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라 감독 “<벌새>를 사랑한 것, 후회 없어요”
저의 30대를 생각했을 때 <벌새>라는 작품을 굉장히 뜨겁게 사랑했어요. 그 사랑에 후회가 없는 것을 칭찬하고 싶어요.
글ㆍ사진 임나리
2020.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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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를 사랑한 것, 후회 없어요


‘2019 예스24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벌새』 의 북토크가 열렸다. 지난 12월 23일 저녁, <벌새>를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김보라 감독과 만났다.

 

‘2019년 올해의 영화’로 <벌새>를 꼽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작품은 큰 사랑을 받았고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누적관객수 14만 명 이상’, ‘전 세계 영화제 46관왕 달성’이라는 기록이 말해주듯 관객과 평단 모두의 인정을 받았다. 개봉과 동시에 출간된 시나리오집 『벌새』 는 무삭제 시나리오와 함께 김보라 감독의 에세이, 앨리슨 벡델과 김보라 감독의 대담을 담아 영화 너머에 있는 이야기들을 전했다. 같이 실린 최은영 소설가, 남다은 영화평론가, 김원영 변호사, 정희진 여성학자의 글은 <벌새>의 세계를 더 넓고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이 날의 북토크는 김보라 감독에게 직접 듣는 『벌새』  이야기로 채워졌다. 행사에 앞서 독자들이 보내온 질문들을 바탕으로, 시나리오집 책임편집을 맡았던 김지은 편집자 묻고 김보라 감독이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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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편집자(이하 김지은) : 사실 ‘예스24 올해의 책’ 시상식 때 감독님이 참석하지 못하셨어요. ‘디렉터스컷 어워즈’에서 수상을 하시느라 저희가 소감을 대독하고 상을 받았습니다. 감독님, 이 자리에서 독자 분들께 다시 한 번 소감을 들려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김보라 : 오늘 북토크에 와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사실 『벌새』 의 기획은 출판사에서 먼저 제안해주셨어요. 저는 각본집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지, 이렇게 만 부 이상이 판매되고 ‘올해의 책’이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영화에서 삭제된 부분이 많았는데 책을 통해서 복원해주신 출판사 분들, 좋은 글을 써주신 남다은, 김원영, 정희진, 최은영 작가님께 감사합니다.

 

김지: 저는 시나리오를 먼저 보고 나서 영화를 봤는데, 글만으로도 되게 단단하고 서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학작품으로써 충분히 다가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고요. 감독님도 저희가 기획한 모든 일들을 흔쾌히 받아주셨고, 앨리슨 벡델과의 대담도 직접 성사시켜주셔서 저희는 정말 감사하게 작업했던 것 같아요.


김보라 : 독립영화 판에서도 영화 <벌새>가 잘 될지 몰랐다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저희도 ‘잘되면 5만 (관객) 정도 될까? 우리 한 번 5만을 꿈꿔볼까?’ 이런 시기였거든요. 당연히 책 『벌새』 도 그에 비례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출판사에서 선경지명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하셨어요. 그 부분이 되게 감사해요.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믿어주신 것 같아서요. 특히 에세이를 넣은 건 전적으로 출판사의 제안이었는데 이 책이 인문사회학적 관점에서 <벌새>의 논의를 넓혀주는 구성을 원하셨어요. 저도 그게 되게 좋았어요. 각본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글로 인해 책이 조금 더 완성되는 구성을 제안해주셨던 것에 감사한 것 같아요.

 

김지은 : ‘작가의 말’에 보면 감정적으로 깊은 내용들이 담겨 있잖아요. 스스로를 계속 채찍질 해온 과정이 쓰여 있는데, 이 모든 일들이 끝난 뒤에 스스로 칭찬의 말을 해주신 적 있나요? 만약 안 해주셨다면, 자신에게 어떤 칭찬을 해주고 싶으세요?


