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드라마 <두 번은 없다>의 한 장면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지. 애 딸린 에미가 어디서 팔자 좋게 자리 깔고 앓아 누워, 눕기를?” 얼핏 들으면 둘도 없이 시대착오적인 이야기지만, 사정을 뜯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히기 위해 상복도 벗지 못한 채 홀로 서울로 올라왔던 금박하(박세완)는,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산통을 느끼고는 길 한복판에서 쓰러진다. 마침 코 앞에 있던 낙원여인숙 투숙객들의 도움을 받아 여인숙에서 아이를 낳고 몸을 풀던 박하는, 남편의 유골을 뿌리고 돌아온 다음날 긴장이 풀려 앓아눕는다.
박하의 아이 열무를 받고 오갈 곳 없던 박하에게 여인숙에서 지내라고 허락해 준 사장 복막례(윤여정)는, 젊은 나이에 혼자 열무를 키우며 살게 된 박하를 보며 말한다. 이제 강인해져야 아이도 키우며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낼 수 있다고. 물려받은 여인숙을 홀로 관리하며 오랜 세월을 버텨낸 막례는 ‘가끔은 울어도 좋다’ 같은 다정한 위로 같은 건 잘 할 줄 모를 것이다. 그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상대도 이 악물고 이 세상을 무사히 살아 내기를 바랄 뿐이겠지.
투숙객이라기보단 뒤치다꺼리를 해줘야 하는 가족에 가까운 이들을 품고 사는 MBC 토요드라마 <두 번은 없다> 속 낙원 여인숙 사장 복막례의 얼굴은 사실 아주 새로운 얼굴은 아니다. 윤여정이 연기한 이재용 감독의 영화 <죽여주는 여자>(2016)의 ‘소영’ 또한 허름한 이태원 연립주택에서 트랜스젠더 바 마담 티나(안아주)와 지체장애인 청년 도훈(윤계상),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어머니가 출입국 사무소로 끌려간 뒤 홀로 남겨진 코피노 소년 민호(최현준)를 보듬고 함께 기대며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전통적인 어머니 상을 연기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평생을 모던한 개인주의자로 살아온 윤여정은 종종 이렇게 대안적인 어머니 상을 연기할 때면 한층 더 탁월한 성취를 이룬다. 엄청나게 살갑거나 헌신적인 어머니는 아니지만, 쌀쌀맞고 정 없어 보이는 외면 틈새로 차마 모질지 못한 내면이 자꾸만 비집고 나와서, 결국은 모두와 더불어 살아가는 인물. 대단한 희생이나 애끓는 절절함 같은 건 없지만, 자신이 예민하고 외로운 만큼 제 지붕 밑 식구들의 예민함과 외로움 또한 잘 읽어내고 제 방식대로 연대해주는. 이를테면 동지적 어머니라 부를 만한 얼굴.
tvN <디어 마이 프렌즈>(2016) 이후 3년 만의 드라마 출연으로 화제를 모은 <두 번은 없다>에서, 정작 윤여정이 연기하는 복막례의 스토리라인은 아직 본격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그저 식구들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매일 저녁 여인숙 운영 일지를 적으며 잠이 드는 것이 전부다. 그럼에도 드라마 전체에서 그의 존재감이 강하게 느껴지는 건, 혈연관계나 의무감 때문에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상대의 결핍을 읽어내고 공감할 줄 아는 동지적 어머니의 얼굴을 탁월하게 연기해 내는 윤여정 덕분일 것이다.
이승한(TV 칼럼니스트)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
찻잎미경
2020.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