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본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동자승이 소를 찾아가는 과정에 비유한 10장의 그림 십우도(十牛圖). 선불교 전통에서 내려오는 십우도는 1500년간 깨달음에 관한 최상의 비유로 사용되며, 주로 사찰 법당의 외벽에 벽화로 많이 그려져 왔다.
이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해 나를 돌아보는 『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이 출간되었다. 비교종교학자 오강남과 성소은이 일상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본래의 자유로운 나’를 찾아가는 십우도를 탈종교적인 관점에서 오늘날에 맞게 새롭게 그리고 해석한 책이다.
이 책의 출간을 맞아, 여러 종교에 공통된 가르침이 자기 안의 신성을 찾는 것이라는 심층종교론을 역설해온 오강남(저자), 해탈을 꿈꾸던 기독교도로서 3년간 출가수행을 마치고 환속하여 <경계너머 아하>를 이끄는 성소은(저자), 여성들에게 자기 안의 여신을 찾으라는 메시지를 던져온 유니언 신학대학의 현경 교수(사회자)가 만나 ‘내 안의 참나’를 찾아가는 과정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현재 캐나다에 계시는 오강남 교수님은 화상으로 참여했다.)
현경: ‘왜, 이 시기에, 십우도를 쓰고 싶으셨는지’ 그 이야기부터 듣고 싶네요.
오강남: 제가 옛날부터 ‘파울러의 6단계’ 같은 종교의 단계들에 관심이 많았어요. ‘십우도’는 12세기 중국 송나라 때 곽암이라고 하는 임제종 선사가 정리한 10개의 그림인데, ‘참나를 찾아가는 길’ 혹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게 하기 위한 그림입니다.
십우도는 동그란 원 속에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나를 찾아가는 경험이 ‘지금 여기’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얘기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지금 여기에서 나를 찾아가는 과정, 나를 깨달아가는 과정이 가능하다’라는 것을 보여 준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불교인, 불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종교가 지향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말해주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소은: 여정 중에 불교를 처음 만났을 때 십우도 그림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출가하고 환속한 이후에, 한번 십우도를 매개로 우리 의식이 변화되는 과정을 담아보고 싶다는 개인적인 소망이 있었습니다. 기존의 불교에서 말하는 의식의 변화 과정이 아니라, 여러 가지 길을 제시하는 그런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십우도를 정리하고 싶었어요.
제가 『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지점은 다양한 길을 보여 주는 것이었어요. 저는 본의 아니게 종교의 길을 통해 그 길을 걸었지만, 제가 나와 보니까, 내가 나를 낳는 것은 꼭 종교로만 가능한 게 아니잖아요. 그 불씨를 비춰줄 수 있는 게 너무 많아요. 동서고금의 모든 지혜전통, 경전, 철학, 양자물리학, 심리학이 그러하고, 그것은 어떤 시 한 편, 그림 한 장이 될 수도 있어요. 그 길은 문학일 수도 있고 소설일 수도 있고 시일 수도 있고 음악일 수도 있고 산책일 수도 있고 철학공부일 수도 있고, 너무 많아 대도무문(大道無門)이에요. 그 메시지를 담고 싶었어요.
현경: 두 분이 다 그런 말씀을 하셨죠. ‘나 자신을 알라.’ 백만가지 문제가 있지만, 결국 답은 나 자신을 아는 데서 있는 것 같아요. 남의 영혼의 숙제가 내 영혼의 숙제일 순 없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하고, 융도 ‘네 안에 있는 도토리를 키워서 도토리나무가 되게 하는 게 너의 여정이다.’고 하고, 유발 하라리도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결국은 나 자신을 아는 게 이 변화하는 디지털세계에서 안 속아 넘어가는 방법이라고 하고요.
