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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윤덕 “그림책 작가가 된 건 행운이에요”

첫 에세이 『나의 작은 화판』 북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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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을 들 수 있을 때까지 그림을 그리고,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글을 쓰고 싶어요. (2020. 07. 02)


내 머릿속에는 세 개의 방이 있다. 일상을 살아가는 현실의 방, 작품 구상을 넣어두는 창작의 방, 그리고 그 누구의 간섭 없이 제멋대로 노니는 꿈결의 방. 보통 하루의 절반 이상은 현실의 방에 머물지만, 집에서 호젓한 시간이 되면 창작의 방에 들어가 서랍 속에 넣어 둔 낱말이나 문장, 조각 그림 들을 꺼내 잇고 부풀려 작업 노트나 화선지에 옮긴다. 

『나의 작은 화판』 (5쪽) 

1996년, 그림책 『만희네 집』을 출간하며 그림책 작가의 길에 들어선 권윤덕 작가가 첫 에세이 『나의 작은 화판』을 펴냈다. 국내 창작 그림책 1세대 작가이자 ‘그림책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 그녀가 25년간 활동하며 겪은 애환을 풀어낸 책이다. 남편, 아이와 함께 시가에 들어가 살던 시절을 그린 『만희네 집』부터 제주 4.3사건의 『나무 도장』, 5.18 민주화 운동의 『씩스틴』 등 일상은 물론 사회 문제를 그림책으로 심도 있게 다뤄온 작가의 숨은 고뇌가 에세이 곳곳에 묻어 있다. 

지난 6월 25일, 마포구의 동네 책방 ‘데어이즈북스’에서 『나의 작은 화판』 북토크가 열렸다. 권윤덕 작가는 25년여의 세월이 남긴 스케치, 사진 등을 독자에게 공개하며 그림책 작가로서의 고민과 기쁨에 대해 들려줬다. 작가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세 개의 방’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작가의 일상, 그림책이 되다 

새 책을 준비하고 그리는 1~2년은 내게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다. 붙잡고 늘어지다가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을 때는 손을 놓아야 하고, 놓았던 손을 다시 길들이기를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한다. 책 한 권을 만드는 시간 속에 그림 그리는 기법을 배우고, 익히고, 또 익숙해지는 시간까지 함께 담겨 흘러간다.『나의 작은 화판』 (100쪽) 

한 권의 그림책을 완성하기까지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의 세월을 투자한다는 권윤덕 작가. 지금까지 나온 10여 권의 그림책은 모두 시간이 빚어낸 것이다. 모든 성취에는 보이지 않는 노력이 숨어 있겠지만, 권윤덕 작가의 그림책은 특히 노력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 내놓아도 마음 불편한 구석이 없을 때까지 고치고, 망치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해 마침내 출간한 책들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끈기와 노력은 부족한 그림 실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고백했다. 

“그림을 너무 그리고 싶어서 뒤늦게 대학원에 들어갔어요. 저는 아직도 처음 그림을 배울 때 언제 붓을 놔야하는지 몰라서 머뭇거렸던 제 모습이 기억나요. 화실 선생님께서 자화상을 그려보라고 해서 그렸는데, 계속 더 그리라고 하시는 거예요. 더 그릴 부분이 없는 것 같은데 자꾸만 그림을 완성하라고 하시기에 파마머리를 아주 자세하게 묘사했죠.(웃음) 그랬더니 선생님이 겨우 이걸 그리고 다 그렸다고 하냐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나중에야 깨달았어요. 자세히 그리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요.”

