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범에게 징역 175년 선고하는 판사”, “악질 성범죄자에게 사이다 판결 내리는 판사” 같은 제목으로 온라인에 종종 올라오는 게시물이 있다. 냉정한 표정의 여성 판사가 한 남성에게 “내가 방금 당신의 사형집행 영장에 서명했다. 당신은 다시는 감옥 밖으로 걸어 나갈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2018년, 29년 동안 미국 국가대표 여자체조팀 주치의로 일하며 어린 선수 수백 명을 추행 및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래리 내서에게 로즈마리 아퀼리나 판사는 최소 40년에서 최장 175년의 징역을 선고했다. 앞서 진행된 선고 공판에는 156명의 피해생존자가 출석해 7일에 걸쳐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소녀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그들은 강한 여성으로 성장해 당신의 세계를 박살 내러 돌아온다.”는 유명한 말은 그중 한 사람인 카일 스티븐스가 남긴 말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원제: Athlete A)는 바로 이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2016년 8월, 전미체조협회가 있는 인디애나주 지역 언론에서 체조 코치들의 성 학대 문제를 보도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협회에서 이같은 문제 수십 건을 경찰에 알리지 않고 묻어버렸다는 사실도 밝혀진다. 그런데 전직 체조선수이자 변호사인 레이첼 덴홀랜더가 우연히 기사를 읽고 언론에 제보한다. 열다섯 살이었던 16년 전, 코치가 아닌 유명 의사에게 학대당했다는 것이다. 대회 우승자였던 제시카 하워드도, 올림픽 국가대표였던 제이미 댄츠셔도 자신의 피해 사실을 깨닫고 고발을 결심한다. 내서가 혐의를 부인한 기사가 공개되자, 폭발적으로 많은 제보가 쏟아져 나온다.
‘명망 있는’ 가해자들이 대개 그렇듯 대중에게 내서의 이미지는 친근하면서도 영웅적이었다. 그는 자폐 아동을 위한 재단을 세운 의사였고, 돈도 받지 않은 채 협회에서 일했으며, 선수들을 치료하는 영상을 홈페이지에 올려 명성을 더했다. 성폭력 혐의에 대한 보도가 시작되었을 무렵 학교 교육 이사회에 출마했던 내서는 전체의 22%인 2천 표가 넘게 득표했다. 반면 피해자들에게는 “(래리 내서에 대한) 마녀사냥이야.”, “너도 즐겼으면 강간이 아니지.” “유명해지려고 저런다.”는 공격이 이어졌다. 익숙한 패턴 아닌가. 어떤 남성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되는 순간 어느 때보다 그를 추앙하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감싸려 드는 ‘대중’의 움직임 말이다.
그러나 할 일을 정확하게 해낸 사람들이 있었다. 내서를 조사하던 여성 경찰은 “그렇게 불편하게 느꼈다면 왜 당시에는 아무 말 없었냐”는 전형적인 발뺌에 “10대 소녀 입장이 되어 보세요. 성폭행을 당한 사람 대부분은 매우 불안해하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라고 반박한다. 내서를 인터뷰한 기자는 “계속 되뇌었어요. ‘이 인간을 동정하지 마. 피해자, 그 일의 생존자를 동정해야지.’”라고 회상한다. 생존자를 ‘동정’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의심하거나 모욕하거나 선정적 소재로 이용하지 않으려면 이처럼 의식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그루밍 성폭력의 패턴, 폐쇄적이고 잔혹한 훈련 환경, 가해자를 비호하는 조직의 문제를 두루 짚는 구성은 가톨릭 보스턴 교구 사제들의 아동 성폭력을 고발한 영화 <스포트라이트>를 떠올리게도 한다.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는 후반부 생존자들의 법정 증언이다. 증언대에 선 여성들은 수치심이 피해자에게 강요될 감정이 아니라 가해자의 몫임을 증명한다. 눈물이 고인 채 증언하던 제이미 댄츠셔는 준비한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 순간 미소짓는다. 그는 그제야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2015년 내서를 신고한 뒤 협회 측의 따돌림 등 석연찮은 이유로 올림픽 대표팀에 들어가지 못한 매기 니콜스는 법정에 대신 출석한 어머니를 통해 자신이 익명의 ‘선수 A’가 아니라고 당당히 밝힌다. 사건 후 엘리트부에서 은퇴한 그는 2017년부터 대학부 선수로 전국 대회에 나가 뛰어난 기량을 발휘한다. “그 시즌에 제가 했던 도마 중 그게 최고였어요.”
자신이 사랑한 세계에서 끔찍한 폭력과 부조리를 경험한 사람이 살아남아 목소리를 내고 다시 최고의 퍼포먼스를 위해 뛸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생각하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을 고발한 책 『김지은입니다』를 떠올렸다. 『김지은입니다』의 편집자인 출판사 봄알람의 이두루 대표는 이 책이 “싸움의 기록인 동시에 승리의 기록”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나는 모든 생존자의 기록은 결국 승리의 기록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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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칼럼니스트)
대중문화 웹 매거진 <매거진t>, <텐아시아>, <아이즈>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괜찮지 않습니다』와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