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SF계에서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전천후 스토리텔러로 자리한 작가 임태운의 세 번째 장편 『화이트블러드』가 출간됐다. 좀비와 SF 각각에 대한 애정을 꾸준히 고백해왔던 작가답게, 이번 신작은 좀비 아포칼립스이자 스페이스오페라이다. 특이하게 단편소설을 장편으로 개고한 작품인데, 거대한 스케일과 흥미로운 설정 덕분에 단편만으로 영상화 계약을 체결했다고. 독자의 시간을 빼앗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작가의 바람처럼 다양한 캐릭터와 박진감 넘치는 전개로 볼거리를 더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는 신작이다.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 『다행히 졸업』 등 열 종 이상의 앤솔러지에 참여하며 단편소설 창작에 힘쓰셨는데요, 최근에는 장편에 집중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화이트블러드』 역시 장편으로 분량이 원고지 1200매에 달하고요. 이렇게 변화를 꾀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저 스스로는 ‘변화’라기보다는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단편소설은 정말 매력적인 분야예요. 특히나 사고실험으로서의 SF 단편소설은 특유의 묘미가 있지요. 읽으시는 분들에게도, 쓰는 저희에게도. 반면 장편소설은 한 명의 주인공이 난관을 통과하며 독자와 함께 성장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인물을 입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여유가 확보되어 있거든요. 제가 이야기를 구상하고 그것을 내면에서 키워나가는 과정은 장편소설에 훨씬 잘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 쓴 단편들도 분량이 늘 150매를 넘어가곤 했어요. 줄이는 글쓰기보다 풀어내는 글쓰기가 더 행복한 것 같아요. 전업 작가로서의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제 상황도 장편소설 창작에 더 무게를 두는 선택지에 힘을 실어줬던 것 같고요.
작가님은 한국 SF가 지금과 같은 인기를 끌기 전부터 SF에 주력하며, 그에 대한 애정을 내보여 오신 것으로 압니다. SF의 매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많은 작가들 중에서 자신만의 차별화된 색깔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한국에서 SF 소설을 창작하는 작가님들은 꾸준히 있어왔습니다. 장르 자체를 사랑하고 그 세계에 매료되어 글을 써온 작가님들이 계셨지요. 지금 발표되는 많은 작품들의 배후에는 그렇게 ‘좋아서 그 자리를 지켜온’ 창작자들의 저력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작년에 발표된 SF 장편소설이 50여 권, 단편소설이 300여 편이었습니다. 하루에 SF 단편 하나가, 일주일에 장편 하나가 발표되는 셈이니까요.
저는 SF의 매력은 우리를 둘러싼 장벽 너머를 엿보는 신비로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장벽은 물리적인 우주일 수도 있고, 시간일 수도 있고, 인공지능과의 관계일 수도 있고요. 지금 독자들이 SF를 많이 찾으시는 이유도 그만큼 현대인에게 다가온 장벽의 수가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쉽게 말해, 그냥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SF처럼 되어버린 거죠.
저는 제가 사랑하는 SF 속의 여러 코드들을 조합해 흡입력 있는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지금의 소설가는 같은 소설가끼리만 경쟁하지 않아요. 비디오게임, 넷플릭스, 인스타그램과 치고받으면서 독자의 시간을 빼앗아 와야 하죠. 그래서 전 무엇보다 ‘이야기를 읽는 쾌감’을 충족시킬 수 있는 소설을 쓰고자 합니다. 소설의 모든 것이 재미에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요.
이번 『화이트블러드』 에는 지구를 초토화시킨 바이러스, 그런 바이러스에 대항하기 위해 신체를 개조한 강화 인간, 우주를 항해하는 초거대 방주, 인간을 통제하는 인공지능 등 한 바구니에 담기 곤란해 보이는 많은 코드들이 등장하는데요. 저는 그 코드들을 하나의 줄기로 관통하면서도 한 번 책장을 펼치면 결말을 보기 전까진 덮을 수 없는 이야기를 쓰겠다는 각오로 완성했습니다.
최근 집필한 장편소설 『태릉좀비촌』과 『화이트블러드』는 모두 좀비 액션물입니다. 다른 소재보다 ‘좀비’를 애정하는 것인지,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바이러스는 인간 본성을 비추는 도구입니다. ‘코로나 19’로 크나큰 위기를 돌파해나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그것에 공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감당하기 힘든 역병이 그 사회를 덮칠 때 그들이 원래 갖고 있던 부조리와 폐부들이 만천하에 드러나곤 하니까요.
좀비물은 거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나의 소중한 이웃이 괴물이 되어 돌아오는 극한의 상황을 테마로 합니다. 이야기의 본질이 결국 한 인간의 일생을 바꾸는 강렬한 선택의 순간을 다루는 것이라면 사랑하는 자가 좀비가 되어 내 눈앞에 선 상황은 더할 나위 없이 그 조건에 부합한다고 생각해요. 작가가 집을 짓는 건축가라고 해볼까요? 또 장르의 코드들은 망치와 못처럼 그 건축가의 연장들이라고 가정해볼게요. 저는 ‘좀비’라는 존재는 그 연장들 중에서 전기톱이라고 생각합니다. 파괴적일 만큼 강렬하고 매력적이죠.
