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덤'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 혜정 (사진 제공 : FNC 엔터테인먼트)
Mnet ‘퀸덤’ 1차 경연에서 AOA는 자신들의 히트곡 ‘짧은 치마’를 불렀다. 멤버 혜정은 이 곡의 정체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도입부와 코러스 파트를 맡았다.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케이블 채널과 지상파 채널의 음악방송에서 각기 다른 안무를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그때, 혜정은 무대에 누워서 자신의 몸을 쓸고, 위에서 자신의 전신을 찍는 카메라를 나른하게 응시했다. 자신을 버리지 말라며 상대를 하이힐과 검은 스타킹, 하반신을 연신 부각시키며 나의 필요를 설득하는 여성. 2014년의 혜정은 한국 음악산업에서 그렇게 자신들의 쓸모를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2014년 1월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최근까지 발표한 AOA의 모든 퍼포먼스를 통틀어 가장 많이 등장한 안무는 남성을 유혹하기 위해 골반을 크게 흔들거나 돌리는 안무였다. AOA가 원래는 댄스그룹이 아닌 밴드로 출발했다가 노선을 변경했다는 점은 ‘짧은 치마’, ‘단발머리’, ‘사뿐사뿐’ 등이 모두 히트하며 “잘한 일”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쾌활하게 악기를 연주하며 카메라를 향해 자신감 있게 뻗던 그들의 손은 어딘가에 결박당한 듯이 묶이는 안무로 변했고, 혜정을 비롯해 잘 놀고 명랑한 AOA 멤버들의 모습은 팬들만 아는 비하인드 카메라 속 모습으로만 남게 되었다.
사진 출처 : Mnet '퀸덤' 캡처
하지만 ‘퀸덤’에서 AOA 멤버들은 그들의 퍼포먼스가 사실은 철저히 만들어진 가상의 자아였다는 점을 대중 앞에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멤버 지민이 랩을 통해 “나는 져버릴 꽃이 되긴 싫어 / I’m the tree”라고 소리 내어 말하는 역할을 맡았다면, 혜정은 행동으로 실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준다. 얌전해 보이는 원피스를 입고도 게임에 참여하겠다며 손을 번쩍번쩍 들고, 레몬을 입에 넣고 씹다가 과즙을 줄줄 흘린다. 온몸을 흔들며 웃다가 의자가 부서지고 난 뒤 당황해서 침이 나왔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사실 나는 노래를 잘 안 듣는다”며 비난의 소지가 될 수 있는 말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한다. ‘혜정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tvN ‘SNL 코리아’에서 장난스럽고 능청맞은 모습을 보여줬던 그가 ‘퀸덤’에서는 아예 날것 그대로의 ‘신혜정’을 드러낸다.
이런 혜정의 모습은 지금 AOA의 무대를 다른 눈으로 보게 만드는 힘이 된다. 2019년 10월, 똑같은 ‘짧은 치마’를 불렀는데도 혜정을 비롯한 AOA 멤버들의 눈빛은 4년 전과 사뭇 달랐다. ‘퀸덤’ 버전 ‘짧은 치마’와 ‘너나 해’에서 그들은 2014년이었다면 상상하지 못했을 크고 활력 넘치는 동작들을 선보이며 자신만만하게 웃는다. ‘짧은 치마’의 가사에 위화감이 드는 이유와 ‘너나 해’의 가사에 박수를 치는 이유는 같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며, 나의 쓸모를 알아달라고 유혹하던 여성 아이돌, 그중에서도 가장 선정적인 파트를 연기하던 혜정의 변화. 그는 이제 수동적인 여성의 굴레를 우당탕 소리가 나게 부수고 나와버렸다. 너무 세게 부수고 나오는 바람에, 다시 끼워 맞출 수도 없다. 그건 “너나 해”라지 않나.
박희아
전 웹진 IZE 취재팀장. 대중문화 및 대중음악 전문 저널리스트로, 각종 매거진, 네이버 VIBE, NOW 등에서 글을 쓰고 있다. KBS, TBS 등에서 한국의 음악, 드라마, 예능에 관해 설명하는 일을 했고, 아이돌 전문 기자로서 <아이돌 메이커(IDOL MAKER)>(미디어샘, 2017), <아이돌의 작업실(IDOL'S STUDIO)>(위즈덤하우스, 2018), <내 얼굴을 만져도 괜찮은 너에게 - 방용국 포토 에세이>(위즈덤하우스, 2019), <우리의 무대는 계속될 거야>(우주북스, 2020) 등을 출간했다. 사람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