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여자들이 각자의 삶을 살며 우정을 유지하는 동시에 인생의 새로운 분기점을 향해 나아가는 드라마가 많은 것은 어째서일까. 나이를 먹으면서 알게 되었다. 여자들의 우정에는 남자보다 훨씬 많은 변수가 끼어들고, 그것들은 관계를 마구 흔들어 놓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혼하거나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거나 낳지 않거나, 일을 하거나 그만두거나, 선택의 갈림길마다 여성의 삶은 너무나 크게 달라진다. 누군가는 하루에 5분도 자신을 위한 시간을 낼 수 없고, 다른 누군가는 혼자라는 이유로 온 세상의 공격에 맞서야 한다. 돈, 시간, 자유가 각자에게 다르게 주어지면서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만남은 줄어들고 대화는 어긋난다. 그러니까 ‘여자들의 변함없는 우정’이라는 판타지가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는 현실에서 그것을 이루기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은 아닐까.
크리스틴 한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파이어플라이 레인> 역시 그런 이야기다. 1974년,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의 딸 케이트(론 커티스)는 히피 엄마와 함께 ‘반딧불이로(路)’의 이웃으로 이사 온 털리(알리 스코비)와 친해진다. 커다란 안경을 낀 모범생 케이트, 매력적인 외모와 당당한 태도로 어디서나 주목받는 털리는 비슷한 구석이라곤 없지만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베스트 프렌드’라고 적힌 하트 모양 펜던트를 반으로 나누어 건 둘은 열네 살 답게 다짐한다. “우린 커서 유명한 언론인이 될 거야. 같이 살 거고, 남자친구들도 절친이 될 거야!”
1982년, 시애틀의 작은 방송사에서 함께 일하게 된 털리(캐서린 하이글)와 케이트(세라 초크)는 커리어의 첫발을 내디디며 꿈에 부푼다. “앞으로 넌 프로듀서가 되고 난 거기에 출연할 거야.” 한 사람은 꿈을 이룬다. 2003년 현재, <걸프렌드 아워>라는 인기 TV쇼 진행자가 된 털리는 엘렌 드제너러스와 비교되고 조지 클루니와 같은 행사에 초대될 정도의 유명인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경력 단절 상태였던 케이트는 이혼을 앞두고 간신히 재취업을 한 데다 반항적인 사춘기 딸 때문에 정신이 없다. 드라마는 세 개의 시간대를 교차시키며 이들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준다. 두 사람에게는 그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토록 다른 삶을 살면서 이들은 어떻게 유정을 유지했을까?
성공했지만 마음 한편이 늘 공허한 여자, 평범해 보이지만 가정을 꾸려 ‘진정한 성취’를 이룬 여자라는 이분법은 진부할 뿐 아니라 여자들의 관계를 단순하게 갈라 버릴 위험이 있다. 다만 <파이어플라이 레인>은 이 전형적인 설정 안에서 지나치게 보수적이거나 예측하기 쉬운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으려 애쓴다. 케이트와 남편 조니, 털리와 연인 맥스의 관계는 ‘정상가족’이라는 궤도에 다가갔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적어도 결혼이 불멸의 서약이라거나 해피엔딩의 열쇠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숱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굳건한 것은 털리와 케이트의 우정이다. 아마도 그건 털리를 향해 “넌 중성자별처럼 주변의 모든 걸 너의 궤도로 끌어당겨! 난 그저 네 인생을 얻어 타고 가는 기분이야.”라며 폭발한 적 있는 케이트가 꽤 많은 것을 참은 덕분이겠지만 말이다.
또한 <파이어플라이 레인>은 모녀 3대에 걸친 여자들의 이야기기도 하다. 털리의 엄마 클라우드는 딸을 돌보긴커녕 자기 한 사람도 제대로 건사할 줄 모르지만 소심한 케이트에게 멋진 기억을 만들어준 사람이기도 하다. 케이트의 엄마는 털리가 무책임한 엄마 때문에 동정받기 싫어서 강한 척하는 걸 눈치채고 “너는 제2의 진 에너슨(시애틀 최초의 여성 앵커)이 될 수 있다”고 격려한다. 케이트는 딸 마라에게 이혼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이 원하는 걸 희생한 엄마 같은 본보기가 되지는 않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이들은 모두 결점이 있지만, 누구도 결점만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게 이 작품의 매력이다.
그리고 이처럼 오랜 시간에 걸친 주인공들의 성장을 지켜보다 보면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인생은 한 시기에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흘러간다. 성공도 실패도 움직이는 것이다. 시즌 마지막에 이르러 털리는 새로운 난관을 만나고, 케이트는 새로운 국면과 마주한다. 40대가 된 이들이 서로에게 하는 우정의 맹세는 이제 성공에 대한 것이 아니다. “넌 절대 혼자이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네 편이야.” 앞서 여자들의 우정이 유지되기 힘든 현실 때문에 이 판타지가 사랑받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사실 이런 이야기를 만나면 믿고 싶어진다. 어쩌면 우리의 우정도 이처럼 다정한 믿음과 함께라면 영원할지 모른다고.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최지은(칼럼니스트)
대중문화 웹 매거진 <매거진t>, <텐아시아>, <아이즈>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괜찮지 않습니다』와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