『태릉좀비촌』에서는 올림픽을 준비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이 좀비 사태를 맞닥뜨리면서 지극히 한국적인 인물들이 재난에 휩쓸리는 이야기를 펼쳤었습니다. 그래서 블랙코미디로 느껴지는 장면도 많았죠. 반면 이번 『화이트블러드』는 나노봇을 이용한 백혈 시술로 인간을 초월한 세 명의 주인공을 통해 액션의 스케일은 더욱 키우면서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신작 『화이트블러드』는 『그것들』에 수록된 단편 「백혈(White Blood)」을 개고한 작품입니다. 단편을 길게 늘여 장편으로 다시 쓰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요. 『화이트블러드』를 장편으로 출간하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있으신가요?
위에서 말씀드렸듯 제가 줄이는 걸 잘 못합니다. 단편 「백혈」 역시 원고지 176매로 보통의 단편보다 두 배의 분량이거든요. 하지만 못내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재난에 휩싸인 그 방주 안에서 더 많은 일이 일어났을 것이며 단편에선 이름도, 사연도 없었던 세 주인공의 이야기 역시 더 폭넓게 펼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렇게 장편소설로 써내려갔을 때 ‘훨씬 재밌어질 것 같다’는 강렬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중화요리점으로 비유해볼게요. 짜장면 하나만 있었는데 그 면발을 늘인다는 개념보다는, 짜장면 주위에 깐풍기와 양장피, 유산슬, 군만두에 고량주까지 화려하게 차리는 작업에 가까웠다고 생각해요. 단편에선 비워져 있었던 방주 속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채워나갈 때의 즐거움이 컸습니다.
첫 번째 방주 ‘게르솜’은 선택받은 자들만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부와 권력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오직 인류의 생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능력만을 따졌지요. 당연히 폭력적인 이들도 탈 수 없었고요. 하지만 게르솜은 카난으로 향하는 도중 멈춰 서고 맙니다. 이러한 설정이 흥미로운데요, 그렇다면 작가님께서 생각하시는 새로운 지구를 개척해나갈 자격이 있는 자들은 어떤 이들인가요?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지 않는 자들’이라고 생각해요.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고 별들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니 우주여행이 얼마나 까마득한 시간을 필요로 할지는 자명합니다. 하지만 언젠가 우리가 우리를 닮은 자들을 만나게 되거나, 지구를 닮은 행성에 도달하게 된다면 그 전제 조건으로 일단 멸종을 피해야 하지 않겠어요? 우리 안의 폭력성과 이기심을 어떻게 해결해나갈지가 과제겠죠? 물론 제 소설 안에서는 ‘모두가 모두에게 칼끝을 겨눕니다.’ (웃음) 저는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일종의 사고실험장으로 방주 게르솜을 구상했기 때문에 읽는 독자 분들이 저마다의 답을 하나씩 가져가실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좀비 바이러스 때문에 혼란한 지구를 배경으로 하기에 『화이트블러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의 사연이 있습니다. 작가님께서 가장 마음이 가는 인물은 누구인지, 그리고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백혈부대 삼인방 중 하나인 미소년 킬러 보테로입니다. 멸망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킬러로 자라났지만 지구에서 유일하게 죽이지 못한 주인공 이도를 따라 냉동 캡슐에 올라탄 캐릭터죠. 극의 활기를 이끌어나가는 인물이기도 하고 거친 언변과 달리 가녀린 속내를 지녔기 때문에 정감이 많이 갑니다. 독자분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사전 설문 조사에서 보테로를 좋아해주는 의견이 많이 보여서 무척 감격스러웠어요.
차기작으로는 어떤 이야기를 준비 중인지 궁금하고요, 『화이트블러드』를 사랑해주시는 독자분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차기작은 인간의 꿈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추적하는 ‘꿈 사냥꾼’들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 배경은 우주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역시 미스터리와 서스펜스가 공존하는 재미있는 소설로 만들어보려 합니다. 『화이트블러드』를 읽어주시는, 그리고 앞으로 읽어주실 독자님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작가는 여러분의 시간을 훔치는 도둑이지요. 제게 여러분의 시간을 흔쾌히 도난당해 주신다면 저는 그 보답으로 열 배의 재미를 선사할 수 있도록 약속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 모두가 저마다의 별에 닿기를.
*임태운 2007년 《이터널 마일》로 한국전자출판협회 제2회 디지털작가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마법사가 곤란하다》, 장편소설 《이터널 마일》, 《태릉좀비촌》을 펴냈으며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 《그것들》, 《앱솔루트 바디》 등 다수의 앤솔러지에 참여했으며, 《장르의 장르》, 《한국 창작 SF의 거의 모든 것》에 SF에 대한 글을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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