그림은 권윤덕 작가가 힘든 시간을 버티게 하는 힘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성폭력의 끔찍한 기억으로 마음을 크게 다쳤을 때도, 결혼 후 아내이자 며느리, 엄마의 삶으로 힘들었을 때도 그녀를 지탱한 것은 그림이었다. 그리고 힘든 일상은 그림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 하나의 책이 됐다. 애써 잊으려고 꾹꾹 눌러왔던 어린 시절은 『엄마, 난 이 옷이 좋아요』로, 결혼 후 시가에 얹혀살게 되었던 고단한 기억은 『만희네 집』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만희네 집』을 보면 굉장히 따뜻하고 행복한 느낌이지만 실제 제 생활은 그렇지가 않았어요.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해서 시가로 이사를 가야 했고, 장독대가 많은 그림을 보면 아시겠지만 시가는 살림을 무척 많이 해야 하는 집이었거든요. 당시에는 집안일을 하는 게 너무 힘이 들었어요. 내가 온 가족의 삼시 세끼를 차려야 한다는 게 스트레스였죠. 지금은 그 시간이 조금 그립기도 해요. 아마 『만희네 집』을 그리면서 시어머니의 삶을 들여다보게 됐고, 점차 이해할 수 있게 됐던 것 같아요.” 

시어머니의 살림들은 자연스레 『만희네 집』의 귀한 이야깃거리가 됐다. 매일 보는 풍경을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권윤덕 작가는 일상을 깊숙하게 들여다보게 됐고, 덕분에 계속 열심히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허리 수술을 하셔서 제가 살림을 도맡아 하다 보니 어머니의 많은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그게 『만희네 집』에 표현되었죠. 책장을 넘기다 보면 낮엔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신발들이, 밤이 오면 가지런히 모아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죠. 이런 물건의 변화를 통해 그간의 이야기를 독자가 읽어낼 수 있길 바랐어요. 그때를 되돌아보면 내가 있는 공간의 사물들을 그리면서 힘든 시간들을 견뎠던 거 같아요. 그림책 작업을 통해서 일상을 아주 깊숙하게 바라볼 수 있었고, 덕분에 이 책을 보시는 많은 분들이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내시는 게 아닌가 싶어요. 책을 한 권, 한 권 펴낼 때마다 그런 추억들이 차곡차곡 쌓였어요.” 



나에서 시작해 세상으로 나아간 이야기 

“저는 그림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줄곧 그림을 그리면서도 ‘나는 그림을 참 못 그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내 생각 속에는 분명 떠오르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화판에 표현되지 않는 게 답답해서 그림 공부를 끊임없이 했습니다. 한동안은 안양에 있는 불성사에서 불화를 배우기도 했어요. 순간순간 해 온 공부들이 얽혀 새로 펴내는 책들에 영향을 주었죠.” 

끊임없는 공부와 노력으로 일상의 모습을 그린 작가의 세계는 시간이 지나며 점차 넓어졌다. 그림책의 주제가 자신의 삶에서 사회로 옮겨간 것이다. 대학교 1학년 때, 여성문제연구회 활동을 하며 위안부 할머니들의 실상을 깨달았던 권윤덕 작가는 ‘그분들에게 내가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늘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2010년 『꽃할머니』가 세상에 나오게 된 계기다. 제주 너븐숭이 4.3 기념관 앞 ‘애기무덤’에 그녀의 책 『시리동동 거미동동』이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된 이후에는 제주 4.3사건 이야기를 담은 책 『나무 도장』을 쓰고 그렸고, 촛불이 광화문 광장을 뒤덮은 집회를 보면서는 5.18을 떠올렸다. 지난해 출간한 『씩스틴』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담고 있다. 그림책을 만들면 만들수록 작가의 사회적 책임을 고민하게 됐다는 권윤덕 작가는 행사가 열린 당일, 6.25 70주년을 기리기 위해 『나무 도장』의 낭독을 낭독하며 북토크를 마쳤다. 