성소은: 더구나 앞으로도 예측하지 못하는 혼란이 계속 일어날 텐데, 최소한 나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덜 흔들릴 수 있지 않을까요? 내면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상태라면 불안감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현경: 유니언 신학대학원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했었거든요. 그때 도법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불교는 깨달음 때문에 2,500년이란 세월을 깨달음이 불자들을 구속해왔고, 기독교는 2,000년 동안 구원이라는 것이 크리스천들을 구속해왔다.”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제가 그 얘기를 참 깊이 들었어요. 깨달음과 구원이, 우리를 더 자유롭고 더 성숙하고 더 예수처럼 사는 사람, 부처 같은 마음을 낼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보다는, 반대의 의미로 많이 이용되어 온 것 같기도 해요.
오강남: 얼마 전 동네 근처의 조그만 실개천에 연어 떼들이 올라오는 걸 봤어요. 그걸 보니 너무 신기했어요. 연어들이 어떻게 큰 바다에서 몇 년씩 헤엄쳐 놀다가 다시 자기가 태어났던 조그만 실개천으로 올라오는가. 이거야말로 신비 중의 신비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필 주커먼이라는 종교사회학자는 이것을 경외감(awe)으로 표현했어요.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조그만 것들-봄에 올라오는 풀잎을 보고, 앙상했던 나무에서 꽃이 핀다든가-에서 삶의 보람과 의미를 깨닫는 것이죠. 이런 걸 삶에서 상당히 중요시 여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한 경외주의(aweism)를 저는 다른 말로, 아하이즘(aha-ism)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조그만 현상부터 우주의 큰 무변한 걸 보면서 계속 ‘아하, 아하’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정말 21세기를 위한 종교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십우도를 보면서도, 종교가 어느 장소에 가서 형식적으로 종교의식을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삶에서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종교형태가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 맞아요. 특히 요즘 젊은이들이 이런 걸 가슴으로 확 느끼는 거 같아요. 유니언 신학대에 오는 학생들 중에 50% 정도만 크리스천이고, 나머지는 무신론자도 있고 다른 종교 사람들도 굉장히 많아요. 그 학생들이 하는 말이 ‘religion no, spiritual yes.(종교는 노, 영성은 예스.)’ 이런 말을 슬로건처럼 하거든요. 21세기는 종교가 아니라 영성의 시대인 거 같아요.
성소은: 오교수님이 책에서 십우도의 단계들을 풀어주셨는데, 저한테 가장 인상적인 구절이 하나 있었어요. 십우도 단계는 계단이 아니라, 계단이라기보다는 ‘비탈길 같다’는 표현이 참 와닿았어요. 어느 지점에 가서도 미끄러져서 내려올 수 있어요. 다만, 미끄러지지 않는 단계가 있죠. 그렇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십우도 단계가 어디일까 생각했는데, 제 생각에는 4번째 득우(得牛), 소를 얻는 단계 같아요. 이 단계가 십우도 여행의 성패를 판가름 짓는 단계인 셈이죠.
어려운 시기를 지나 이제 막 내가 소를 움켜쥘 수 있는 상태인데, 소의 야성이 살아 있어서 소도 가만히 있지 않아요. 나를 떨어뜨리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여전히 채찍이 필요해요. 나를 얻은 것 같지만, 이 단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지금까지 해왔던 것도 다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그냥 이전의 나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는 거죠.
하지만 이 단계를 지나면, 다시 떨어지더라도 잠깐 떨어졌다가 제자리를 찾아갈 수가 있어요. 갑자기 1단계로는 가지 않아요. 그 분기점이 득우 같아요. 그래서, 이탈리아 여행이나 제주도 여행도 좋지만, 그 어느 여행보다도 내가 나를 만나는 그 여행이 무엇보다 해볼 만한 여행이고 가볼 만한 여행이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어느 단계까지 가면 나머지는 도반들로 인해서 저절로 가질 수도 있거든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있으면 스승 같은 책과 진짜 스승을 만나 누구나 존재의 질적 변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강남: 독자들께는 『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우리의 삶이 가벼워질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쁜 일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유튜브 채널 <녹명살롱>을 통해 전체 대담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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