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있는 곳의 비상구 위치를 알고 있는가. 나는 극장에서 영화 상영 전에 보여주는 비상 탈출 안내를 유심히 보는 사람이다. 가만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시된 탈출로 중 내 위치에서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더 안전하고 효율적인지를, 머릿속에 상영관과 극장 건물 내외부를 그리며 빠르게 따져본다. 그뿐인가.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발빠짐 주의 문구가 보이면 차를 타고 내릴 때 내내 발 밑을 보고 또 본다. 지하철 문에는 당연히 자의로는 기댄 적이 없고 거리의 맨홀 뚜껑은 최대한 밟지 않으려 하고 공사중인 건물 옆을 지날 때는 반대편으로 조금 떨어져 걷는다. 그리고 기타 등등, 이 모든 것을 너무 자연스럽게 하고 있어서 의식하지 못했는데 하나씩 쓰면서 보니 좀 질리는 듯도 하다.
새삼 그렇다. 나는 주의하는 일에 익숙하다. 이것은 아마도 오랜 학습 효과에 경험이 더해진 결과일 것이다. 내가 가진, ‘주의’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이렇다. 어린 시절 학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설 때면 엄마는 ‘곧장 학교로 갈 것’을 당부했다. 아이가 등굣길 내내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느라 정작 학교에는 늦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두리번거리지 말고 학교로 직진하라는 다짐을 단단히 받았는데 잘 이행했는지 여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편 아빠는, 세상 위험한 자전거는 아이가 절대 타면 안 되는 것으로 분류했는데 그 생각은 내 친구의 자전거 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어쩐 일인지 집에 하나 있던 자전거도 그 즈음 없어졌다. (지금은 알 수도 없는 이유로) 동네를 뛰어다니느라 무릎 성할 날이 없던 나는, 씽씽이를 타고 자전거보다 빠르게 골목을 달렸던 나는, 어느새 이렇게 질리도록 주의하는 인간으로 자랐다.
가끔은 정말 쓸데없이 겁을 먹고 조심하는구나 싶기는 하다. 무엇을 하겠다 마음 먹으면, 최초의 행동 그 다음 다다음 다다다음의 반응과 결과를 가늠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거기서 심각하게 더 파고들면 어느 순간 ‘나는 왜 이러고 있는가’ 하는 생각에 또 빠졌으며, 그것은 ‘이쯤 했으면 됐다. 그만하자.’ 하는 마음에 달해서야 끝이 난다. 움직이기까지는 실로 길고 긴 시간이 필요하니 문득문득 답답해지는 것도 당연한데, 그래도, 덕분에 덜 아프고 덜 아프게 했으니 지금에 와서는 손해보지는 않았다는 것이 중간평가. (사실은 자체 평가 결과도 이랬다저랬다 하는데 일단 정신 건강을 위해 잃은 것은 잊기로 한다.) 그러고 보면 주의하는 일은 번거로울 때도 있지만 멋진 구석도 있다. 스스로의 한계에 자주 부딪히고 벽을 실감할 때가 많지만, 그 주의의 범위는 타인에게까지 미친다. 주의에서 파생하는 ‘안전제일’과 ‘손해보지 않음’을 다른 사람에게도 최대한 같이, 더 확실하게 적용하려고 하니까.
즉 남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지켜야 할 일정이 있고, 달성해야 할 계획이 있으며, 추진해야 할 프로젝트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살아가야 할 삶, 즉 필요해 의해 지금 이 순간 나를 이 도시의 지하철 역으로 나오게 한 생활이 있는 것이다. 또 방금 지하철에서 내린 사람들도 그런 계획과 생활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그것을 내 행동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이러한 남들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내가 앞으로 '도덕적 품위'라고 부르는 태도의 바탕, 즉 도덕적 핵심이다.
_토드 메이,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철학』 13쪽
비상구를 파악했는가.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고민하는 것이 괜히 사서 하는 걱정인 것도 맞지만, 피할 수 있는 매를 사서 맞을 필요는 없지 않나. 안 다칠 수 있으면 안 다쳐야 한다. 말이 좋아 배수진背水陣이지 매번 그렇게 싸우면 남아나는 것이 없겠다. 열과 성을 다해 앞으로 가더라도 도망갈 곳, 탈출구 하나쯤은 두고 화를 피하고 싶다. 머리 조심 발 조심 차 조심 감기 조심. 나도 당신도, 어제처럼 오늘도 내일도, 상하지 말자는 마음으로, 오늘도 주의합니다.
부디, 다시 눈뜰 수 있기를.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기를. 그래서 내가 겨울을 버텨낸 이유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우리가 만난 행복한 여름을 다시 경험할 수 있기를.
_강민영, 『부디, 얼지 않게끔』 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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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욱(도서 PD)
책을 읽고 고르고 사고 팝니다. 아직은 ‘역시’ 보다는 ‘정말?’을 많이 듣고 싶은데 이번 생에는 글렀습니다. 그것대로의 좋은 점을 찾으며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