컸어요. 사기를 당하는 사람은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절박한 사람이거든요. 물론 당시에는 저도 다른 언니들이 만류할 때 바로 귀담아듣지는 못했지만요. 책에 적은 것처럼 구체적인 일화를 들으면 이게 내 얘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어요. 지금도 그때 나와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제 경험을 듣고 살짝이라도 피할 수 있으면 하는 연대의 마음이었어요.
<2020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작지원 선정작인 영화 <백야>는 성추행 가해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이후 피해자가 감당해야 하는 일상의 무게를 다룬 작품이죠. 영화를 만든 이유에 대해 “고통받은 게 나뿐만이 아니었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128쪽)이라고 했어요.
<백야>는 지원작으로 뽑혔다는 사실 자체가 힘이 됐던 것 같아요. 단지 이게 필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선택되었다고 생각했거든요.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구나, 라는 생각에 우선 안심이 됐고요. 촬영을 다 마치고 편집을 하는 과정에 박원순 전 시장의 성폭력과 자살 소식이 뉴스에 나왔어요. 막상 저는 영화와 연결하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주변에서 괜찮냐는 연락이 계속 왔어요. 점점 이런 일은 결국 또 발생하는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람들이 모르지만 이런 일은 정말 많을 거예요. 제가 했던 아주 작은 고소도 세상은 모르는 사건이었으니까요. 확신이라고 하기에는 미약한 마음이지만 그런 동력으로 계속 했어요. 아직은 이런 이야기가 좀 더 필요하다는 생각으로요.
*염문경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뒤, 2012년 배우로 데뷔했다. 2015년부터 드라마 작가 일도 시작했으나 2019년 ‘펭수 작가’로 살짝 알려지기 전까지는 오랜 무명의 시간을 보냈다. 오랫동안 공들여온 일보다 뜻밖에 찾아온 행운이 더 강력하다는 삶의 아이러니를 목도하면서 꿋꿋이 연기와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영화 <메이드 인 루프탑>, 웹드라마 <멍냥꽁냥> 등에 작가로 참여했고, 영화 <악질 경찰>, 연극 <도처의 햄릿>, <로봇을 이겨라> 시리즈 외 다수의 작품에 배우로 출연했다. 〈자이언트 펭TV〉의 시작부터 함께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감독이자 작가, 배우로 단편 영화〈백야〉를 만들었다.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가장 약하다. 그럴 땐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조금이나마 괜찮은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되뇐다. |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신연선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