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새로운 소설집 제목이 『일인칭 단수』임을 전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새삼스레?’라는 것이었다. 아마 그의 작품을 오랫동안 읽어온 사람이라면 비슷한 감상을 가졌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키는 고전적인 사소설의 기법과는 거리가 멀지언정, 누구보다 ‘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다방면으로 펼쳐온 일인칭 화자 시점의 명수가 아니었던가. 굳이 지금 와서 그런 형식적인 일면을 제목에 못박고 소설집을 엮은 건 왜일까. 한 편 한 편의 번역 원고를 작업하는 사이, 이것의 ‘나’의 이야기여야만 하는 이유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의 육체는 돌이킬 수 없이 시시각각 소멸을 향해 나아간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떠보면 많은 것이 이미 사라져버렸음을 깨닫는다. 강한 밤바람에 휩쓸려, 그것들은—확실한 이름이 있는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어딘가로 날아가버렸다. 뒤에 남는 것은 사소한 기억뿐이다.
『일인칭 단수』 속의 ‘나’는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작가의 배경이 투영된 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하고, 동세대의 기억을 공유하는 불특정 다수의 종합체로 보이기도 한다. 지난날 청춘의 한 장면을 회상하는 글에서든, 오늘날까지 꾸준히 이어지는 취미를 드러내는 글에서든 독자가 접하는 인물은 지금껏 익히 접해온 하루키 월드의 ‘나’ 그 자체다. 기억이란 말할 것도 없이 한 개인 고유의 것이지만 단편소설이라는 작고도 무한한 세계를 만나는 순간 세대와 취향을 뛰어넘은 보편적인 정서로 확장된다. 그 안의 ‘나’는 영원히 젊고 미숙하며 혼란스러운 청년이고, 선문답 같은 인생의 진리를 툭하니 던져놓는 의뭉스러운 노인이기도 하다.
“다시 한번 눈을 감고, 열심히 생각하는 거야. 중심이 여러 개 있고 둘레를 갖지 않는 원을. 자네 머리는 말일세, 어려운 걸 생각하라고 있는 거야. 모르는 걸 어떻게든 알아내라고 있는 거라고. 비슬비슬 늘어져 있으면 못써. 지금이 중요한 시기거든. 머리와 마음이 다져지고 빚어져가는 시기니까.”
누군가의 소설을 꾸준히 읽어간다는 건 그의 기억과 기록의 증인이 된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독서의 체험은 다시 새로운 기억으로 쌓인다. 수많은 일인칭 단수들이 모여 만든 집단의 일원이자, 온전한 소우주를 가진 ‘나’의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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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현(문학동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