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저 베이커, 드럼 거장의 역사
블루스, 록, 헤비 메탈은 물론 재즈계와 월드 뮤직, 나아가 디스코 펑크(Funk)와 힙합까지 그의 드럼 연주가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우리는 이 위대한 드러머, 진저 베이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글ㆍ사진 이즘
2019.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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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드러머'  '드럼 마왕' 진저 베이커가 현지 시각 6일 향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66년 전설의 파워 트리오 크림(Cream)의 결성을 주도한 당대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던 파괴적이고도 정격적인 드럼 연주로 일거에 록의 판도를 바꿔 놓은 것은 물론 프리 재즈의 자유로움과 월드 뮤직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엮어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붉은 머리칼의 드럼 마에스트로, 록 최초의 드럼 슈퍼스타, 진저 베이커의 업적을 굵직한 이름으로 기억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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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 파워 트리오

 

크림은 대중음악 역사상 최초의 슈퍼 그룹이다. 지금도 전설이지만 당대에도 검증된 실력자들이었던 에릭 클랩튼, 잭 브루스와 진저 베이커는 기타 - 베이스 - 드럼의 삼중주로 낼 수 있는 소리의 극한과 무아지경의 즉흥 연주, 사이키델릭의 성향에 엄격한 규격을 부여하며 록 역사에 거대한 이정표를 세웠다. 흥미로운 점은 멤버들 중 누구도 크림을 록 밴드라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프리 재즈에 심취한 잭 브루스는 크림을 '일종의 재즈 밴드'라고 생각했으며 야드버즈를 '너무 팝적’이라 탈퇴한 에릭 클랩튼은 블루스에 영혼의 충성을 맹세한 뒤였다. 팀의 결성을 주도한 진저 베이커 역시 '나는 로큰롤이 싫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실제로 진저 베이커를 음악의 길로 안내한 이들은 애커 블릭, 테리 라이트풋 같은 재즈 맨들이었으며 그의 상징적인 더블 베이스 드럼 (더블 킥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연주는 듀크 엘링턴 밴드의 드러머 샘 우드야드로부터 따온 것이었다.

 

뜻이 어찌 됐든 그 치열함과 극한의 테크닉은 크림을 1960년대 록 시장에서 단숨에 슈퍼스타로 만들어주었다. 모든 것이 혁명이었지만 진저 베이커의 드럼은 특히 그 적수가 거의 없었다. 모든 록 드럼 솔로 곡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Toad' 한 곡만으로도 진가가 드러난다.

 

영화 <조커>에 삽입되어 익숙한 'White room'에선 묵직한 베이스 드럼과 세밀한 스네어 드럼, 하이햇 컨트롤을 오가고, 17분짜리 'Spoonfull' 라이브를 통해 기막힌 셔플 연주와 강약 조절로 연주 미학의 처절한 꽃을 피운다. 'Sunshine of your love'가 헤비메탈의 조상이 될 수 있는 이유도 에릭 클랩튼의 화려함과 잭 브루스의 백비트 리듬을 보좌하는, 강철같고도 그루비한 드러밍 덕이다.

 

1966년 결성된 크림은 2년 동안 , , 단 세 장의 정규 앨범으로 그들의 운명을 마무리지었다. 잭 브루스는 진저 베이커의 드럼 세트를 박살냈고 진저 베이커는 드럼 스틱으로 잭 브루스의 머리를 내려치며 응수했다. 대중음악의 위대한 세 광인(狂人) 중 이제 남은 이는 에릭 클랩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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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페이스와 새로운 시작

 

크림 해체 후 진저 베이커는 에릭 클랩튼과 함께 또 하나의 슈퍼 그룹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를 결성한다. 트래픽(Traffic)의 키보디스트 스티브 윈우드가 전권을 잡은 블라인드 페이스는 비록 에릭 클랩튼의 싫증으로 단 한 장의 앨범만 남기고 사라졌으나, 진저 베이커는 이 와중 15분짜리 'Do what you like'에서 블루 노트 레이블을 연상케 하는 섬세한 심벌 컨트롤과 야성미 넘치는 드럼 솔로로 또 다른 슈퍼 그룹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냈다.

