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여태껏 살면서 멋진 순간들은 다 내 의도나 기대와는 무관하게 찾아왔다. 영화를 보며 사랑을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것도, 내 인생에 단 한 번 만년설 위를 걸어본 것도, 내 노래로 무대에서 수만 관객의 환호를 받은 것도, 내가 기억하는 가장 깊었던 사랑의 순간들도, 그리고 창문 밖으로 가슴 시릴 만큼 파란 일요일의 하늘을 바라보며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말이다. 대단한 항해를 계획하지 않아도 파도는 온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파도를 맞이하고 그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전부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푸른 바다 위를 질주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안녕하세요. <오은의 옹기종기> 오은입니다. 뮤지션 장기하의 에세이 『상관없는 거 아닌가?』에서 한 부분을 읽어드렸습니다. ‘상관없는 거 아닌가?’ 정말이지 마법 같은 문장이 아닌가 싶어요. 어떤 고민의 순간에도 이 문장 하나만 있으면 한결 마음이 놓일 것 같습니다. 장기하 작가님의 말처럼 대단한 항해를 계획하지 않아도 파도는 올 테니까요. 오늘 <책읽아웃 - 오은의 옹기종기>는 중견 뮤지션에서 ‘신인 작가’로 돌아온 장기하 작가님과 함께 글 쓰는 일의 즐거움과 나답게 사는 삶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많은 기대 부탁드려요!
<인터뷰 – 장기하 편>
오은: 책을 읽으면서 장기하 작가님은 취향이 되게 분명하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기하에게 취향은 만들어지는 것인가요, 한 번 결정되면 그대로 쭉 가는 것인가요?
장기하: 취향은 계속 바뀌는 것 같은데요.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다져지는 취향도 있고요. 변하는 취향도 있어요.
오은: 책을 보고 작가님과 저의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어요. 이것 역시 취향일 텐데요. 표지가 쨍한 주황색이에요. 원래 좋아하는 색이라고요? 제 첫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에도 형광 주황이 들어가거든요.
장기하: 오늘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같은 색의 모자를 쓰고 왔는데요.(웃음) 어렸을 때부터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색을 좋아했어요. 그 얘기를 편집자님께 그냥 말씀드렸죠. 제가 이 색이 아니면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책에 반영을 시켜주셔서 선물 받은 기분을 느꼈던 기억이 나네요.
오은: 책 날개에 들어간 작가 소개글을 직접 쓰셨다고 들었어요. “자연스러움에 대한 집착이 부자연스러울 만큼 크다”라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기 위해 특별히 하는 노력이 있을까요? 참 어렵잖아요. 오늘 같은 방송도 녹음이 되어서 공개가 되는 건데 이때 최대한 몸을 편하게 만들고, 마음을 편하게 갖는 방법이 있으세요?
장기하: 특별히 노력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계속 생각하고, 강박을 갖기 시작하면 힘이 들어가고 자연스러운 말이나 행동이 안 나온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을 할 때도 사실 긴장이 많이 되거든요. 익숙한 환경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저는 늘 ‘난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해도 상관 없다’고 계속 되뇝니다. 그러다 보면 한 마디라도 하고, 그게 자연스럽게 나오더라고요.
오은: 이제 장기하 작가님 소개를 해드릴게요. “싱어송라이터, 작가, 문법 경찰. 만화잡지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자 공부는 더 이상 하기가 싫어졌다. 지상 목표는 자유로운 삶이었고, 많이 놀았다. 사회학자가 되고 싶어서 사회학과에 진학했지만 반 년 만에 포기하기도 했다. 같은 과 동기들 중에서 책을 가장 안 읽은 축이었기 때문이다. 재미있게 들은 수업은 딱 두 개, <현대철학사조>와 <불교철학>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싫어서 오전 수업은 거의 안 잡았는데 그것조차 일어나는 게 힘이 들었다. 그 감정을 거름 삼아 만든 곡이 밴드 ‘청년실업’ 시절 만든 <기상시간은 정해져 있다>이다.
