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살짝 설렜어」를 처음 들었을 땐 다른 걸그룹의 앨범을 잘못 플레이한 줄 알았다. 선율 중심의 팝송을 추구하던 그들이, 갑작스레 무난한 트로피컬 하우스라니. 나름의 의욕적인 시도였겠지만, 개인적인 실망감은 감출 수 없었다. 「Windy day」에 혹하고 「비밀정원」에 빠져든 후 「다섯 번째 계절(SSFWL) 」에 감동했던 입장에서, 그간 착실하게 쌓아온 그룹의 캐릭터를 한순간에 뒤집어버리는 듯한, 스스로 너무 평범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활동이 종료되고 이 곡이 커리어의 최고 성과를 거둔 지금에도, 이들이 보여준 타이틀곡 중 가장 매력이 덜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명확히 말해 이 노래는 오마이걸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스타일이다. 그럼에도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퀸덤>을 통한 새로운 팬덤의 유입과 더불어, 이 노래의 형식이 KPOP하면 보편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표준모델에 가까워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퀸덤> 이후 달라진 상황에서 A&R은 많은 고심을 거듭했을 것이고, 기존의 지지층과 새로운 팬덤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떠올린 것이 「살짝 설렜어」와 같은 스탠다드를 활용하는 전략이지 않았나 싶다.
다행히도 수록곡들은 충실히 제 몫들을 해내고 있다. 특히 「Dolphin」의 만듦새는 놀랍다. 아이유의 인스타스토리의 언급된 것이 화제의 시초이긴 했지만, 장기간 음원차트의 상위권에 머물러 있는 것은 전적으로 노래의 힘이다. 가사에 담긴 독특한 발상, 이를 음악으로 이미지화하는 미니멀한 프로그래밍이 일반적인 프로듀싱과 명확히 선을 긋는다.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듯한 멤버들의 곡 이해도 및 표현력 또한 완성도의 한 축으로 작용한다. ‘da da da da da’라는 단순한 가사가 이렇게 맛깔나게 담겨 있는 노래가 또 있었나 싶을 정도. 그야말로 트렌드를 통한 진화의 이상향을 보여주며, 타이틀로 밀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머지 세 곡은 ‘내가 알던 오마이걸’에 가깝다. 「꽃차」는 노랫말에 맞는 따스한 가창과 재즈의 문법을 도입한 반주가 좋은 합을 보여주는 발라드. 8비트 퍼커션과 빈티지한 신시사이저가 발랄한 레트로 팝을 표방하는 「Ne♡n」은 그룹 특유의 대중성이 담겨있는 트랙으로, 풍성한 화음이 장식하는 후렴구가 귀에 꽂힌다. 더불어 1세대 케이팝 팬들이라면 왠지 모르게 익숙할, 세기말의 아련함을 극대화한 「Krystal」까지.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트랙들이 앨범의 완성도에 일조하고 있다.
타이틀곡의 아쉬움을 수록곡들이 메워주는, 새로운 지향점과 기존의 정체성이 알차게 담겨 있는 작품이다. 다만, 그룹이나 소속사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질 앨범이기도 하다. 고유의 색을 덜어낸 「살짝 설렜어」가 최대 히트곡이 된 시점에서, 과연 「번지」나 「다섯 번째 계절(SSFWL) 」, 「불꽃놀이」와 같은 팝 노선으로 다시금 회귀할 것인지. 아니면 이번 성공이 대중들의 니즈임을 인식하고 「살짝 설렜어」와 같은 기조를 유지할 것인지. 성공의 달콤함을 충분히 누리기도 전에 부딪힌 과제에 고민이 많을 법하다. 그래도 크게 걱정은 되지 않는다. 이를 풀어낼 실마리와 가능성이 이 앨범에 충분히 담겨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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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