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츠바이크가 마지막으로 남긴 소설 <체스 이야기>에는 두 명의 뛰어난 체스 플레이어가 등장한다. 어릴 때 고아가 된 자신을 키워준 신부의 어깨너머로 체스를 배워 세계 챔피언이 된 미르코 첸토비치와, 나치의 비밀경찰에 끌려가 극단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시기에 어쩌다 손에 넣은 체스 교습서 한 권을 무수히 복기하며 무(無)의 시공간을 견뎌낸 B박사가 그들이다. 우연히 이들의 대결을 지켜보게 된, 오로지 즐기기 위해서만 체스를 해온 평범한 사람인 ‘나’는 생각한다. “이 게임은 절대적으로 우연의 독재에서 벗어나 있고 그 승리의 영광은 오직 정신에, 아니 어떤 특정한 형태의 정신적 재능에 있었다.”
월터 테비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7부작 드라마 <퀸스 갬빗>의 주인공 베스 하먼(안야 테일러 조이)는 첸토비치와 B박사를 혼합해 흥미롭게 재조합한 것 같은 인물이다. 1950년대 말, 자동차로 동반 자살을 시도했던 엄마가 사망한 뒤 보육원에 맡겨진 여덟 살 소녀 베스는 지루하게 통제된 일상 속에서 관리인 샤이벌(빌 캠프)의 취미인 체스에 끌린다. 여자는 체스 두는 거 아니라며 베스를 밀어내던 샤이벌은 이내 마음을 바꿔 체스의 룰과 매너를 하나하나 가르쳐주고, 베스의 실력이 놀랍도록 향상되자 더 넓은 세계로 나가도록 문을 열어준다. 그러나 재능이 빛을 발하던 이 시기에 베스는 이미 약물에 중독되기 시작한다. 보육원에서 하루에 한 알씩 나눠주는 ‘녹색 알약’을 여러 개 모았다 삼키면 일종의 각성 상태가 되는데, 이때 텅 빈 천장에 체스판을 떠올려 혼자만의 경기를 펼치는 것이 베스의 취미이자 연습이며 의식이 된 것이다.
어리고 혼자이며 정신적인 문제를 겪고 있는 데다 ‘남자들의 세계’에 뛰어든 여성의 여정을 따라가려면 그에게 닥칠 가혹한 시련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언제나 여성을 향한 폭력, 착취, 차별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다. 하지만 <퀸스 갬빗>은 그러한 고통을 견디게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비범한 천재성을 지녔고 그래서 늘 남과 다를 수밖에 없는 베스는 자신이 남자들 사이의 유일한 여자라는 사실을 개의치 않는다. 주 챔피언 해리 벨틱(해리 멜링), 미국 챔피언 베니 와츠(토마스 브로디 생스터)를 비롯해 베스 주변의 남자들도 그의 실력을 존중하며 응원한다. 또한, 어떤 면에서 승리에 대한 베스의 절실함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것은 베스의 호적수이자 세계 챔피언이며 러시아 정부의 삼엄한 관리 하에 있는 보르고프(마르친 도로친스키)다. “그 애는 고아야. 생존자. 우리와 같아. 지는 건 선택지에 없지. 안 그러면 삶이 어떻겠어?”
‘생존자’ 베스를 성장시키는 중요한 인물은 새엄마 앨마(마리엘 헬러)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엄마에게서 자라며 목숨까지 잃을 뻔했던 베스와, 피아니스트를 꿈꿨지만 좌절된 후 남편의 그늘에 갇혔던 앨마는 서로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의지하며 독특한 유대감을 나눈다. 앨마는 완벽하게 헌신적이거나 성숙한 어른은 아니지만, 오로지 체스에만 몰두하는 베스에게 “삶을 살며 성장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며 “모험을 하고 너 자신을 소중히 하라”고 조언할 만큼 그를 아낀다. 앨마가 떠난 뒤 다시 혼자가 되어 무너지던 베스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보육원에서 만난 친구 졸린(모제스 잉그램)이다. 이처럼 중요한 순간마다 손을 내미는 타인과의 관계 덕분에 베스는 고독감에 시달리고 약물과 알콜 중독 등 자신 안의 ‘악마’와 싸울지언정 비참하게 전락하거나 자멸하지 않는다.
사실 <퀸스 갬빗>을 보기 위해 체스에 관해 알 필요는 없다. 감독 스콧 프랭크는 이것이 체스가 아니라 “천재성의 대가”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베스가 매혹되었던 “단 64칸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상”이 궁금해져 ‘체스닷컴’ 어플리케이션을 내려받았더니 마침 ‘베스 하먼과 경기하기!’라는 코너가 나왔다. 8세부터 22세까지, 나이에 따라 기량이 향상되어가는 7명의 베스 캐릭터와 경기할 수 있다. 이참에 이론을 알고 싶어 <퀸스 갬빗>의 자문을 맡았던 그랜드 마스터 가리 카스파로프의 <체스 교과서>를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각 선수에게 주어지는 열여섯 개의 체스 기물에 대한 설명은 이렇게 시작된다. “퀸은 가장 강력한 기물이다. 퀸을 잃지 않도록 하라.” 어쩌면 <퀸스 갬빗>은 바로 이 두 문장, 누구보다 강력한 재능을 가진 여성이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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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칼럼니스트)
대중문화 웹 매거진 <매거진t>, <텐아시아>, <아이즈>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괜찮지 않습니다』와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