원래 꿈은 프로드러머였다. 레드핫칠리페퍼스의
롤모델은 배철수고, 유발 하라리의 빅팬이다. 40대를 앞두고는, 괜찮은 아저씨가 되는 바람을 갖고 있다. 노래방 애창곡은 박남정의 <널 그리며>. 취미는 음악과 음식이고,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공연이다. 정리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질러져 있는 것은 싫어한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여기까지입니다. 대학교 시절 재미있게 들은 수업 두 개가 소개 됐어요. 이번 책을 읽으면서도 집착 버리기, 불필요한 요소 빼기와 같은 부분이 장기하의 생활이나 음악 작업의 중요한 것이란 생각을 했는데요. 이런 취향이 그때 들었던 수업 내용에 영향을 받은 걸까요?
장기하: 그런 성격이어서 불교 철학을 좋아하게 된 건지, 불교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런 성격을 더 갖게 된 건지 이제는 잘 모르겠는데요. 어쨌건 뭔가 불필요한 것을 빼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편이에요.
오은: 롤모델이 배철수님이에요. 이유가 궁금해요.
장기하: 아까 한 얘기와도 일맥상통하는데요. 쓸데 없는 말씀을 안 하세요. 군대 생활 중 가장 큰 하루의 낙이 저녁 6시부터 이어폰을 꽂고 배철수 선배님의 라디오를 듣는 거였거든요. 듣고 있으면 한 마디 한 마디를 허투루 하지 않는 거예요. 저도 DJ를 경험해봤지만 라디오를 진행할 때 쓸데 없는 말을 안 하기가 어렵거든요. 자기의 말로 1-2시간을 채워야 하니까요. 실제로 배철수 선배님을 만났을 때 해주셨던 얘기가 기억나는데요. 제가 라디오DJ를 하게 됐다고 말씀드리기 위해 찾아갔을 때 이런 조언을 해주셨어요. “할 말 없으면 하지 마. 음악 들으면 되지.” 그 말씀이 지금도 기억이 나요.
오은: 책 이야기를 좀 더 깊숙이 해볼게요. 작가님께서 직접 『상관없는 거 아닌가?』를 소개해주시는 순서입니다.
장기하: 이렇게 외판원처럼 해야 하는군요.(웃음) 일단 대단한 책은 당연히 아니고요. 작년 중순부터 올해 중순까지 약 1년 동안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쉬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쭉 적은 책이에요. 그 시기에 장기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묘사한 책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이런 사람이 있구나’ 정도의 생각을 하면서 심심풀이를 하시기에 적당한 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마지막 부분이 모두 ‘상관없는 거 아닌가’로 끝나죠.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말하자면 ‘수미쌍관’인데요.
장기하: 쌍관은 있었네요.(웃음)
오은: (웃음) 상관은 없었지만 쌍관은 있었어요. 그나저나 제목에 대한 고민은 없었나요?
장기하: 저는 고민이 없었어요. 실제로 프롤로그를 가장 먼저 썼는데요. 쓰면서 자연스럽게 제 속에는 이 제목으로 정해졌거든요. 그렇게 모든 글을 쓴 상황에서 제목을 정하는데 이 제목이 자칫 무책임해 보일 수 있겠다는 의견이 있었어요. 그것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라고 느껴서 다른 후보들을 찾았죠. 그래서 ‘아무래도 상관없는 하루’쪽으로 거의 기울었는데요. 그 상황에서 생각해보니까 글은 다 내 글인데 제목만 내 제목이 아닌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편집자님을 설득했어요. 이 책을 읽으신 분들은 제목에서 하는 ‘상관없는 거 아닌가?’라는 말이 무책임한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주실 것 같다고요. 그걸 받아들여주셔서 지금의 제목으로 나오게 된 거예요.
