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표지를 들여다보는데 고수의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두 사람이 편안하게 누워 있는데 한 사람은 꽃을 들고, 한 사람은 책을 들고 있다. 꽃과 책, 무용한 듯 보이지만 무용하지 않은 것들. 꽃과 책을 좋아하는 부부의 이야기로구나, 생각했다. 편성준은 20년간 광고회사에서 일한 카피라이터다. 지금은 프리랜서이자 작가. 작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이제부터라도 스스로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부부가 둘다 놀고 있습니다』는 출판기획자인 아내와 결혼 후, 어떻게 잘 놀고 있는지를 시원하게 공개한 책이다. 두 부부의 꿈은 앞으로도 ‘쉬지 않고 노는 일’. “돈이 많은 중년이라서 가능한 일 아니에요?”라고 질문하는 독자가 있다면, 우선 작가의 이야기를 읽어 보자.
숨기기 시작하면 글이 애매해진다
책 제목을 보고 안 읽을 수가 없더라고요.
(웃음) 초고는 “늦은 연애는 없다”였어요. 우리 부부가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결혼했는지, 그런 내용이 책에 다 나오잖아요. ‘늦은 나이에 연애를 해도 괜찮다’, 그런 마음이 책을 읽고 들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원고를 읽어 본 출판사 대표님이 지금의 제목을 제안하셨어요. 정규적으로 하는 일이 없으니까 맞는 말이었죠.
프롤로그를 읽다가 뭉클했어요. 자존심이 심하게 상하는 일을 겪은 다음 날 새벽, 과감하게 사표를 낼 결심을 하셨고, 아내는 흔쾌히 “그래. 잘 생각했어. 결심하느라 애썼겠네.(15쪽)”라고 응원해주셨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요.
어려운 일이죠. 정말 고마웠어요. 아내도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직접 출판 기획을 준비하고 있는 터라, 별다른 수입이 없었을 때였거든요. 그런데도 저의 무모한 결정을 태연하게 받아줬어요. 매달 고정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생활비를 생각하면 꾸역꾸역 다니는 게 옳았겠지만, 더 늦기 전에 제가 꿈꿨던 삶에 더 가까운 생활을 하고 싶었어요. 이왕 넘어진 거, 쉬어 가자고 생각했죠.
책은 어떻게 쓰게 되셨나요?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도에서 한 달간 혼자 지내면서 글을 썼어요. 회사를 다닐 때는 할 수 없었던 생각들을 썼죠. 브런치에 ‘아내 없이 제주에서 한달 살기’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했고, 제법 반응이 좋아서 아내의 글과 함께 전자책으로 출간했어요. 브런치를 시작으로 인터넷 포털에 짧은 글쓰기 칼럼도 연재하면서, 광고 일을 할 때는 못 썼던 글들을 쓰게 됐어요.
책 첫 장에 짧은 자기소개글이 실렸어요. 세번째 문장이 “나는 초혼, 아내는 재혼이었다.”입니다. 요즘 솔직한 에세이가 많이 나오지만, 압도적으로 솔직한 책이 아닌가, 싶었어요.
숨기기 시작하면 글이 애매해지더라고요. 블러 처리를 하는 느낌이랄까요? 다른 사람이 그렇게 쓴 글을 읽는 걸 싫어해서 솔직하게 썼어요. SNS를 하는 사람들의 이중적인 마음이 있잖아요. 프라이버시를 지키고 싶으면서 동시에 자기를 내보이고 싶기도 하고. 그런데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크게 관심이 없어요. ‘좋아요’를 누를 때도 그때뿐이에요. 돌아서면 잊죠. 편집자님이 초고를 읽고는 “너무 센 거 아니냐”며 오히려 덜어낸 이야기도 있어요.
책을 계약했을 때보다 추천사 수락을 받고는 가장 기뻤다고요.
정말 좋았어요. 김탁환 선생님은 소설이 아니면 추천사를 잘 쓰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원고를 읽고 흔쾌히 수락하셨어요. 장석주 시인님 같은 경우는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를 쓰셨을 때 제가 북 콘서트를 갔어요. 그때 질문지를 길게 써갔는데 행사를 진행하셨던 김민정 시인님이 무대 위로 불러서 제가 주책을 좀 떤 적이 있어요. 워낙 좋아하는 작가라서 부탁을 드렸어요. 심리기획자인 이명수 선생님도 각별하게 좋아하는 분이에요. 모두들 원고를 두 번씩 읽으시고 추천사를 써주셨어요. 너무 좋았죠.
이 책을 시작으로 인생 후반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신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내가 꾼 꿈들이 무작정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구나, 생각했어요. 내가 책을 써도 되나? 그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저는 어려운 글을 못 써요. 그래서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제가 어렵게 쓰는 글을 싫어하더라고요. 단칼에 쓰는 글보다는 주저리주저리 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 같아요.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본다면
카피라이터들이 책을 쓰면 광고 이야기가 많은데, 이 책에는 광고 이야기가 적어요.