 

진저 베이커의 재즈적 터치에 반한 스티브 윈우드는 블라인드 페이스 해체 후 제 3의 슈퍼 그룹 진저 베이커스 에어 포스(Ginger Baker's Air Force)에도 함께한다. 드럼, 퍼커션, 팀파니와 보컬을 담당하며 명실상부 리더로 거듭난 진저 베이커는 재즈 록 퓨전과 아프로 비트를 선보이며 본격적으로 음악 세계를 확장해보였다. 실황의 자신감 또한 여전해, 그룹의 첫 정규 앨범 역시 영국 로열 알버트 홀에서의 라이브 실황 기록을 그대로 수록한 것이었다.

 

데이브 브루벡 콰르텟이 'Blue rondo a la turk'로 선보였던 12/8 박자에 가나 드러머 레미 카바카가 토속적 색을 더한 'Aiko biaye'는 향후 이 붉은 머리 드러머의 행선지를 예고한 트랙이었다. 진저 베이커는 1971년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라고스로 건너가 다큐멘터리 감독 토미 파머와 함께 '아프리카의 진저 베이커'를 촬영한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의 전설적 만남이 성사된다. 아프로 비트의 대부 펠라 쿠티(Fela Kuti)를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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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라 쿠티와 아프로비트, 그리고 재즈 탐구

 

펠라 쿠티는 나이지리아 요루바족의 전통 음악으로부터 재즈와 펑크(Funk)를 추출해낸 아프로비트(Afrobeat) 리듬의 창시자다. 사이키델릭 음악의 주술성, 블루스의 메기고 받기, 전통 타악기의 리듬을 결합한 아프로비트 음악은 재즈와 블루스의 고향에서 리듬의 원형을 찾고자 랜드 로버를 몰고 아프리카를 횡단하던 진저 베이커에게 너무도 매혹적인 것이었다.

 

둘은 펠라 쿠티의 밴드 아프리카 '70(Africa '70) 무대에서 협연을 펼쳤고 이 실황은 1972년 로 기록됐다. 아프리카 '70의 드러머 토니 앨런과 진저 베이커는 이 앨범에서 본능에 온몸을 내던진 채 리듬과 그루브의 세계로 빠져들어간다. 훗날 재발매된 앨범에 수록된 1978년 베를린 재즈 페스티벌에서의 16분짜리 드럼 솔로는 두 대륙의 장인이 만든 치열한 악기 예술의 현장이다.

 

이후에도 진저 베이커는 베이커 거비츠 아미(Baker Gurvitz Army), 진저 베이커 트리오(Ginger Baker Trio)를 결성하며 테크닉의 고삐를 놓지 않았다. 섹스 피스톨스의 조니 로튼이 독립하여 만든 밴드 퍼블릭 이미지 리미티드(Public Image Ltd)의 전위적이고 삭막한 리듬 역시 진저 베이커의 창작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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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머리의 드럼 거장은 고집스러웠다. 1993년 그를 로큰롤 명예의 전당으로 인도한 크림 활동에 대해 '신에게 맹세컨대 나는 록을 연주하지 않았다. 크림은 두 명의 재즈 플레이어와 한 명의 블루스 기타리스트가 즉흥 연주를 선보인 팀이었다.'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2013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대상을 수상했던 다큐멘터리 <드럼의 마왕 진저 베이커>의 늙은 아티스트는 분명 고독하고 비타협적인 인물이었다.

 

바로 이 올곧음이 대중음악에 다채로운 씨앗을 뿌렸다. 블루스, 록, 헤비 메탈은 물론 재즈계와 월드 뮤직, 나아가 디스코 펑크(Funk)와 힙합까지 그의 드럼 연주가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우리는 이 위대한 드러머, 진저 베이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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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저 베이커 #크림 #드럼 마에스트로 #White r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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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