“에세이를 쓰면서 이 안의 어떤 주제들이 나를 건드리고 책을 만들게 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맨 처음에는 나로부터 출발했죠. 시댁에 들어가 사는 여성, 엄마로서의 이야기를 했다면 시간이 지나며 점점 고민이 깊어진 것 같아요. ‘그림책 작가인 나는 어린이를 어떻게 생각하나’ ‘어린이가 만들어 갈 세상은 어떤 것인가’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식으로요. 책을 낼수록 작가가 가진 사회적 책임이 무겁게 다가왔어요. 『나의 작은 화판』의 목차를 보면 그 세월을 느낄 수 있으실 거예요. 뒤로 갈수록 ‘노동’ ‘여성’ ‘인권’ ‘피해자와 가해자’ ‘총과 민주주의’ 등 거대한 단어들이 책 속에 나오거든요. 하지만 책을 읽어보시면 이게 나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돼 있고, 우리가 어떻게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는 걸 알 수 있으실 거예요.” 



권윤덕 작가에게 묻다, 독자와의 Q&A

머릿속에 있는 장면을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나요?

사실 그건 제게도 무척 어려운 일이에요.(웃음) 책을 읽어보시면 제가 그림 하나를 그리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 알게 되실 거예요. 일단 그림을 그리려면 먼저 제 안에 많은 걸 입력해야 해요. 『씩스틴』의 광장 장면을 그릴 땐 펄 시스터즈의 노래들을 찾아 들으며 그림을 그렸어요. 제 어린 시절의 추억과 소재들을 떠올리면서요. 그리고 그림을 잘 그리려면 일단 망쳐야 하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망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너무 안 풀리면 어느 순간 ‘아 나도 모르겠다’하고 일부러 망쳐버리거든요. 그럼 그 안에서 새로운 걸 찾아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물론 망친다는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죠. 그럼에도 그러한 작업을 끊임없이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작가님도 그림을 그리기 어려운 순간이 있으신가요? 슬럼프를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산책을 해요. 저희 집 뒤에 둘레길이 있어서 한 시간 정도 걷고 들어오죠. 그 길로 들어서면 자연이 주는 감동이 밀려와요.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초록 나뭇잎이 나오고 열매가 열리고, 파란 하늘이 보이고 하니까요. 집 안에서 아귀다툼하고 복잡한 심경을 그리다가 자연으로 나가면 자연은 다른 이야기를 해주는 거예요. 그렇게 걸으면서 땀 흘리고 들어오면 다시 집중할 힘이 생겨요. 그렇게 일주일만 버티면 답이 나옵니다.(웃음) 그런데 그걸 못 버티고 친구에게 전화해서 투정을 부리거나 하는 방식으로 풀어내려고 하면 계속 슬럼프가 연장되는 것 같아요. 결국 내 안으로 들어가야 해결이 되더라고요. 

그림책 작가로 언제까지 활동할 예정이신가요? 

붓을 들 수 있을 때까지 그림을 그리고,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글을 쓰고 싶어요.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좋은 그림책은 무엇인가요? 

읽는 사람의 어떤 부분을 건드리는 이야기가 있는 책이겠죠. 그 책을 읽으며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자신의 내면과 이야기를 하는 등 말할 거리가 많은 책이요. 굳게 믿고 있던 신념을 흔들거나,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건드리는 것이 좋은 그림책 아닐까요?

뒤늦게 그림을 전공하기 시작해 계속 새로운 것을 배워가며 작가로 활동하셨는데, 힘들지 않으셨어요? 

무척 힘들었습니다. 부족한 실력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도 힘들었지만 특히 힘들었던 건 집안의 반대였어요. 반대의 이유가 ‘여자는 그림 공부하면 팔자가 세다’ ‘결혼해서 잘 살면 될 텐데 왜 그런 걸 하려고 하느냐’라는 생각들이었어요. 거기에 굴복해야 하나 고민했던 시간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작가님의 그림책을 읽고 자라날 어린이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은 그림책을 만난 게 행운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에게는 굉장한 행운이거든요. 그 마음을 끝까지 가지고 가셨으면 좋겠어요. 그림책 작가는 책 속에 자신의 세계를 담아내지만, 그걸 읽는 건 결국 여러분이거든요. 그 안에 있는 이야기들은 분명 여러분이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멋진 그림책 독자로 남아 평생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작은 화판
나의 작은 화판
권윤덕 저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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