김보라 : 서문에 담으려고 했던 건, 어떤 식의 일단락이 되었다는 것에 감사하다는 생각이었고요. 제가 최근에 친구한테 솔직하게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요. ‘사실 나는 데뷔를 되게 늦게 했다고 생각해서 아쉽기도 했는데, 생각해 보면 모든 커리어가 한 번에 잘 쌓아진 것 같아서 요새 기분이 되게 좋다’는 말을 했어요. 내가 마음을 다할 수 있는 시기에 정말 끝까지 노력해서 완성을 한 게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때는 그 기간이 아쉽기도 했지만 지금으로써는 후회가 없고요. 저의 30대를 생각했을 때 <벌새>라는 작품을 굉장히 뜨겁게 사랑했어요. 그 사랑에 후회가 없는 것을 칭찬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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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벌새>의 시나리오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으로 은희와 영지가 주고받는 편지를 꼽은 김보라 감독은 두 편지를 차례로 낭독했다. 그리고 시나리오집
『벌새』 에 실린 다른 작가들의 글, 앨리슨 벡델과의 대담 가운데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부분을 골랐다. 최은영 소설가가 쓴 「그때의 은희들」 속 한 구절과 감독 자신이 앨리슨 벡델에게 건넨 말이었다. 두 구절을 낭독한 후 김보라 감독이 독자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이어갔다.

 

김지은 : ‘영화 <벌새>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 계속 바뀐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시나리오도 마찬가지인가요?


김보라 : 사실 시나리오는 편집할 때 본 뒤로 다시 읽지는 않았는데요. 좋아하는 장면이 하나는 아닌 것 같아요. 전체가 다 엮여 있을 때 좋은 것이고, 그래서 뭘 하나 빼는 게 어려운 것 같아요. 시나리오 회의할 때 디테일을 빼라는 이야기가 많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한 부분을 빼면 모든 게 해체되는 거예요. 저는 시나리오의 작은 디테일들이 항상 좋았던 것 같아요. 시나리오에 있는 ‘아베크 노래방’도 그래서 좋았어요. 사람들이 일상에서 지나가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그걸 어린아이 때 들으면 평생 기억에 남기도 하는 것 같아요. 아베크 노래방의 사장님이 하시는 이야기도, 은희는 그냥 웃어넘기지만, 나중에 노트에 아베크라는 단어를 쓰잖아요. 꼭 중요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냥 지나가다가 들은 이야기조차도 나에개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는 거죠. 그러한 삶의 무늬들,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어요. 영화에서 편집된 장면 중에 은희와 수희가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 장면이 있는데, 수희가 은희에게 ‘너 잘못 했어? 안 했어?’라는 말을 하는 것조차도 그런 일상의 언어폭력을 나중에 은희가 지숙이한테 대물려 준단 말이죠. ‘우리가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가’라는, 제가 <벌새>에서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에 어떤 장면 하나를 빼기가 되게 어려웠고요. 그래서 많은 ‘작은 부분들’이 소중했던 것 같아요.

 

김지은 : 감독님에게 ‘기록’은 어떤 의미이고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기록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김보라 : 기록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했던 것 같아요. 많이들 그러셨을 텐데, 초등학교 과제로 일기를 써야 했거든요. 그때는 그게 되게 싫었는데 뭔가 쓰는 게 습관이 됐어요. 그러고 나서 기록을 열심히 하기 시작했던 건, 2000년대 초반에 ‘언니네’라는 페미니즘 포털이 생겼을 때예요. 그곳에 ‘자기만의 방’이라는 블로그 같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 안에서 많은 여성분들이 글을 쏟아내기 시작했죠. 그 글들을 읽었을 때 ‘여자들은 기록을 해야 되는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기록하고 고백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을 안 해주고, 이런 속내가 있었다는 걸 아무도 모를 것 같은 거예요. 그때 그 사이트를 만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었던 것 같아요. 그 전까지 만들었던 영화들을 보면 어떤 식의 사회의 관점이 있었거든요. 이성애적 관점이라든가 가부장제의 관점이 내 안에도 있는 거예요. 그러다 여성들의 기록을 보면서 진짜 여성이 되어갔고, 내 안의 여성의 시선을 체화하기 시작하는 전환을 맞이했어요. 나의 이야기를 기록하겠다는 마음도 생겼고요. 그 웹사이트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고, 정말 열심히 글을 쓰고, 다른 사람의 글에 댓글을 달았던 게 <벌새>에 도움이 많이 됐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는 일기를 매일 썼어요. 지금도 매일 한 줄이라도 쓰려고 해요.