광고인 출신으로 내가 이런 프로젝트를 했다는 이야기 같은 건, 별로 쓰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이야기보다는 “나는 광고로 재미를 별로 못 봐서 다른 길로 가고 싶어서, 지금이라도 간 거야.” 같은 말을 하고 싶었어요. 저도 20년을 광고를 만들었으니 물론 유명한 캠페인도 했죠. 하지만 캠페인은 유명하지만 카피는 유명하지 않고, 또 반대인 것도 많아요. 일단 이 책은 광고인이라는 타이틀로 쓴 게 아니기도 하고요.
광고 일은 어떻게 시작하시게 되셨나요?
대학교 4학년 때, 홍대에 있는 통기타 서클에 들어갔어요. 미대생도 많고 광고, 영화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되게 좋아 보였어요. 광고 촬영장에 놀러간 적도 있는데 그때 감독님이 “너도 카피라이터 해보지 않겠냐?”고 하더라고요. 그때 카피라이터 학원도 찾아다니고 공모전에도 참가하면서 자연스럽게 광고 쪽으로 가게 됐어요. 아주 잘하진 못하는데 성향은 맞고. 그렇다고 너무 좋지도 않은 게 광고였어요. 시인들이 그러잖아요. 시를 쓰는 건 힘들고 나머지는 다 좋다. 저에게도 광고는 그랬던 것 같아요.
아내와 함께 토요일마다 독서 모임도 하신다고요. 이름이 ‘독하다 토요일’.
벌써 시즌5가 됐어요. 6개월 단위로 멤버들을 모집하는데 지금 11명이 모임을 하고 있어요. 6개월 동안 매월 한 권씩 한국 소설을 읽어요. 최근에는 최진영 작가님의 『해가 지는 곳으로』, 김연수 작가님의 『일곱 해의 마지막』, 조해진 작가님의 『단순한 진심』을 읽었어요. 굉장히 재밌어요. 멤버 중에 소설가 지망생이 있는데 리뷰를 굉장히 잘 써요. 그 친구가 어떻게 읽었는지를 모두가 궁금해요.
지금까지 가장 잘한 선택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결혼이죠. 아내를 만나고 나서 바뀐 게 많으니까요. 예나 지금이나 저는 마이너한 삶을 당연하게 생각했어요. 어릴 때부터 ‘나는 메이저로 가야지’ 같은 생각이 없었어요. 늦게 결혼한 편이지만 그래서 더 편한 것도 많아요. 아내가 저를 두고 “NO!가 별로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데요. 아내가 연극 티켓을 끊고 놓고 “같이 가자”고 말하면 저는 흔쾌히 따라가요. 계획에 없었던 일이지만 같이 하면 또 즐거워요.
작가님 부부가 불안을 해소하는 노하우가 있을까요?
그런 건 없는 것 같아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이제 어떻게 살지?” 고민할 때가 있어요. 하지만 남들이 사는 모습과 비교하는 건 없어요. “사람 구실을 못하고 살면 어떡하지?”, “까불더니 꼴 좋다” 같은 소리를 듣지 않아야 할 텐데, 생각할 뿐이죠. 둘 다 프리랜서니까 수입이 불규칙해요. 지금 저희가 도시형한옥에서 사는데, 리모델링을 하면서 빚도 생겼어요. 하지만 이제는 저희가 원하는 일을 선택해서 하니까요.
오로지 월급 때문에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회사를 안 다닐 때의 자기 모습을 상상해보라고 하고 싶어요. 할 수 없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그 할 수 있는 일을 위해서 다른 일을 할 수 있는가? 그걸 점검해볼 필요가 있어요. 저는 요즘 서울시청에서 공공근로를 해요. 직장에 다닐 때보다 수입이 줄었으니 생활비가 부족하잖아요. 그래서 집 근처 고등학교에 가서 방역 업무를 해요. 학생들의 손이 닿을 만한 곳을 거즈로 닦고 걸레질을 해요. 최저 시급이에요. 하지만 오전 7시 30분부터 일을 시작해 11시 30분이면 업무가 끝나요. 일을 마치고 오면 얼추 1만 보 이상을 걷더라고요. 어려운 일은 아니니 운동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거예요. 만약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해?”라고 생각한다면, 다시 한번 고민을 해봐야죠.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도 내가 이 정도는 벌어야지’ 생각한다면, 못하는 일이 너무 많아요.
10년 전 또는 20년 전의 편성준에게 한 마디를 한다면요?
조금 더 용기를 내라고 말하고 싶어요. 제가 광고회사에 다닐 때 ‘나는 왜 일을 못할까, 왜 더딜까’ 계속 괴로워했거든요. 이것저것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하니까요. 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아내랑 자주 이야기하는데요. 우리가 좀더 젊어서 더 생산적으로 놀고, 하고 싶은 일에 더 초점을 두고 살았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았을 것 같아요. 새로운 일을 더 하고 싶어도 체력이 부족해서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으니까요.
독자들이 『부부가 둘다 놀고 있습니다』를 어떤 마음으로 읽으면 좋을까요?
글쎄요. 책을 읽다가 ‘논다는 의미가 이런 의미가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드셨으면 좋겠어요. “생각해보고 읽으세요”의 의미는 아니고요. ‘논다’라는 말의 숨은 뜻을 발견하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아요. 놀고 있다고 일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남들이 시키는 걸 하지 않고, 놀듯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기획하면서 사는 삶은 정말 재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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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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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눌언
2021.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