오은: 글을 막 쓰기 시작했을 때는 100번씩 문장을 다시 읽어가면서 쓰셨다고 해요. 그만큼 엄격한 태도로 글을 시작하셨던 것 같은데 어떤 과정이 있었던 걸까요?
장기하: 기본적인 성격인 것 같아요. 안 하면 아예 안 하고, 하면 완벽하게 해내고 싶다는 게 저의 기질 같은데요. 그러다 보니까 글 써본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라 두세 문장을 쓰고 나면 자꾸 오류가 보이는 거예요. 띄어쓰기, 주술 호응부터 시작해 계속 다시 보게 되더라고요. 다 쓰기 전에 퇴고부터 한 거죠. 이렇게는 안 되겠다 생각이 들어서 어느 순간부터는 써둔 글에서 보이는 오류는 일단 무시하고 쭉 썼어요. 그 다음에 틀린 부분을 고치자는 마음으로요. 다행히 나중에는 그게 적응이 돼서 쓸 수 있었어요.
오은: 소재 고갈이 올 때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읽으며 반성하셨다면서요?
장기하: 절반 정도 썼을 때였는데요. 쓸 게 없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 있었어요. 그럴 때 하루키의 에세이를 보면 이렇게 사소한 것을 가지고도 이렇게 재미있게 쓰는 것이 가능하구나,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내가 이렇게 포기를 하고, 소재가 없다고 징징댈 일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은: 가장 좋았던 건 후기 부분이었어요. 글을 쓸 때와 지금은 또 달라진 거죠. 쌀밥을 좋아한다고 썼지만 지금은 그만큼 쌀밥을 많이 먹지는 않고, 술을 좋아하지만 예전만큼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게 되었다고 밝혔잖아요. 이러한 변화가 1년 사이에도 있었다는 게, 또 그것을 후기에 기록했다는 게 정말 좋더라고요. 그 1년의 기간 동안 나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던 것도 같아요.
장기하: 맞아요. 정말 꼭 필요한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밴드를 마무리할 때는 마무리하는 데 정성과 노력을 많이 쏟느라 앞으로의 1년, 2년이 어떤 시간일 거라는 예상을 할 겨를은 없었는데요. 책을 내고, 돌이켜보니까 진짜 쉬길 잘했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오은: 이제 막 음악 모드로 전환이 되었다고 하셨어요. 글 쓰는 모드와 음악을 하는 모드는 어떻게 다른가요?
장기하: 음악을 만들 때는 스케줄을 정해놓고 해본 적이 없어요. 그냥 존재하는 거예요. 살다가 어떤 문장에 꽂혀서 그걸 갖고 음악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만들거든요. 그렇게 만든 곡이 10곡 정도 모이면 앨범을 내는 식이었는데요. 책을 쓸 때는 일주일에 한 꼭지를 써서 편집자님께 넘긴다는 걸 기본 원칙으로 했어요.
오은: ‘상관없는 거 아닌가?’라는 말을 최근에 해본 적은 언제인가요?
장기하: 매일 한 번씩은 해요.(웃음) 제가 정말 많이 하는 말이긴 하고요. 기본적으로는 웬만한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오은: <오은의 옹기종기> 공식 질문을 드릴게요. 먼저 <책읽아웃> 청취자에게 영업하고 싶은 단 한 권의 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장기하: 어제 읽은 책인데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번째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예요. 오래된 책이기도 해서 안 읽어봤었는데 하루 만에 다 읽었거든요. 너무 좋더라고요. 그 책을 추천하고 싶어요.
오은: 두 번째 질문, 『상관없는 거 아닌가?』가 한 권 있다면 누구에게 선물하고 싶으세요?
장기하: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는 분이 갑자기 생각이 났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됐는데요. 생전에 서점을 하셨었어요. 손자가 책을 낸 것을 못 보고 가신 건데요. 가능하다면 책을 드리고 싶네요. 책 낸 것을 정말 좋아하셨을 것 같아요.
* 책읽아웃 오디오클립 바로 듣기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신연선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