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월러스의 원작 소설과 팀 버튼 감독의 영화로 잘 알려진 <빅 피쉬> 가 뮤지컬로 국내 관객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지난 2013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대본과 음악을 바탕으로 우리 정서에 맞춘 이른바 ‘한국 버전’이 무대에 오르고 있는데요. 평범한 세일즈맨으로 허무맹랑한 에피소드를 지닌 아버지 에드워드와 기자로서 사실과 현실을 좇는 아들 윌의 갈등을 통해 뜨거운 가족애와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빅 피쉬> 는 에드워드와 윌이 주축이 되는 작품이지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에드워드의 아내면서 윌의 어머니인 산드라인데요. 오랜 세월 환상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인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공연이 시작되기 전 분장실에서 배우 구원영 씨를 직접 만나봤습니다.
영화 <빅 피쉬>를 정말 좋아했어요. 동화적인 판타지를 좋아하거든요. 그렇다고 부담이 되지는 않았어요. 영화를 리메이크한 게 아니고 뮤지컬은 그냥 다른 거잖아요. 무대에서 표현하고, 심지어 음악으로 정서를 얘기하는 전혀 다른 장르니까요.
그런데 영화의 인기가 대단했던 만큼 평이 좀 갈리는 것 같습니다. 환상적인 무대가 좋다는 관객들이 있는가 하면 어린이극 같다는 얘기도 있고요.
모든 무대예술에는 이유가 있거든요. 아동극처럼 보이는 부분이 사실은 에드워드가 윌에게 해준 이야기죠. 윌의 방 안에 있는 수수깡이나 장난감 등이 소재로 형상화되다 보니 그런 것 같아요. 좀 다른 얘기지만, 이 프로덕션의 아주 초기단계부터 배우나 제작진을 캐스팅할 때 ‘따뜻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명제가 있었다고 해요.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이 아름다워야 하고, 우리가 따뜻하지 않으면 이 작품의 진정성은 전달되지 않는다고요. 실제로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마치 대학 때 교수님께 예술에 대해 배우듯이 작업했거든요. 그래서 작품이 관객들에게 호평을 얻지 못했더라도 배우들은 행복하고 감사했을 거예요. 그런데 작품에 감동도 있고 많이 좋아해 주셔서 더 감사하죠.
공연 중반에 접어들었는데, 이 즈음 배우들의 마음 상태나 무대 뒤편의 분위기가 궁금하네요.
타성에 젖지 않으려고 싸우죠. 3~4주 차가 되면 저희도 사람인지라 매순간 진실하게 살기 쉽지 않은데, 무대에서는 그렇게 해야 하거든요. 계속 공연을 하다 보면 처음 약속이 흩어지기 마련이니까 안무 클린업이나 합창 클린업 등을 통해 다잡기도 하고요. 그렇잖아 스캇 슈왈츠 연출님이 출국하기 전에 공연할 때마다 ‘오늘은 이 안무를, 이 대사를 이렇게 해보겠다’는 목표를 하나씩 가져보라고 하셨어요. 저도 아무도 모르게 적용 중인데, 이런 목표가 생기면 긴장감이 좀 생기죠.
세 에드워드가 나이대(남경주 50대, 박호산 40대, 손준호 30대)도, 캐릭터도 많이 달라서 각각 다른 연기를 하는 긴장감도 있겠는데요.
맞아요,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싶어요(웃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너무 다르거든요. 그래서 초반에는 힘들었어요. 작품에서 에드워드의 분량이 매우 많다 보니 세 사람이 일단 각자의 것을 해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을 거예요. 시간도 10대부터 70대까지 오가는데, 무대에서 체인지도 많고 숨 쉴 틈도 없으니까 다른 배우들과 뭔가 약속할 여유가 없는 거죠. 문제는 세 배우가 너무 다르니까 그들과 만나는 배우들도 세 가지를 다 준비해야 하는 거예요. 경주 선배님은 워낙 노련하셔서 신랑을 믿고 뒤에서 내조하는 아내가 돼야 한다면 호산 오빠는 공연마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감정에 집중하는 편이라서 주는 대로 받아야 하니까 날 것의 느낌이 더 나고, 준호는 장난꾸러기 같은 면이 있어서 아내가 끌고 가야 하는 면이 있고요.
뮤지컬 <빅 피쉬> 공연사진 / 에드워드(손준호),산드라(구원영)
산드라 자체는 어떤 캐릭터인가요? 표면적으로는 허풍쟁이 남편과 현실적인 아들 사이에 끼어 있는데, 그렇다고 존재감이 약하지도 않습니다.