 

김지은 : 책날개에 보면, 차기작으로 <카펫 아래의 개들>을 구상 중이라고 적혀 있잖아요. 어느 정도나 진행되었나요?


김보라 : 사실 너무 바빠서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읽지 못했어요. 제가 1월부터 몇 달 정도 한국을 떠나있을 건데요. 계속 있으니까 거절하지 못하는 것들도 생기더라고요. <벌새>와 관련해서 어떤 것들이 있을 때 거절을 못하는 부분이 있는데, 몇 달 떨어져 있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몇 달 동안 미국에 가서 글을 쓰려고 결심을 했어요. 가서 좋은 글들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다른 시나리오도 읽어보고요. 이렇게 말해놨으니까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웃음). <벌새>도 2011년쯤부터 소문을 냈거든요. 가족, 친구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아니까 도저히 창피해서 포기를 못 하겠더라고요(웃음). <카펫 아래의 개들>, 기대해주세요(웃음).

 

김보라 감독과 김지은 편집자의 이야기가 끝난 후, 북토크에 참석한 독자들이 질문했다. <벌새>를 향한 애정과 감사와 응원이 담긴 질문들이었다. 김보라 감독은 독자들이 감상을 나눠준 것에 감사를 표하면서 “늘 감상을 나눠주셨던 분들 덕분에 영화를 만들고 글을 쓴다는 게 나의 노동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누군가에게 가닿을 수 있었다. 그것이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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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선생님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손가락을 움직인다’고 말하잖아요. 감독님은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도달하신 걸까 궁금했어요.


시나리오에서 유일하게 제가 쓰지 않은 대사예요. 다른 언니가 말해준 이야기를 쓴 건데요. 그 언니가 우울증에 빠졌을 때 아는 선배가 그런 이야기를 해줬어요. 제가 십여 년 전에 그 이야기를 듣고 괜찮다고 생각이 돼서 기록을 해놨었는데 <벌새>를 하면서 생각이 나서 영지의 대사에 가져왔어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되게 새로웠던 것 같아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그냥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거잖아요. 손가락을 움직이는 게 사소해보일 수도 있지만 되게 정직하고 본질적인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우리를 힘나게 하는 게 어떤 거대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말을 가지고 와서 영지의 대사를 썼어요.

 

영화의 마지막에서 영지가 죽지 않았다면 어떤 상황이 됐을까요? 생각해보신 적 있으세요?


시나리오 초반 단계에서부터 영지는 사라지는 걸로 생각을 했어요. 정말 아름다운 건 사라져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는데요. <벌새>를 처음 쓸 때만 해도 지금보다 어려서, 30대 초반이었는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웃음). 만약에 다음 작품을 만든다면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멈춰지는 게 아니라, 물론 그것도 의미가 있지만, 자질구레하고 지저분한 것도 있지만 동시에 아름다움과 같이 가는 관계를 조금 더 묘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 이렇게 관계들이 다 쓰러지느냐’는 질문도 많이들 하셨고, 특히 영지를 많이 안타까워하셨는데요. 30대 초반의 저는 그걸 이상화했던 면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당연히 여러 가지 맥락이 있기는 했어요. 어떤 신화적인 구조로써, 은희의 옆에 계속 조력자가 있으면 은희가 성장을 못한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래서 영지는 퇴장을 시킬 수밖에 없었어요. 만약에 은희와 영지가 만났다면, 좋은 관계가 될 수도 있었겠죠. 농도는 조금 연해지지만 서로 기댈 수 있는 관계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오히려 중학교 때 헤어졌다가 나중에 졸업하고 다시 만나는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게 이상적인데 그 당시에는 헤어지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벌새김보라, 최은영, 남다은, 김원영, 정희진 저 외 1명 | arte(아르테)
영화 [벌새]에서 출발하지만 영화 안팎의 세계를 섬세하게 짚어 내고 확장하며, 1994년의 사회와 오늘, 예술과 현실을 연결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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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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