아주 분명해요. 왜 여자 배역은 이렇게 단편적이냐고 할 수 있는데, <빅 피쉬> 는 에드워드와 윌의 이야기거든요. 이 극에서 필요로 하는 산드라의 역할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헌신하는 모습이죠. 남편의 모습을 믿고 기다려주는 아내면서 이상적인 어머니의 모습이 많이 보이거든요. 개인적으로 어려웠던 점은 노년에 에드워드와 산드라가 40년 정도를 같이 산 부부로 설정되는데, 부부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부부로 느껴져야 하잖아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인이라면 상관없는데, 노년에는 이 세 배우와 어떻게 호흡해야 정말 부부로 보일까를 많이 생각했어요. 지금도 고민이고요.
뮤지컬 <빅 피쉬> 공연사진 / 산드라(구원영)
작품에서 산드라의 갈등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런 남편이 있다면 꽤 힘들지 않을까요?
이 사람이 얼마나 진실하고 정의로운지는 아내가 가장 잘 알잖아요. 그래서 산드라의 경우 에드워드가 아무리 허무맹랑한 소리를 해도 그 부분은 내려놓았다고 생각해요. 그 안에 진실함이 있기 때문에. 진짜 순수하고 의리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아내가 모를 수 없거든요. 그러니까 그 부분은 그냥 이해해주는 거죠.
결혼하셨잖아요. 실제로 남편이 이런 성향이라면요(웃음)?
우리 신랑도 철딱서니 없고 현실 감각 없는 부분이 있어요. 하지만 ‘이 사람이 나를 위해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믿음은 있거든요. 에드워드와는 전혀 결이 다르지만, 부부 관계에 있어서 그 믿음과 의리가 확실하면 나머지는 용서가 되더라고요. 그 믿음이 문제일 때 나머지도 흔들리는 거지. 그래서 저희 남편도 많은 부분이 엉망진창이지만 제가 맞출 수 있어요(웃음).
개인적으로는 2000년대 중반 뮤지컬 <싱글즈>나 <카페인> 등에서 봤던 이미지가 있고, 지금 인터뷰를 하면서 봐도 매우 호탕한 것 같은데, 산드라와는 비슷한 면이 있나요?
이 배역이 저와는 잘 맞아서 연기하기 편해요. 무척 까불지만 저의 중심에는 여성성도 많거든요. 어렸을 때는 제 외모가 외향적인 것과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더 그렇게 살았던 것 같아요. 여성성을 내비치기 쑥스러웠다고 할까요. 그런데 나이 들면서 차분해진 면도 있고, 40대인 선배가 너무 까불면 후배들이 불편할 수 있잖아요(웃음). 사람 안에는 여러 모습이 있고, 배우들은 자기 안의 작은 것을 확장해서 연기를 하는데, 산드라는 저와 많이 닮았어요. 10대부터 60대까지 산드라의 다양한 모습이 나오는데, 저의 다채로운 모습도 표현되고요.
뮤지컬 <빅 피쉬> 공연사진 / 에드워드(남경주), 산드라(구원영)
지난해 <광화문 연가>의 ‘월하’가 굉장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요. ‘구원영 씨가 노래를 이렇게 잘하셨나’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월하와 산드라 모두 구원영과 많이 닮았어요. 까부는 구원영이 월하라면 일상적인 모습은 산드라와 비슷하거든요. 제가 말라서인지 30대 초중반에는 세고 카리스마 있는 역할을 많이 주셔서 음색도 바꿨죠. 원래를 얇은 편이거든요. 따로 중저음을 훈련하던 시절도 있었고요.
아직도 선보일 색다른 모습이 많을 것 같은데요. 앞으로 어떤 작품, 어떤 캐릭터를 맡고 싶은지 궁금하네요.
어떤 배역이든 불러주시면 감사하지만, 배우는 그 작품에 속해 있기 때문에 시작하기 전에 잘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품에 휘둘리게 돼 있거든요. 그래서 대단한 배우는 아니지만 저 역시 작품을 많이 봐요. 작품이 주는 메시지가 별로면 참여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배우가 주제를 바꿀 수는 없으니까. 예술이 기쁨과 감동을 주고, 선한 영향을 끼쳐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앞으로도 가려서 할 겁니다. 경제적인 상황에 밀려 작품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은 저만의 자존심이랄까요. 좋은 작품, 좋은 인물을 연기하고 싶다는 저만의 고집이 있어요.
그래서 맡고 싶은 캐릭터가 어떤 걸까요?
영상을 통해 구원영 씨의 ‘호탕 버전’으로 직접 확인해 보시죠!
마지막으로 지금 <빅 피쉬> 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대사나 가사가 있나요?
별 거 아닌데, 에드워드가 ‘비가 오네’라고 하니까 산드라가 ‘그러네’라고 답하는 대사가 있어요. 윌의 아내 조세핀 역의 (김)환희가 어떤 분 병문안을 갔다 노부부가 정말 그렇게 얘기하는 걸 들었대요. 아무것도 아닌 대사에 두 사람의 관계와 인생이 녹아들어 있다고 할까요. 그냥 들으면 별 거 아닌 대사가 저를 울리는 것 같아요.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